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지역/경상도

영덕 이야기 속으로 - 세 번째

참땅 2016. 4. 21. 13:30

 

영덕 이야기 속으로 - 세 번째

 

도천리숲

400년 역사 천연기념물 제514-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남한 유일 삼굿구덩이도 발견

 

 

뱀의 머리를 한 산이 마을을 노려보고 있다. 큰 홍수가 난 어느 해, 마을의 동주신은

윗동네의 숲을 물살에 실어 마을 앞에 옮겨 놓았다. 마을로 향한 뱀의 눈초리를

막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숲의 한가운데에 동주신을 위한 당집을 짓고 오래오래

숲을 아끼고 가꾸었다. 행복은 낙관이나 안정의 영역에 있지 않다. 행복은 사랑과

관계있다. 사랑받고 있다는 표정, 마을과 숲은 그런 표정으로 앉아 있다.

영덕군 남정면 도천리 도천숲이다

 

 

도천리 마을의 울타리 도천숲

저 멀리서부터 숲은 제 존재를 드러낸다. 낮은 초록의 들을 앞에 펼쳐 놓고,

제 뒤로 마을을 숨기고, 숲은 넓고 높게 서 있다. ‘내가 이 마을의 숲이다라는

선언이 강력하다. 숲 앞으로 천이 흐른다. 도천천이다. 전설의 시대에 숲은

이 천을 타고 여기에 왔을 것이다. 구름다리가 도천천을 가로질러 숲으로 향한다.

 

도천이라는 이름은 삼국시대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역로(驛路)를 따라 내가

흐르는 마을이라 하여 길내혹은 질내로 부르던 것이 한자로 도천(道川)이 되었

. 1450년경 김씨가 마을을 개척했고, 임진왜란 때 피란 온 이수춘이란 사람이

정착하면서 번성했다고 전한다. 숲은 400여 년 전 마을이 생길 때 자연적으로 형성

된 것으로 여겨진다.

 

 

숲은 앞산의 뱀머리(사두혈) 형상을 막는 것 외에도 도천천의 범람으로부터 마을과

농토를 보호하기 위해 또는 동네 밖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아야 마을이 평안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꾸어져 왔다고 한다. 숲에는 300년 이상 된 느티나무와 팽나무,

회화나무, 시무나무, 말채나무, 풍게나무 등 수백본이 자생한다. 한때는 숲의 규모

가 산에서부터 하천을 따라 남쪽으로 길게 이어져 아주 컸다는데, 그 울타리 덕에

도천리는 영덕 제일의 부자마을이었다 한다. 지금은 화재와 경작 등으로 많이 줄어

든 상태다. 한때는 재배하는 작물의 일조량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일부 나무를

베어낸 적도 있었다 한다.

 

밝고 청량한 활엽의 그늘 아래에 산책로가 놓여 있다. 숲의 가장자리에는 벤치와

정자가 있고, 펜션 몇 채도 갖춰져 있다. 숲 안내판에 구수리 전통 숲이라는 글귀

가 있다. 구수리는 볼거리, 놀거리, 살거리 많다는 ‘good three’를 한글화한 마을

랜드 이름. 만들어진 과정이 좀 당황스럽지만 구수리, 구수리, 자꾸 부르니 구수

하다

 

 

숲 속의 당집과 삼굿 구덩이

도천숲 한가운데에는 당집이 있다. 마을 동신을 모시는 동신당이다. 도천리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대보름마다 안녕과 풍년을 비는 동제를 지낸다.

동제를 지내기 전 음력 정월에 제관과 도가를 정하고, 대보름 3일 전에는 제당

주변을 청소하고 금줄을 치며, 황토를 뿌려 잡귀의 근접을 막는다.

마을 사람들은 한동안 마을을 떠날 때도 이 당집에 인사를 올리고 떠나고,

나뭇가지 하나도 가져가지 않는다고 한다.

 

숲 속 도천천과 가까운 곳에는 돌무지 형 삼굿이 있다. 삼굿은 삼베의 원료인

대마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땅속에 구덩이를 파고 삶던 장소다.

도천숲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삼굿은 남한에서 유일한 것이라 한다.

 

강구 척화비

백장수 고래 턱뼈, 잡은 곳은 후포 앞 바다.

1975년 08월 15일 기증했답니다.

 

학교 화단에 척화비도 있습니다.

 

덕흥사

덕흥사 대웅전

 

"저는 대담에서도 더러 이야기를 하고, 여러 번 밝혀진 이야기이고 책에도 더러

나온 이야기인데요. 영덕 남산동에 가면 불국사 말사 덕흥사라고 하는 절이 있습니

. 제가 어려서 그 이웃 동네에 살았거든요. 그래 어린 나이에 가끔 절에 놀러간다

고요. 초등학교 다니면서도 거기가고 그러면 절에 가면 맛있는 것도 주고, 또 절에

는 과일나무가 많아요. 주지스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과일 따먹기도 하고 등등,

놀러가는 장소이기도하고 그런데요. 우리또래 스님이 있었어요. 알고 보니까 지관

스님 이복동생입니다. 돌아가셨으니까 이제 상관없지요. 그 스님 지금도 영덕에

살아요. 그 스님 우리하고 비슷한 또래입니다. 그런데 문자를 그냥 착착착착 쓰는

겁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긴데,

초발심자경문에 三日修心千載寶(삼일수심천재보)요.

百年貪物日朝塵(백년탐물일조진)이라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무비스님의 화엄경산림 대법회) 중에서 

 

대웅전 내 지장보살후불도와 지장보살

 

두건을 쓴 지장보살

  

삼성각 내 보살좌상

 

근엄하고 차분한 표정, 어깨가 좁아 약간 웅크린듯...

 

보관이 예쁩니다. 미륵으로 보고 싶습니다.

 

스므나골재사

 

1780년경에 건립한 남준형(南峻衡)의 묘 아래에 있는 재사이며,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스므나골 안쪽의 작은 내가 합류하는 곳에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재사는 정면 4, 측면 2칸 규모의 일자형 겹집이며 마루가 발달한 팔작기와집이

. 평면구성은 측면이 두 줄로 된 겹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면 앞줄의 가운데

2칸을 마루로 깔고 판자벽과 판자문으로 벽체를 구성하였다. 정면 좌측 칸과 마루

방 뒤의 온돌방에는 제사를 주관하는 유사(有司)들의 방이 있고 정면의 우측에는

외양간을 둔 부엌을 설치하였다.

부엌 상부 지붕의 합각부분에는 까치구멍을 내었다. 앞줄 마루의 앞면에는 판장벽

(板牆壁, 널빤지로 만든 벽)이 있으며 상부 가구는 5량가로 납도리를 사용하였고,

종량 위에 동자대공을 세웠다. 이러한 겹집형태의 모습과 부엌에 외양간을 둔 것은

추운 산간지역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영해지역에서는 흔하지 않은 모습을 가진

재사 건물이다.

 

♣ 침수정

바래기기와와 까치구멍 같은 환기구도 보입니다.

 

침수정은 영양남씨 집성촌인 괴시마을의 스므나골 안쪽 작은 내가 합류하는 곳에

임하여 암반 위에 남향하고 있다. 침수정의 10m 뒤편에는 같은 문중재사인

스므나골재사가 위치하여 재실과 정자가 모여 조선시대 유교 문화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는 정자 앞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옛 정취가 많이 사라졌다

 

침수정의 '침수'는 본래는 '돌을 베개 삼고 물로 양치질을 하련다'라는 뜻의

'침석수류(枕石漱流)'인데 진나라의 손초라는 사람이 친구 왕계에게

'침류수석(枕流漱石)'이라고 잘못 말을 하면서 비롯됐다.

왕제가 말이 잘못됐다고 지적하자 자존심 강한 손초는 "물을 베는 것은

귀를 씻으려 함이요, 돌로 양치질 하는 것은 치아를 갈아서 닦기 위함이다"

라고 둘러댔다.

그래서 '침류수석(枕流漱石)'은 잘못을 엉뚱한 논리로 정당화하려는 궤변을

빗대는 말로도 쓰인다고 한다- (경북일보 영덕 침수정)에서

 

침수정은 현 점유자(남영국)5대조인 영은(瀛隱) 남공수(南公壽)1857(철종

8)에 학문을 연구하며 공부를 가르치는 곳으로 건축하였으며, 영은공은 여기에

거처를 삼아 학문에 정진하였다 한다. 그 후 단기 4289년 윤3의 중수 상량문으

로 보아 1956년에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이름인 침수정(枕漱亭)’침류수석(枕流漱石)’에서 유래하였으며,

침수정 18()과 동천(洞天) 20() 침수정제영(枕漱亭題詠)이 있다.

침수정은 측면과 배면에 담장을 두르고 한 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4, 측면 1칸 반의 자형 팔작기와지붕이다.

평면의 구성은 가운데 2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좌, 우에 온돌방을 두고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경상도 지역에 흔히 볼 수 있는 평면형태이다.

건물의 앞에만 둥근 기둥을 쓰고 나머지는 모두 네모기둥을 사용하였.

 

이십동천

 

천주교인인 남종삼(南鐘三, 1817~1866)은 영해현감으로 재임 시 남공수와 침수정

에서 자주 만났으며 그 후 상경하여 서신왕래가 잦았다. 그 후 천주교 박해 때 교분

이 있었다 하여 남공수가 금릉으로 귀양살이할 때 금릉일록(金陵日錄)을 저술

하였다 한다.

이 건물을 처음 건축한 남공수(南公壽, 1793~1875), 본관은 영양이며, 호는 영은

(瀛隱)이고 자는 치도(穉道)이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로 계훈촬요(溪訓撮要),

이학통론(理學通論), 금릉일록, 한묵초결(翰墨抄訣)등 저서가 있다.

남공수는 만대헌(晩對軒) 경원(景元)의 차남이며, 괴정(槐亭) 준형(峻衡)의 증손이

, 괴시리의 영은고택을 건축한 인물이다.

 

입천정

흥선 대원군의 글씨라는데... 스물입자를 써 스므내골 재사, 침수정의 이십동천과

연관성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조선 숙종 때 예조좌랑(禮曹佐郞) 및 영산현령(靈山縣令)을 지낸 회수(

) 남붕익(南鵬翼:16411687)1680년경에 23칸 규모로 지은 정자이다.

이후 건물이 낡고 쓰러져 빈터만 남은 것을 1887년 남붕익의 5대손 남흥수(南興壽)

가 문중의 힘을 모아 복원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현재의 규모로 복원하였다고 한

. 현재의 건물에는 1902(광무 6)에 중건하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상량문이 있다.

 

마계정사 현판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건물은 입천정·마계정사(磨溪精舍고직사(庫直舍)3동으

, 대지를 3단으로 조성하여 가장 안쪽에 입천정, 그 아래에 마계정사, 제일 아래

에 고직사를 배치하였다.

 

 

마을 우측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오른 산허리에 3()으로 구성된 대지가 있는데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입천정(卄川亭)은 방형의 토담을 두르고 별도의 공간을

이루고 자리 잡고 있고 하단의 좌측에는 마계정사(磨溪精舍)가 동향(東向)으로

자리 잡고 있고 마계정사의 하단에는 고직사(庫直舍)를 두었다.

 

 

별도의 네모난 토담을 두른 입천정은 정면 4,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

, 앞쪽에 툇간을 두고 정면 2, 측면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2칸 규모의

방을 하나씩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 5량가(五樑架) 구조이다. 큰 대들보에 약

간 휜 자연목을 사용하였고 들보 위의 대공(臺工)은 원형 판대공이다.

마루 앞쪽에는 4분합들문을 달았고 툇간에는 계자(鷄子) 난간을 둘렀다

 

17세기 말에 남붕익(南鵬翼)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건물은 건축 후 수차 중수를 한

바 있다. 1919년경에는 전체적인 부재를 교체하고 기와를 새로 얹었으며,

1984년에도 일부 노후 부재를 교체하는 등 부분적인 수리를 하였다. 때문에 평면구

성이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는 있으나 전체적인 공간구성이나 평면구성에서 조선

후기 주택의 소박한 품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4분합들문을 달았고 툇간에는 계자(鷄子) 난간을 둘렀다.

 

입천정 앞에 동향으로 들어선 마계정사는 정면 3.5, 측면 1.5칸의 홑처마 팔작지

붕 건물로, 앞쪽에 툇간을 두고 1.5칸 규모의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1.5칸 규모의

방이 각각 하나씩 있는 중당협실형 구조이다. 대청은 4분합들문을 단 마루방으로

꾸며져 있다. 관리인이 사는 살림집인 고직사는 정면 4,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

지붕 건물이다. 소유자는 영양남씨 괴시파 종중이며, 남영걸이 관리하고 있다.

 

괴시리(槐市里) 장승

 

이 마을에 역질이 덮쳐 폐동이 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즈음 이 마을 한 노인의

꿈에 선조가 나타나서 <축귀장군남정중(逐鬼將軍南正重)> 이라 써서 동구(洞口)

앞에 세우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 말에 따라 장승을 세웠더니 역질(疫疾)이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逐鬼將軍南正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