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지역/강원도

강릉 보현사의 승탑과 탑비 그 외

참땅 2013. 2. 12. 14:10

강릉 보현사의 기억들 

 

 

진전사를 빠져나와 강릉에서 영동고속도로 진입로 방향으로 따라가다

성산 어디쯤에선가 우회전하여 산길로 쭈욱 가면 보현사가 나온다는데,

두어 번의 시도 끝에 재구 찾은 보현사에도 아직 눈은 녹지 않고 있었다.

들목의 길 양 옆으로 우람한 바위는 흡사 일주문을 연상케 하고,

부도를 안치한 길가의 두 바위는 금강역사상을 대신 한 듯 하여

고매히 적멸에 든 스님께서 혹 방해가 되지 않을까 부릅뜬 눈을 치켜세워

미혹한 중생들을 팍 기가 죽게끔 우람하게 굳건히 지키고 서 있다.

 

 

하얀 눈밭에 이열횡대로 질서 있게 서 있는 부도군은 미안하지만 좀 있다

보기로 하고 우선 바로 맞닥뜨린 낭원대사탑비를 만나 보기로 하였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가지런한 다섯 개의 발가락으로 굳게 딛고 선 거북이는

고려시대의 귀부가 다 그렇듯 머리는 용머리로 화한 용두형이다.

길게 그은 듯한 육각의 벌집 모양인 귀갑문을 등에 새겨 채우고,

등 중앙에다 가로로 길쭉하니 높게 비 몸 자리를 만들고 구름문양 장식과

비좌의 가까이로 한 단 높게 얕은 단을 마련하여 정성을 더 하였다.

훌쩍 큰 키를 높이 한 비신 위에는 네 마리의 룡이 입에 물고 있는 여의주가

부족한 듯 보주를 향한 끝없는 애정을 펼치고 있는 이수를 얹어 놓았다.

 

 

 

 

 

 

방형의 머릿돌 아래에는 절수구를 비롯 비신 둘레에 단을 장식하고

얽히고 설켜 꿈틀거리는 욕심 과한 네 마리 룡의 발톱은 순하게 새겨 놓았다.

보주를 다투는 네 마리의 룡 꼭대기에는 복발과 한 단의 보륜을 만들고

그 위에는 엄청난 기를 상징하듯 화염에 휩싸인 보주를 올려놓았다.

천년만년을 가도 녹지 않을 보주는 아직도 룡의 투쟁을 불사르고 있다.

 

 

대웅전 마당에 올라서니 어랍쇼, 이건 먼가요?

사자, 곰 하지만 지 눈에는 개 같이 보이는데요.

근디 머리를 반대로 올려놓은 것 같아 심히 요상시럽심미다.

사자상이면 보현사 창건설화와도 연관 지어 볼 수 있건만

, 개라면 뭔가 다른 얘기가 있거나 다른 곳에서 옮겨 왔을 가능성이 짙다.

허기사 창건설화와 관련해도 보현과 사자는 아니다.

 

보현사 창건 설화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단다.

하나는 보현보살이 창건하였다는 설로서, 신라시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돌로 된 배를 타고 천축국으로부터 강릉의 동남쪽에 위치한 남항진 해변에

당도하여 문수사(한송사터)를 세우고, 절이 완공되자 보현보살이

한 절에 두 보살이 함께 있을 필요가 없으니, 나는 활을 쏘아 화살이

떨어지는 곳을 새 절터로 삼아 떠나겠다.‘ 고 말하며

보현보살이 신력으로 활시위를 당기자 화살은 멀리 날아 현재의 보현사 위치에

떨어져 이곳에 절을 창건하고 머물렀으니 이것이 보현사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낭원대사의 창건설로서 한 고승의 생애가 뒷받침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이 설을 따른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사찰 경내의 낭원대사오진탑비를 참고하여

낭원대사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 절의 창건자는 대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낭원대사는 보현사를 크게 중창하고 참선도량을 이룩하여 이절을 사굴산문의

대표적인 선찰로 탈바꿈 시켰던 것이다.

 

 

어쨌든 서수의 석상 옆에는 방형의 지대에 원형의 주좌를 마련한 주초석 위에

불상을 새긴 탑신, 옥개석 부재 둘, 노반과 복발을 얹은 석탑재가 있는데

불상의 모습은 희미하여 육안으로 구별이 가능할 뿐 수인과 상호는 구분이 어렵다.

탑신석에 불상이 새겨진 석탑이 바로 옆 동네 진전사에도 있어 이 지역의

유행을 가늠해 볼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비단 나만의 추측이리라.

 

 

보현사 산신각 뒤편으로 100m 정도라는 말만 믿고 뒷문 빗장을 열고 나섰는데

이런, 길이 두 갈래 길이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다 우측 좌측 이라는

단어가 생소하여 직진 하여 한참을 걸어가도 승탑 쪼가리 같은 것도 보이질 않아

되돌아서 오는 길이 더디 멀고 마음만 답~답하다.

다시 우편 자드락길로 들어서서 조금 가려니 그제야 눈 속에 파묻힌 돌계단이

나타난다. 허기사 눈이 없었다면 굳이 좌우편 방향이 무색했을 것 같다.

씩씩거리며 눈에 파묻힌 돌계단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급한 맴으로 오르자니

등덜미에 전해오는 흐르는 땀의 잔유물이 서서히 얼굴에도 맺히기 시작한다.

, ~하는 즈음에 돌계단이 끝나고 낭원대사 승탑이 눈앞에 보이는데,

그제야 가쁜 숨을 함 몰아시고 잠깐의 여유를 부려본다.

 

 

이 부도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낭원대사 승탑으로 낭원대사 탑비가

고려 초(940)에 건립되었으므로 이 부도도 이때 같이 축조된 것으로 보여 진다.

널찍한 팔각의 지대석은 얄팍하게 2장의 돌로 마련하고, 팔각과 원형의 이중구조로

나눈 하대석은 밋밋한 팔각의 하단에는 네모난 액자를 얕게 만들고 안상을 1구씩

새겨 넣었다. 그에 비해 하대석 상부에는 룡이 여의주를 다투는 문양을 넣었다.

상부 윗면에는 복련을 장식하고 안쪽 깊숙이 각형 이중 괴임석을 따로 새겼는데,

그러나 그 위에 있어야 할 중대석이 보이질 않는다.

한 단의 받침석과 중첩된 연꽃을 꽉 채운 상대석은 원형인데 기본인 팔각으로

마무리를 하고 역시 팔각의 몸체를 올렸으며, 비신 앞면에는 문비를 만들어

그 안에다가 가운데에서 조금 아래쪽으로 좌우에서 입을 벌린 룡 자물통을

그리고 아래편에 문고리 두 개를 달아 놓았다.

 

 

지붕돌은 폭이 좁고 두껍게 추녀는 낮게 들렸는데, 아랫면에는 넓고 움푹 패인

절수구획을 정하고 또 다시 3단의 받침석을 마련하였다.

지붕돌의 윗면은 경사가 급하며 팔각 각 모서리에는 귀꽃이 있었으나 지금은

파손되어 흔적만 남아 있고, 상륜부에는 납작한 타원형 복발과

흡사 지붕돌과 모양이 엇비슷한 그러나 골이 깊은 보개를 놓았는데

역시 각 모서리에 장식한 귀꽃의 흔적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한 낭원대사 승탑은 원래 산꼭대기에 있었으나 무너졌던

것을 사찰입구에 복원하였다가 1991년에 다시 원래의 자리로 옮겼다 한다.

그러나 현재 부도 몸체를 받치는 기단부의 중대석과 상륜부의 일부 부재는

멸실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낭원대사 중창이후 보현사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대관령을

분기점으로 하여 내 문수도량 월정사와 함께 외 보현도량의 명성을 이어 수행승의

요람으로 이어 왔음이 사찰 입구에 있는 20여기의 부도가 절의 역사를 충분히

증명해주고 있음이 아닐까 싶다(강릉시청 참고)

 

바뿌다.

어구야꼬 칠곡 경대병원으로 갔다가 또 포항까지 갈라모 아직 한참이다.

결국 이 날의 여정은 새벽 2시에 일 나가 3시경에 집 나서가 밤 11시경에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꼬박 20시간을 휘뚜루마뚜루 쳐 돌아 댕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