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어사와 해강 김규진 그리고 민비
우리나라에선 사진작가라는 호칭이 사용된 시기는 6·25 동란 이후인 1952년 한국
사진작가협회가 창설되면서 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는 고작 사진쟁이 아니면 사진사
였다. 아무튼 그 명칭이야 어찌 되었든 사진 기술을 익히고 그것을 우리나라 사람
의 눈과 머리속에 사진이라는 단어를 심어준 최초의 한국인 사진작가는 해강(海崗)
김규진(金圭鎭)이다. 김규진 하면 한국의 근대 미술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 평가
받는 화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개조되더니 불과 2년만인 1841년에는 일본에까지 건너오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카메라가 선보이고 사진 촬영 행위가 이루어진 것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였고, 그나마 명성황후 민비의 극성스런 사진 촬영 취미 때문이었다.
민비는 잠을 자다가도 사진 말만 나오면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민비는
황실에 사진만을 전문적으로 찍는 사진사를 고용할 정도였을까.
그 무렵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카메라를 만지거나 사진술을 익힌 사람이 없었으므
로 일본인 무라우노(村上天眞)라는 사람을 황실의 촉탁 사진사로 고용했었는데,
훗날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민비를 살해할 때 그 촉탁 사진사로부터 입수한
민비의 사진을 대조하면서 살해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바로 1895년 8월 20일 민비를
살해하고 친일내각을 성립시킨 을미정변이다.
김규진이 사진술을 배우게 된 동기는 순전히 민비의 뜻에 의해서였다.
그러면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사진술을 배우고 그 분야에서 선구자가 된 김규진의
행적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김규진은 1867년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흑우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산수
화와 난죽으로 유명했던 외삼촌 이희수(李喜秀)로부터 일찍이 글과 그림을 배웠다.
그는 나이 열여덟 살 때 중국으로 건너가 8여 년간 서화를 수업 받고 귀국하여
궁에 출입하면서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영친왕에게 서화법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궁 출입은 정기적인 일과나 다름없었다.
궁을 출입하다보면 이상한 일을 종종 목격할 수가 있었다. 일본인이라고 짐작되는
사람(村上天眞)이 가늘고 길다란 작대기 모양의 삼각 나무 받침대 위에 보부상 짐
보따리만한 궤짝(카메라)이 얹혀진 것을 뜰에 들고 나타나면 잠시 뒤에 옷을 곱게
차려 입은 민비가 나타나 그 앞에 여러 가지 모습을 지어보이는 것이었다.
"왕비마마, 근엄하게 미소를 지으소서."
"왕비마마, 두 손을 무릎 위에 가볍게 올려놓으소서."
민비는 일본인 사진사가 시키는 대로 따라할 뿐이었다. 그러한 모습들은 며칠이
지나면 신기한 이름을 가진 사진이라는 것으로 둔갑이 되어 온 궁 안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진? 거참 신기한 일이로군. 그림은 분명히 그림인데……. 일본 사람의 그 요술
상자 앞에만 서면 왕비 모습이 실물과 똑같이 그림으로 변하여 나타나다니 알다가
도 모르겠군."
김규진은 어느 날 궁 뜰에 세워진 그 궤짝을 가까이서 이리저리 살펴볼 수가 있었
다. 가까이서 본 그 궤짝의 정체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보아도 검정 보자기
로 헐렁하게 싸여 있는 속이 비어 있는 듯한 상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신기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여기에 손이 달려 있거나 붓이 매달려 있지 않은데, 왕비마마께서 이 앞에만 서
계시면 왕비마마와 똑같은 그림이 그려져 나오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로군.“
김규진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을 때
신하의 목소리가 뒤에서 나지막이 들려왔다.
"화원 나으리, 왕비마마께서 찾으십니다."
"왕비마마께서? 알았다."
김규진은 서둘러서 민비가 있는 내전으로 갔다. 민비는 미소를 함빡 머금은 얼굴로
얼마 전에 찍은 듯한 자기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왕비마마, 부르셨나이까."
"오, 화원, 어서 드시오."
김규진이 엎드려 큰절을 올리고나자, 민비는 조금 전에 자기가 보고 있던 사진을
김규진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화원, 내 얼굴을 이 사진처럼 그려낼 수가 있겠소?"
"왕비마마, 붓으로는 가능치가 않습니다."
"그러면 사진을 어떻게 생각하시나? 서화에 능통하신 화원의 솔직한 사리를 듣고
싶소."
"소인의 짧은 식견으로 뭐라고 말씀드리기 황공하오나, 사진도 필시 예로 보아야
함이 옳다고 느껴집니다."
"까닭은?"
"손으로 그린 그림이나, 기계로 그린 그림이나 그리고자 하는 발상은 어느 쪽이고
똑같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손으로 그린 그림의 보완점을 찾으려다가
사진기를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인의 식견이 부족하였다면 왕비마마
께서 일깨워 주소서."
"아니오. 화원의 식견은 훌륭했소. 그래서 하는 말인데 화원은 사진술을 익히고
싶은 뜻이 없으신지?"
"하오나……."
"관비로 일본에 유학을 보내어 사진술을 배우도록 하시오. 이미 황제께 승낙을
받아 두었소."
사진술을 배우러 일본에 건너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생각만 하여도 끔찍한 을미정변
소식을 들었다. 김규진은 일본에서 널리 알려진 사진관(野野宮寫眞館)에서 약 1년간 사진 기술을 습득한 후 귀국하였다.
사진술을 작 익혀서 귀국하게 되면 그 기념으로 제일 먼저 민비의 사진을 찍어 보
겠다는 당초의 꿈은 민비의 시해로 말미암아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김규진은 귀국
하여 창경원에다 궁중 사진관을 개설하였고 한 일 년 쯤 지나서 소공동에다 개인 소유
사진관 천연당을 개업하였다.
소공동에 위치한 천연당 사진관은 때마침 장안 시가에 처음으로 등장한 석유 가로
등과 함께 앙상블을 이루며 조용하기만 하던 조선왕조 오백년의 고도를 새롭게
눈뜨게 하려는 움직임과도 같았다.
長生無極(장생무극)
장생무극은 오래 사는 것이 끝이 없는 즉 무한한 삶을 염원하는 뜻입니다.
김규진의 사진관, 천연당을 찾는 사람들은 서울의 고관들이거나 갑부들이었다.
김규진은 천연당을 개업한 후에도 서화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였다.
김규진은 사진과 서화, 그 어느 쪽도 게을리 하거나 편중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김규진의 손과 눈을 정신세계에서 까지도 소중한 예술임에 틀림없었다.
(블로그 포토로그 참고)
조선시대 별전으로 흔히 와당전이라고도 하는데 낙랑문화의 유물에서 볼 수 있는
와당문자명(瓦當文字銘)을 응용하여 만든 것이며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높답니다.
아마도 수려한 문체 때문일 것입니다.
영정조 때 장조(壯祖 = 사도세자)의 장락사(長樂辭)에서 인용한 문구이며,
이 별전에 새겨진 글자가 장생무극 즉 오어사 현판 두인의 글자 와 같은 것인데
상부 '장'자의 이어진 부분이 후대에 손을 대어 떨어짐으로 해석에 곤란을 겪었다
는 후문과 해강선생은 가끔 서화에 이 문구(長生無極)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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