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지역/경상도

영덕 이야기 속으로 - 그 두 번째

참땅 2016. 4. 20. 17:18

 

영덕 이야기 속으로 - 두 번

 

미륵불

          

0416일 토요일에 당한 상황인지라 그 후 도난신고가 접수되었는지 아니면

동네사람 누군가가 보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진 상의 미륵입니다.

 

미륵 조성 설 두 가지

옛날 200여년전 경지 정리하기 전에  논 옆 웅덩이네 형제가 놀다가 한 아이가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익사한 아이를 위하여 그 자리에 부모가 미륵불을 모셔 후세에는

미륵불이 되어라는 뜻에서 모셨다고 한다.

30여년전 경지 정리 위원장을 지낸 정거사님이 말씀으로는 익사한 그 자리를 메워

그 옆에 미륵불을 모셨다고 한다.  

 

파헤진 자리가 보이고 미륵을 끌고간 흔적이 뚜렷하다.

 

병곡초등학교 정문 좌측 논에 미륵상이 있다고 하여 부랴부랴 길을 나섰다.

병곡초교 내에 주차를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래도 사진 상의 위치하고

현재의 분위기는 어설프다. 다시 초등학교를 나와 오던 길로 되돌아 나서니

구초등학교 정문이 나왔다. 겨우겨우 학교 운동장 구석에 주차 후 좌측 논으로

가 사진 상의 위치와 비교를 하며 탐색을 하니 아뿔사! 미륵이 있었던 자리가

분명한 곳은 이미 파헤쳐져 있어 석상을 옮겼거나 아니면 도난당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까운 병곡면사무소로 향하였다.

토요일인데도 다행히 몇몇 사람들이 있어 석상에 관해 불어보니 친절하게도

응대해주었다.

 

미륵이 묻혔던 구덩이는 깊지 않아 쉽게 가겨갈 수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 미륵불을 제보한 사람은 통화가 되지 않았지만 논주인 할아버지와 연결이

되어 현장을 가보더니만 잃어버린 게 확실하다며 같이 좀 파출소에 가서 신고를

도와달란다고 하였다.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 할아버지와 함께 파출소로 가

도난신고를 하였다.

파출소 경찰과 함께 다시 현장으로 가 사진 보여주며 도난 시기가 겨우 얼마 되지

않았음도 일러 주었지만 경찰의 관심사는 소유주가 누구냐를 따지고 있었다.

소유주가 있어야 도난신고 접수가 된다고 하여 더 이상 머물러 봐야 시간만 지체할

것 같아 다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논주인 할아버지도 자기는 미륵상의 소유주가

아니라고 하는 바람에 나도 힘이 빠져 버렸다.

남의 동네에 가서 할아버지를 보고 할아버지가 소유주가 맞으니 도난신고 접수하

면 되지 않느냐고 하기에는 병곡면사무소 직원들과 파출소 경찰들이 있기에 할 말

이 안 될 것 같았다.

 

♣ 용머리미륵의 전설

 

年代未詳朝鮮時代 이곳에 비장벼슬을 지낸 이라는 을 가진 사람이 이 近海

漁業權을 모두 掌握하고 살았는데 어느 날 비장의 꿈속에 彌勒佛이 나타나 내가

뒷바다 오리바위 밑 말(海岸)에 걸려 온 몸에 말(바다풀: 말기)에 감겨있으니 나를

구하여 空氣 맑고 경치 좋은 곳에 安置해 달라고 사라졌다. 다음날 비장이 그곳

에 찾아가 말을 헤쳐 보았더니 果然 彌勒佛像이 말에 걸려 있음으로 그를 구하여

용바위에서 50m 북쪽 넓직한 바위에 뫼시고 祭祀를 올렸더니 그때부터 비장

富貴榮華를 누리게 되었는데 얼마 후 그 미륵불이 없어져 버렸다.

그로부터 한비장의 家勢는 몰락하였다고 전해지는바 그 미륵불을 지나가던

商船船員이 훔쳐 얼마가지 못하고 商船沈沒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그 彌勒佛을 모시었던 바위를 주민들이 섬기고 부정을 경계하여 농어제

행사가 있을 때는 먼저 이 바위에 고한 다음 행사를 시작한다고 한다.’

 

향이 꽂혀있다.

 

아주 가까운 시일(불과 2~3) 내에 미륵석상을 도난당한 할아버지를 위해 참고인

이 되어주고 그 할아버지와 함께 용바우를 찾았다. 해안가 용머리공원에 위치한

당 용바위는 즉 룡의 머리인 셈이다. 구도로 위편에 위치한 현재의 도로인 신설

국도 공사 때 사람이 죽어 나가고, 공기계가 자꾸 고장 나는 바람에 제사를 일곱 번

이나 지냈다는 이 연유는 즉 룡의 허리를 절단하여 생긴 부정으로 보아야 하지 않

을까 싶다.

지금도 이곳 용머리공원에는 고기잡이 나가는 어부들이 올린 막걸리와 향이 올려

져 있어 풍어와 무사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병곡리와 용머리 유래

이 마을은 어느 시대인지 알 수 없으나 안씨(安氏), 김씨(金氏) 성을 가진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하며 마을 뒤 야산(포성터)에서 내려다보니 지형이

자루와 같이 생겼다 하여 자루실 또는 자래실이라고 지금도 불리고 있다.

병곡이라는 마을의 이름은 16세기 중기(1550년경)인 명종(明宗) 연간에

당시 영해부사 장응두가 명명했다 하였으며 대한제국 때 영해군 북삼면

지역이었는데, 191431일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덕군 병곡면

병곡리가 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는 유명한 지역에 큰 인물이 나지

못하도록 전국에 쇠말뚝을 박을 때 자루실에는 마을 바다 쪽에 용머리처럼

생긴 영험한 바위 위에 팔각정을 지어 마을 쉼터처럼 위장하였으나

주민들이 이를 알고 1961516일 군사정변 이후 일제의 총독부 비석과

함께 철거, 지금의 해안도로에 매립하였다. 그 이후 용머리의 영험함을

기원하며 5년 마다 열리는 마을 풍어제도 용머리에서부터 시작되며 지금도

전국 유명 무속인이나 관광객들이 기도를 하어 이곳을 많이 찾고 있다.

                                                           새천년을 기리며, 병곡2리 주민일동

 

해불신위

 

[영덕군향토사]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지금부터 200石佛像波濤에 밀려

들어왔다. 마을사람들은 稀貴한 일이라 하여 다시 바다에 버렸더니 한 20일 뒤에

波濤에 다시 밀려오기를 거듭하므로 반드시 마을에 慶事이며 吉兆라 하여 남쪽

入口安坐하여 해마다 漁民들의 뱃길에 안사를 위하여 致誠하였다.

歲月이 흐르는 사이 佛像이 온 데 간 데 없어졌으나 그 자리에 제사만 올리다가

1973년 다시 佛像造成하여 位牌를 뫼시고 1년에 세 차례 祭祀를 올리고 있다.’

고 되어 있다

 

 

불상의 명호를 비로 하여 위패로 모신다는 특이한 곳을 찾아 대진2리로 향하였다.

도로 길섶에 형상불은 없고 명호를 한자로 <海佛神位>라 새긴 비석을 만날 수 있

었다. 굳이 해불을 불교와 연관시키면 해수관음을 들 수 있겠지만 석불상이 파도에

떠밀려 왔다는 것도 금방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어쨌든 영해의 한갓 외진 바닷가 마을에서 불상도 아닌 비석에다 명호를 새기어

해불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는 재미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진2리 동제당

입구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이다 앞 집 골목아닌 좁은 곳으로 문을 열고 들어

갈 수 있었다.

 

 

권씨골맥이할배 권동수는 입향조이다.

마을의 주신으로서 위패에는  ‘’이라고 써 있다.

 

천장군 신위

시멘트 위패

 

천장군은 마을에 호환이 많이 발생하여 모시게 되었다.

옛날 천씨가 이 마을에 살 때 그 조상 중 장군벼슬을 한 사람을 모신 것으로

같은 마을 내에 두 군데에서 따로 모시고 있다.

바다 가까운 한 곳에서는 신위를 모시고 괴시리에서 넘어오는  고개에는

장군상을 조성하여 모시고 있다.

 

 

 천장군상

 원래 천장군상은 하늘 색 투구를 쓰고 노란 갑옷을 입고, 칼을 아래로 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상은 보이지 않고 새로 조성한 장군상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진리 동제는 정월 보름과 6월 보름, 그리고 10월 중에 택일해서 모두 세 번 지내

는데, 제 지내기 이틀 전에 제관을 정한 후, 이 때부터 제사 때까지는 신성기간으로

모든 일에 부정 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경건하게 지내야 한다고 한다.

 

제관은 본당에 4, 천장군에 3, 해불신에 2명인데, 14일 밤 11시경에 동사무소를

출발해서 본당천장군해불신 순으로 제를 지낸다. 15일 아침에는 전 주민이

음복을 하고 농악놀이와 지신밟기 등을 한다. 그러나 이 농악놀이와 지신밟기는

1967년경부터 시행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