딸~ 사소, 내 딸 사소, 물 많은 내 딸~ 사소!!!
옛적 장기 장날 방산 할매가 산딸기를 다라이에 이고 댕기면서 딸기 파는 소리입니다.
요즈음은 복분자가 많이 생산 되는 곳이기도 하지요.
우편 높고 큰 바위가 할배바위, 그 옆에 아담한 첩바위가 나란히 있습니다.
옛날에 영감 할마이가 살고 있었드레
웨떤 하룻날 영감이 어데가디 시앗을 델꼬 와 사랑에 들어 앉혔지
영감이 첩사이를 델꼬 오이 부아가 난 할마이는 고마 집을 나와서는 고마 돌아가지 않을라꼬 그래
아아를 서이나 뒀는데, 그 중에 애가 달은 맏이가 가서 고마 오시라고 오시라고 달래도 안듣네
둘째가 가서 왈겨도 안듣고 세 번째 아가 가서 그래도 안되는 기라.
영감이 이래노이까네 궁리궁리 카다가 현내 뜰 앞의 양포 사는 룡에게
‘니가 한번 달래도가‘ 하고 부탁 했거던.
그라고 보이 이 영감 할마이도 보통 사람은 아닌 모야이라.
할매바위 뒤쪽으로 룡바위가 길게 누워 있습니다.
양포 사는 룡이 ‘그래 보꾸마’ 그고 대답하고는 와서 달래보는데 이래 왈겨도 안되고 저래 구슬카도 안되는 기라.
고마 골이 난 룡이 ‘푸르르’ 하고 몸을 몇 번 떨디
‘아이고 속 시끄러버라 너거는 그래 살아라’
하고는 영감 할마이의 그새에 들어가 큰 산으로 둔갑을 해 둘을 영영 갈라 놨다고 그래.
삐진 할매바위가 퉁궁스럽다.
그이께네 삐진 할마이도 돌이 되아뿌고, 그래도 핑생을 살던 할마이를 몰래라 못하는 영감은 그 산을 넘어
어떤가 허고 넘가 보다가 똑 같이 돌이 됐뿌고.
영감한테 ‘그만 하만 됐니더’ 거든 첩도 돌이 됐다고 그래.
그래가 기단하이 길게 누운 산은 룡이 둔갑해 그리 된것이고, 할마이는 할매바우로 남았다 그래.
저 룡 뒤로 삐죽하게 솟은 바우 두 개는 영감바우, 첩바우라고 마을에서는 그래.
저 산 밑에는 그때 살던 집하고 논밭 젠지가 다 그대로 묻힜다꼬 그래.
아아들? 몰래 아아들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데.
물고 있던 여의주는 깨져 버리고 빈 아가리만 쩍 벌리고 있는 룡.
저어 룡 바우에도 말이 있어. 저 아래 바로 거어 묘가 있는데 ‘창암’ 사람 꺼라.
성가라꼬 그지 아매. 그 집안 사람들이 여기다가 묘를 써서 발복을 했는데, 큰 부자가 됐어.
부자가 되고 나이 손이 많에, 얼매나 오는지 손이 하루도 없는 날이 없어, 끊기잖코 오는기라.
그라이 메누라가 진절머리가 나, 그리 손은 마이 오고.
룡 바위임을 확인 시켜주는 각자.
한 날은 어떤 중이 시주를 달라꼬 그래.
이 메누리가 ‘주는거는 얼매든지 주꾸나 마는 우리 집에 오는 손 좀 어예 덜 오게 해도가’ 하는기라.
그르이까네 그 중이 하는 말이 ‘윗대 할배 누구누구 묘가 저 짜 맞능교?’ 하는기라.
글타꼬 하이까네 ‘거어 가서 룡 아가리에 이러이러한 돌이 있는데 그 돌을 깼뿌라’ 그래.
그래가 밑에 하인을 델꼬 가가 거 가면 꼭 룡 아가리 같이 생긴게 있는데 그 아가리 안의 돌을 깨라 그래.
그래가 그 돌을 깨고 나니까 거짓말처럼 손이 딱 끊기드래.
그게 여의준데, 여의주를 깼뿌랫지. 지금도 가마 그때 돌 깨진게 마이 있어.
그래가 그 집이 쫄딱 망했다 그지, 손도 끊기도...
(이하우 선생님의 바위문화 이야기 중에서)
훈도공이눌 성판권안유적
임란 시 장기향교의 오성팔현 위패를 용암의 감실 속에
숨겨 화를 면했다는 공을 기념하여 이렇게 바위에다 글자를 새겼네요.
장기읍성 답사 시 함깨 톺아 볼 수 있는 우리 바위문화 이야기입니다.
할배바위, 첩바위, 할매바위, 용암 각자, 용암감실은 거리도 가깝고
거의 한 곳에 집중되어 있어 톺아 보기도 편할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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