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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이야기 속으로 - 첫 번째

참땅 2016. 4. 20. 16:08

영덕 이야기 속으로 - 첫 번째

 

요신(妖神) 팔령(八鈴)

팔령신소재백귀퇴치(八鈴神所在百鬼退治)

우탁선생과 팔령신

 

인량동 팔풍정은 지금 수리 중

 

팔풍정(八風亭) 유래를 물었더니, 우탁 선생이 팔령신 물리친 이야기를 했다.

팔풍정은 인량동에 있는 정자이다.

 

팔풍정, 그것은 모릅니까? 고려말 우탁 선생님이 그 고장에 와가지고,

[청중 권해진 : 팔령신인데.] 팔령신인데, 우탁 선생이 영해부사로 왔읍니다.

그 팔령신의 폐가 어떤 게 있었는가 하면, 거기서 무슨 방울 소리가 나면 그 부근에

다른 동네는 병이 난다든가, 흉년이 들고. 그런 일이 있어서 그래서 늘 거기다가

관가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우탁 선생이 와셔서, 그런 이야기

전해 듣고. 그 당나무, 팔령신, 아주 고목이 있습니다. 거기 올라가서 까치집을

여덟 개를 뜯어 내려왔는데, 그 안에 그 흙이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그걸 이제 우탁 선생이 호로병에다 집어넣어서 동해 바다에다 빠뜨렸어요.

그런데 그 중에 한 개가 바다에서 올라갔다 내리갔다 이러니까, 그래서 이상해서

물어봤는데,

"우리가 몇 천 년 동안 이 인간의 손에 밥을 얻어먹다가, 그 선생이 와서 일제히

우리가 이제 바다아 빠져 죽게 됐다. 우리가 왔던 자취를 한 번 남길 도리 밖에

없다."

 

팔풍정 앞 펜스울타리 너머 도화가 허드러지게 피고 있는 중

 

그래 관어대 들가는 입구, 괴시(槐市) 2동입니다. 입구에다가 서낭당신이 당을

하나 지었어요. 지어가지고, 그래서 해가 없어졌다 그럽니다.

[조사자 : 팔풍정에 아직 고목이 있는가요?]

고목이, 고목이 넘어져있지요.

[조사자 : 거기 까치집이 여덟 개 있었단 말이지요?]

, 옛날에 있었어요. 그래서 팔풍정이라고. ()이 있어요.

 

그 고목나무는 뉘어져 지금 쉬고 있는 중

 

영덕군군지

현대에 만들어진 영덕군군지라는 홈페이지에 팔령신이 나오는 전설이 몇 가지

기록되어 있다.

 

팔령신(八鈴神)과 역동(易東) 선생

창수면 인량리 앞 속칭 팔풍정(八風亭)에 두 그루의 큰 느티나무(槐木)가 있었다.

옛날 고려(高麗)시대에 팔령신(八鈴神)이라는 방울소리를 내는 여덟 요귀(八妖鬼)

가 이 큰 나무 위에 있었는데, 형체(形體)는 보이지 않고 방울소리만 났다.

지붕 위에 방울소리가 나기만 하면 그 집은 폭패를 당했다고 하는데 당시 오서면

(烏西面:, 미곡, 오촌쪽)과 서면(西面, 碧水 현 신리쪽) 쪽에 피해가 많았다고

한다. 이때 영해 부사(府使)나 사록(司錄)이 부임하면 미리 1주일 전부터 이 팔풍정

앞에서 큰 소 몇 마리를 눕히고 술을 빚고 음식을 준비한 다음 여러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데, 부사나 사록이 정성껏 치성을 드려야 재직(在職)하는 동안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야속하니 하 시절이 그립구나...

뉘인 채로 새로 가지기 뻗어 하늘로 솟는 중

 

지금부터 약 8백 여 년 전 문희공(文僖公)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이 영해 사록

(司錄)으로 부임하자 영해부의 벼슬아치들이 앞서처럼 굿을 시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사록(禹司錄)은 이때 치성 드림을 거절하고 사자(使者)를 시켜 두서너

줄의 문자를 써 보내어 팔령신들을 제압한 후, 그 중 한 신()은 영양에서 울티재

(泣嶺)로 넘어 오는 잡귀를 막게 하고 한 신은 인량리 팔풍정을 수호케 하고, 한 신

은 동해에서 들어오는 잡귀를 막게 하기 위하여 관어대 입구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다섯 요귀는 바다에 던져 없애 버렸다. 이 후로는 팔령신의 행패로부터 벗어나

모두 무사히 생업에 종사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1명의 요귀만 살려주어 동해로 들어오는 잡귀를 관어대 입구에서 막으라

는 명령을 내린 다음 나머지 일곱 요귀를 모두 수장(水葬)했다고 한다.

 

현재 팔풍정에는 느티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은 언제부터인

가 이 나무를 동신목(洞神木)으로 받들고 있다.

 

팔령신 모신 노쇠한 영신각, 소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관어대 눈먼 할머니

관어대(영해면 괴시2) 입구에 이름을 춘진(春眞)이라고 하는 한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일찌기 한양(漢陽) 사람 사남(士男)에게 시집을 갔으나 얼마 못가 사별

(死別)하고 홀로 외롭게 살았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 이웃의 삯바느질이나 품팔

이를 하며 끼니를 이어 갔다.

어느 해 봄날 춘진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웃집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눈이 어두워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 뒤 춘진은 이웃의 동정도 받고 구걸

도 해 가며 살아간 지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해 갑자기 이()가 빠지는 등 기구

한 나날을 보내고 살아가던 중 어느 날 밤 꿈에 낭군인 사남이가 나타났다.

고생이 얼마나 많았소?

하고 사남이가 말하였다.

나를 데려가 주시오

하고 춘진이 말하자 사남이는

나를 따라 오시오

하고 미곡(美谷)쪽을 향하여 훨훨 걸어가고 있었다.

 

판벽 흙벽은 무너지고 있는 중

 

춘진이 허겁지겁 사남의 뒤를 따라 가는데 남편인 사남이는 냇물을 건넜으나

춘진이 앞이 안 보여 물을 건너지 못한다고 소리쳤다. 이때 사남이가 뒤돌아보면서

앞을 못 보니 저렇게 따라오지 못 하는구나

하면서 가시 침으로 눈을 찔러 버렸다.

붉은 피가 낭자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한다.

이 노파가 8령신 중 하나라고도 전해지며 그 자리에 고사집이 있었고 옆에 탱자나

무가 있었으며 수 십 년 전만 해도 이곳에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무색한 건양다경 입춘대길

 

벼락딤

역동(易東) 선생(=우탁)이 팔령신(八鈴神)을 잡으러 팔풍정에 가니 팔령신이 미리

알고 도망치고 없었다.

다시 신리(新里)로 가던 도중 팔령신이 돌로 화하여 벼락딤 바위에 붙어 있었다.

세어보니 하나는 벌써 알고 없어지고 일곱 개만 있었다. 사령을 시켜 따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날 밤 동헌(東軒)에 한 할머니가 찾아와서 내가 팔령신

중 하나라고 하면서 빌고 용서를 구하므로 역동선생이 용서해 주고 관어대 입구에

당집을 지어 주었다.

 

뒤로 보이는 산이 상대산이고 그 정상이 관어대입니다.

 

일설에는 역동선생이 여덟 개의 돌로 화한 팔령신을 벼락딤 바위에서 모두 잡아

상자에 넣어 군졸을 시켜 바다에 넣게 하였는데 군졸이 호기심에 바닷가에서 상자

를 열어 보다가 한 개를 놓쳐 버리고 일곱 개만 바다에 던졌으며 이튿날 밤 꿈에

역동선생에게 한 귀신이 나타나 용서해 달라고 빌므로 관어대에 당집을 지어주고

바닷바람을 막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관어대 입구 괴시2리 당산목은 100여년된 팽나무와 노송이 연리목이 되어

일명 명품나무가 되었습니다.

 

흡사 우주괴물 같습니다.

 

위장사

[조선왕조실록]의 태종7(1407) 12월조에 천태종인 영해의 우장사를 그 고을의

복을 빌던 절간으로 쓰게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천태종이 유행한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기 아인데...

 

[세종실록지리지]의 영해도호부조에 의하면 위장사는 부의 서쪽 산에 있다.

우물이 있는데, 장마가 지거나 가물어도 물이 늘거나 줄지 않는다.

사악한 마음을 가진 자가 물에 비치면 맑던 물이 흙탕물로 변하면서 말라버린다

(葦長寺在府西山有井水早無增減不潔之人照影則淸水變爲泥色渴盡)’라 하였고,

또한 [신증돋국여지승람]의 영해도호부 <산천조>용두산은 부의 서쪽 20리에

있었는데, 그 정상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 세상에서 말하길 처음에는 산 정상에

한 줄기 갈대가 있어 하늘에 닿고 있었는데, 그 땅에 우물을 파니 물이 아주 맑고

시원하였다고 하며, 사악한 이가 그 우물에 비치면 물색이 변하여 흙색이 되었다.

(俗傳初山頂有一葦長至天乃井其地水甚淸澈邪人照之則變爲泥色)’라고 하였다.

폐찰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530년대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불우조>위장사는 용두산 우물가에 있다(葦長寺在龍頭山井水之傍)’는 기록과

1828년경에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단양부지]에 위장사가 현존하는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다만 1899년에 발간된 [경상북도 영해군읍지]에 위장사란 이름이 보이

지 않으며, 그 이후에 나온 [영영승람]이나 [교남지]에는 모두 폐찰된 것으로 보아

최소한 위장사의 폐찰연대는 1828년과 1899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태조 4(1395)에 조선되어 위장사에 봉안되어 있던 보물 제993호인 건칠불좌

상은 현재 장육사에 봉안되어 있어 조선시대 전기의 건칠불좌불상과 불상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이상 [영덕군향토사]에 기록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암만 보고 또 바도 시멘트

 

영덕 창수초등학교에 위장사 석탑이 있다는 글을 보고 창수초등학교

세종대왕상 옆의 석탑을 찾았으나 이는 석탑이 아니라 시멘트로 만든

탑 모형이었다. 불적조사를 시행한 사람들의 오판이었다.

처음 사진을 접했을 때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설마 했었는데

역시나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