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비지정문화재

포항 청하 유계리의 각자를 찾아

참땅 2014. 11. 24. 11:22

청하 유계리의 각자를 찾아 길을 나서다.

 

청하 유계리 법성사 가는 들목 황배이골에 위치한 신계 이동신의 각자를 찾아

청하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가을 끄트머리에서 거의 보름 만에 답사입니다.

지난 해 愼溪신계 각자를 찾고 이후 올해 여름에 이어 이번이 3번째 인데

오늘은 기어코 李東信이동신 각자를 찾을 각오입니다.

 

 

조홍감이 유명했다고 하는 유계리 마을에는 햇볕에 반짝이는 주렁주렁 붉은 감이

탐스럽게도 보이지만 조홍감은 아닐 듯 합니다. 과일 풍년 올해는 감이 지천이라

그렇게 귀히 여기지도 않는지 곳곳 마을 마다 수확하지 않은 감이 천지빼까리

입니다. 흔한 시골사람 인심이 의례히 그렇듯 천지빼까리인 감이 떨어져 못 먹을지

라도 남이 따가는 것은 결코 용서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기냥 놔둡니다.

 

구석구석 등산로마다 산불감시원이 철통같이 감시하는 통에 담배도 무척 조심스럽

습니다. 황배이골 입구에도 어김없이 산불감시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광산굴까지만 간다고 양해를 구하고 계곡 입구를 들어섰습니다.

 

 

먼저 愼溪 각자를 확인합니다.

지난번 답사 때는 여름철이라 그랑물 건너기가 수월치 않았지만 바싹 마른 수위로

계곡 탐사가 훨 수월합니다. 바위 곳곳을 탐색하다 약 50m 아래로 내려가니 또

하나의 폭포지대가 나타나고 아래에는 물이 제법 고인 소가 보입니다. 

 

 

~걱 저거!

그렇습니다. 바로 소옆 가로누운 바위 면에 李東信 각자가 위에서 아래로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찾을 것을 왜 그렇게 눈에 밟히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쉽게 찾아져 버려 조금은 허탈하기도 합니다.

한참을 쳐다보다 황배이골을 빠져 나오며 이동신의 영세불망비를 들렀습니다.

 

한자가 참 재미있습니다.

'李' 자의 아래 부수 아들 '子' 자가 마치 눈을 똥그랗게 뜬

어린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서있는 모습이라면, 

'東' 자는 엄숙단정한 갓 쓴 노인의 수염이 휘날리는 듯한 모습입니다.  

미수 허목이 이 글씨의 대가라고 하던데... 

 

이동신(李東信)

호는 신계愼溪, 본관은 월성으로 익재공후 소경공후 강릉부사 중현의 차자로 장자 어모

장군 은 의성중리에 세거하며, 천성이 인자하여 남을 도우는 일에 앞장서 청하 관아에

일천금을 희사하고, 보경사 금당수리 하는 일에 일천금을 내었으며, 개축년에 한발이 심

해 흉년이 들자 청송, 진주 등지에 구호미를 보내어 백성들을 구휼니 사림들이 조정에

천거하여 철종 병진년에 절충장군 行安州鎭營古城兵馬同僉節制使를 제수하고 임지에

나아가 덕치함에 현지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워 공의 유덕을 칭송 하였다고 한다.

만년에는 고향에 돌아와 황암리에 휴거하며 후진교학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사년(1857) 28일에 태어나 임신년(1932) 318일에 타계하니 묘소는

청하 황암산에 있다.(포항시사 인물편 참고) 

 

嘉善大夫五衛將李公東信永世不忘碑가선대부오위장이공동신영세불망비

 

신계공의 벼슬

이조(吏曹)에서 경상감사 조석우(趙錫雨)의 진휼을 마친 장계로써 복계하여, 비안 현감

조영화(趙永和함안군수 이지민(李志敏)에게 승서(陞敍)의 은전을 베풀고,

원납인(願納人) 청하의 가선대부 이동신은 실직을 제수하며, 경주 유학 홍인섭(洪寅燮)

은 사인이므로 전례에 의하여 7품직을 가설하여 단부하고, 기장의 전 인의(引儀) 김종렴

(金宗濂)과 장기 유학 송동한(宋東翰)은 우선 참하(參下)의 군함에 붙이었다.

 

 

오위장(五衛將): 조선 시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에 딸려 오위의 군사를 거느리던

장수. 12명으로, 품계는 초기에는 종이품이었다가, 임진왜란 이후에 정삼품이 됨.

 

* 2품으로 위장이라고도 한다. 정원은 12명이며 타관이 겸했다. 5위는 1451(문종 1)

에 설치되었는데, 각 위마다 5(五部)를 두고 부에는 4()을 두었다. 또 위마다 위장

을 두었으며 그 아래 부장(部將통장(統將)을 설치했다. 그러나 실제로 5위장은 5위의

군사편제와는 무관한 별도의 관직으로, 왕이 낙점하여 선발했다. 궁내에 입직하여 5

소속의 군사를 분정 받아 순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외에도 조정에 연회나 경축행사

가 있을 때 소속군사를 거느리고 궁성마다 정렬하기도 했다. 이처럼 5위장은 왕 주변에

서 군대를 통솔하는 관직이므로 대군이나 임금의 신임을 받은 관료가 임명되었다.

13명씩 차례를 나누어 입직하며 3일 만에 교대했다. 입직했을 때는 동··3곳을

나누어 각각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대궐과 도성의 내외를 순행했다. 왕의 궁궐 밖 행차

를 수행할 때에는 휘하장교와 군사에 대해 태형(笞刑) 이하의 범죄를 바로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며, 그 이상의 범죄는 왕에게 보고하여 척결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차비노(差備奴)20명을 배정해주었다. 조선 후기에 5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정3품직으로 격하되었고, 2명은 조사위장(曹司衛將)이라고

 하여 문관을 임명했다. 뒤에 1명은 반드시 문관으로 임명했으며, 1명은 문음무관(

蔭武官)에서 통차(通差)했다. 대전회통에는 3명을 증원하여 15명이 되었다.

                                                                                       (다음 백과사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