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오어사 시주비
祇林寺 住持 기림사 주지
金景雲 김경운
通度寺 住持 통도사 주지
金九河 ♣김구하
住持 朴鰲岩 주지 박오암
化主 李㧶(갱)洙 화주 이갱수
大正九年庚申七月四日 1920년 경신년 칠월 사일
石手黃在五 새긴이 황재오
自百兩以上石刻 스스로 백 냥 이상 시주한 사람을 새기다
徐廷錫 朴振喜 서정석 박진희
子龍洛 李熙喆 서정석의 아들 용락 이희철
龍浩 金元龍 서정석의 아들 용호 김원룡
浩鋿 河受圖 서정석의 아들 호상 하수도
河迷坤 吳興守 하미곤 오흥수
朴太伍 文元度 박태오 문원도
李圭煥 이규환
崔翊洙 최익수
宋元鎬 송원호
金光彦 김광언
金汶榮 김문영
李相昊 이상호
金龍河 김룡하
李南北 이남북
현재 오어사 가학루터(현재 기념품 가게 앞)에 1조 2기의 비가 있는데 좌우가
바뀌어 있음을 비의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구하 스님
구하 스님은 개화기와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불교계의 중심 축을 담당하며
한국불교의 근대화를 위한 산파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일제시대 명진학교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힘썼는가하면 40세의 나이에 통도사 주지로 취임한 후 14년에
걸쳐 연임하며 개혁을 이끌었으며 30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에 피선돼 당시 불교계를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한국불교를 대표했기에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1875년 울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13세 되던 해 천성산 내원사로 입산해 1889년
경월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이후 범어사에서 강백 의룡 스님으로부터
외전(外典)을 3년간 배웠고, 해담, 혜옹 스님에게서 내전(內典)을 두루 배웠다.
1900년 통도사에서 한국불교의 법맥을 이어오던 성해 스님으로부터 전법제자가 되면서
구하(九河)라는 법호를 수지 했다.
자신의 수행과 교학에 힘쓰던 스님은 이후 나이 35세가 되던 1906년 일본 불교계를
시찰하는 대표단에 포함돼 일본의 문물과 풍경을 관광하며 일본 불교를 접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스님은 전근대적이고 부패한 조선 불교를 개혁해야겠다는 발원을 세우게
됐고, 귀국 후 용성 스님을 비롯한 5∼6명의 중진 스님들과 연합해 조선불교의 개혁에
착수했다. 스님이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후학을 양성하는 것.
이를 위해 스님은 고산 스님을 비롯해 몇몇 스님의 도움으로 명진학교를 설립,
교감·교장 소임을 맡기도 했다.
이후 1911년 통도사 주지로 취임한 스님은 통도사가 전통사찰로서의 사격을 갖출수
있도록 건물들을 중창하고 옛 유물들을 수집해 보존하는데 앞장섰다.
또 스님은 출가자의 계율을 엄격히 강조하면서 당시 스님들이 경제적 안정을 위해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를 일체 금지시키기도 했다. 이 밖에도 마산, 울산, 진주, 양산,
창원, 창녕 등지에 통도사 포교당을 건립해 전법에 힘썼으며 매월 두 차례 법회를 열어
교리를 강설했고, 다수의 승려들을 일본에 유학시켜 인재를 양성하는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은 1917년 이회광, 강대련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면서 이곳에서 일본을
칭송하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1920년대 중후반 「조선불교총보」등에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해 불자들의 친일을 선동하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구하 스님은 오늘날까지
불교계 친일인사 명단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스님이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는 기록이 발견되는 등 스님의
친일이 위장이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스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다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해방 후 중앙총무원장에 피선되기도 했던 구하 스님은 1965년 10월 3일 통도사
보광별당에서 세수 93세, 법납 76세로 입적했다.
1. 猿鶴歌
통도천년사通度千年寺 통도사는 천년 역사에 빛나고
무풍만세교舞風萬歲橋 무풍교는 만세에 전하리라
등산임수객登山臨水客 산에 오르거나 물가를 찾은 손님들
원학반소요猿鶴伴逍遙 자연과 더불어 한가롭게 노니는 구나
이 詩는 1922년에 새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구하스님은 1911년부터 1925년까지 통도사 주지로 있었는데 1922년에 무풍교
양쪽에 석축을 쌓고 돌다리를 놓았습니다. 이때 무오갑戊午甲, 갑자갑甲子甲,
경오갑庚午甲, 종계중宗契中, 당청중當廳中, 본사중本寺中 등 동갑계를 중심으로 한
신도들과 寺內 다른 계중, 스님, 사찰 등이 힘을 모아 당시 화폐로 일금 1,050원을
모았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다리 바로 옆 바위 한 면에 시주 내용을 적고 그 옆에
이 시를 함께 새겼다고 합니다.
절로 가기 위해 건너야 했던 유일한 다리인 무풍교를 돌다리로 고쳐 놓으면서 이
불사에 도움을 준 시주자들의 공덕을 새긴 비문에 덧붙인 시가 사찰을 찾아오는
신도들을 떠올리기 보다는 통도사 앞 청류동천에 몰려드는 풍류객들을 연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詩에 등장하는 원학(猿鶴)은 원숭이와 학을 가리키지만 그 의미는 자연을 상징
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발품을 팔아 찾아오는 신도들이 시냇물을 건너며 겪던 불편
이 없어졌다고 기뻐해야 할 자리에 신도가 아닌 산과 물을 찾는 풍류객들이 자연을
벗하며 여유롭게 노닌다고 읊었으니 통도사 청류동천이 그만큼 풍류객들로 넘쳐났고, 다리를 고쳐 놓은 것도 신도보다는 오히려 풍류객을 위한 것이었는가 싶어지기도
할 정도입니다.
2. 舞風落花(무풍낙화)
波水千年通度寺파수천년통도사 통도사 천년역사는 흐르는 물과 함께 하고
落花三月舞風橋낙화삼월무풍교 무풍교에 삼월이 오면 낙화가 아름답다.
통도사 입구 무풍1교 아래에 있는 관음바위에 일곱무더기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모두가 사람들의 이름이지만 유독 물가 가까이에 있는 하나는 칠언절구로 된 시가
새져 있다. 이 또한 구하스님이 선필로 써내려간 글씨이다.
이 글귀도 아마 구하스님이 절로 들어가는 무풍교를 새로 고쳐 놓을 때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
통도사 주변은 많은 물줄기들이 흐르고 있지만 옛날 절로 들어가는 길은 지산리에서
흘러오는 좁은 물줄기만 건너면 그 뒤로 더는 물을 건너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합니다. 그 자리에 놓은 다리가 무풍교이니 그만큼 무풍교는 통도사로 들어가는 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무풍교 주변은 세찬 바람과 그 바람을 맞으며 춤추는 소나무 즉 한송(寒松)과 함께
봄이면 흩날리는 송화松花가 길과 시내를 온통 금빛으로 물들이며 아름답기 그지없었답
니다. 바위에 새겨진 시에 나오는 낙화 역시 아름다운 색깔로 된 여늬 꽃잎이 아니라
노랗게 흩날리는 소나무꽃가루를 말함에랴.
무풍교 아래에 넓적한 바위를 관음바위라 명명한답니다. 그 까닭은 조선 인조 19년(164
1년) 당시 주지이던 우운대사(友雲大師)가 지금 통도사에 있는 대웅전을 중건하기 위해
스스로 화주를 자청하고 시주를 받기 위해 절을 나서다가 이 바위에서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였기 때문이다.
통도사는 임진왜란으로 대웅전이 소실되었으나 40여년이 지나도록 폐허로 남아 있었는
데 그 무렵 주지로 부임해 온 우운대사가 중창에 나선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선조 31년(1598년)에 끝났으나 전 후 43년 만에 큰 건물의 중건에 나선 것이니 당시로서는 크고 힘든 불사였습니다.
이때 우운대사가 시주를 모으기 위해 절을 나서 관음바위를 지나자 빨래를 하고 있던
노파가 보따리 하나를 건네주며 불사가 잘 될 것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 노파가 바로
관새음보살의 화현이었다고 합니다.
그 덕택인지 대사는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에서 통제사의 시주를 얻어내는 등 여러 관
아와 사부대중의 시주를 모아 지금까지 어디에 내어 놓아도 빠지지 않는 훌륭한 법당을
이룩한 것이다. 구하스님은 절로 들어가는 입구의 낡은 다리를 돌다리로 고쳐 지으면서
우운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던 곳에 자신의 소회를 적어두고 싶었을 것으로
보아집니다.
통도사에 남아있는 구하스님의 명필 현판을 소개합니다.
통도사 대웅전 금강계단 사리탑 앞쪽의 <적멸보궁>현판입니다.
통도사 창건주 자장율사를 모신 <개산조당>현판입니다.
통도사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절집인 자장암, 금개구리의 실화로 유명한 통도사 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자장동천에 있는 자장암 <자장전> 현판입니다.
구하스님의 생전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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