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비지정문화재

뚜벅뚜벅 뚜벅이 구룡포 한바쿠- 처음

참땅 2012. 9. 5. 10:26

뚜벅뚜벅 뚜벅이 구룡포 한바쿠- 처음  

 

 

1. 구룡포 고래잡이 포경선과 고래총

고래는 1986년부터 사실상 포경이 전면 금지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많이 잡힌 어종이다. 한말까지 방치되었던 동해의 풍부한 고래자원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각축을 벌이다 1890년대 일본이 동해의 포경업을 독점하면서 구룡포에도

고래를 잡는 포경선이 자주 입항하였었다.

구룡포는 일제시대인 19261차 방파제가 만들어진 후부터 정어리와 청어는

물론이고 고래잡이 전초기지로도 명성을 얻기 시작한 포구이다.

역사적으로도 구룡포를 비롯한 영일만 앞바다는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

開拓使兼管捕鯨事)’라는 직함을 가졌던 김옥균이 고종 때 포경업을 추진할 정도로

고래가 들끓었던 곳이다.

 

 

해방 후 구룡포 포경선의 최초는 전 구룡포수협장을 지낸 강두수 씨의 영어호였고

이어 서상호 씨가 미복호를 운영하면서 뒤를 이었으며 수 십 척의 고래배가 조업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구룡포에는 인근 울산 장생포 등에서 고래고기를 구하러 오는

사람들로 줄을 서기도 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과도하게 포획되는 고래 자원의 관리와 포경업을 규제하기 위해

194612월에 국제포경조약이 체결됐다.

멸종될 위기에 처한 고래의 포획 제한, 조업 해역 및 포획기간의 제한 등을 규제했고

이후 1982년에는 상업적 목적의 포경을 전면 금지했으며 1986년부터는 실질적으로

역사의 과거로 사라지면서 구룡포의 포경업도 잊혀져 갔다.

 

 

이에 구룡포 개발자문위원인 김재환 씨의 도움을 받아 김재섭 전 읍장의 고래총 설치

이후 지역 사랑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고 김건호 씨의 유지를 받들어 장남 태균 씨가

출자한 3천만원과 구룡포 개발자문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감척된 어선을 개조해 2010

7 20일 이 자리에 세워지게 됐다. 그러나 기부자의 뜻을 기리는 차원에서 어선명

은 동건호로 했지만 과거 꽁치잡이 어선으로 이름을 날리던 선박이어서 구룡포와

이미지가 맞는 이름으로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구룡포읍사무소에서 이제 얕은 오르막으로 병포교차로로 길을 잡으면 용두산 언저리

에 장승 2기가 서있다. 구룡포의 이미지를 제고한 작품(?)이다.

과메기 특구, 오징어 대게 고장

대게의 경우 전국 생산량 약 60%를 점유하지만 그 명성은 영덕·강구만 못하다.

게다가 오징어도 예전보다 생산량이 엄청 줄어버렸다.

오죽했으면 지난 여름 구룡포해수욕장 축제 때 오징어 맨손 잡기 체험행사에

사용할 오징어를 구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을까. , 안타까운 일이다.

 

 

장승과 마주한 이 만디(재)는 구룡포에서 외지로 일보러 가거나 단체로 여행을 떠날

때 잠시 인사를 하고 가는 곳이다. 즉 간단히 막걸리 한병 놓고 무사안녕을 비는 우리

가 흔히 아는 서낭당 같은 곳이다.

 

 

이제 병포리교차로에서 감포가는 지방도로 접어들면 좌우로 가로수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데 이 나무들은 벚꽃나무이다. 화려했던 지난 봄을 보내고 지금은 조용히

자숙의 시간을 갖고 있다.

 

 

양 옆으로 비닐하우스가 펼쳐져 있는데, 영포지역에서 꽤나 유명한 찰토마토이다.

수확시기가 끝물이라 하나 먹고 싶었는데 주인이 보이질 않아 포기했다.

 

 

 

크고 웅장한 천태종 소속의 용주사인데, 천태종 본사인 구인사도 그렇지만 포항의

황해사도 3층 구조의 씨멘트 건축이라 천태종만의 색깔인가 싶다.

뭔가 예스런 맛은 없고 잔뜩 주눅만 들게하는 이런 사찰을 꼭 지어야 하나.

 

화려한 대웅전의 현판 글씨는 금색인데 '대웅보전' 이 아니고 '대불보전'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현판은 또 처음보네.

 

 

 

2. 병포리당산나무

구룡포 들목에 우뚝 솟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자래골, 웃자래골, 남포동 등 3개의 자연

부락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용의 머리 같이 생겼다 하는 용두산에는 고려 때 수군검

사진기로 사용되던, 성벽의 둘레는 1천여척, 높이 10여척이었으며 우물을 구비한 토성

이 있었다 하나 고려 말에 폐지되고,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대신 구룡포읍 상수도 정수장이 설치되어 있다. 본래 장기군 내북면 지역인데 1914

행정구역 폐합시 병동과 남포동의 이름을 합쳐 병포리라 한다.

 

 

 

병포1리에 해당하는 자래골은 영월엄씨가 개척한 마을로 마을 앞에 자래(자라)를 닮은

큰 바위가 있어 불려 지게 된 이름이나, 병동의 '''자래''자루'로 잘못 해석한

데서 온 표기로 추측되고 있다.

병포2리인 웃자래골은 경주김씨가 개척하였으며, 자래골 위에 있다 하여 윗자래골이

라 불렀으며 순흥안씨의 나곡서원이 있고, 고디이골 산기슭에 관음사가 있다.

나곡서원과 관음사의 야그(?)는 후일로 미루겠습니다.

 

 

 

병포3리에 해당하는 남포동은 진주하씨가 개척한 마을로 구룡포항구 남쪽에 위치하여

남포동이라고 하며, 구룡포항과 마주보고 있다 하여 맞구룡포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6.25사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많이 산다하여 피난민 동네라고도 불려지기도 하는 이

동네 중간 지점 바다 쪽으로 당산나무가 있다.

 

당산나무는 포고나무로 마을 끝 바다 앞에 위치한다.

시멘트와 굵은 돌을 섞은 담장이 높이 세워져 있고, 양 옆으로 길이 있다.

바다로 난 길은 새로 만들었으며 원래의 길은 좁은 길이다

좁은 길로 들어서자마자 음습한 기운이 확 밀려와 소름이 돋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동제를 올렸다 하나 지금은 중단된 것 같다.

 

 

3. 해원 바다목장 낚시터

포스코에서 기술자로 청춘을 바치고 3년 전에 퇴직한 박씨는 직장생활을 할 때 부터

 "퇴직하면 취미인 바다낚시와 관련된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는 인터넷에서 관련 아이디어를 찾아보고 점포 자리도 여기저기 눈여겨 봐두기도

했다.

 

퇴직 후 사업 준비를 위해 영일만 바닷가에서 살다시피 하던 박씨는 국내 양식장들이

중국산 저가 활어의 대량 유입에 못 견뎌 줄줄이 문을 닫는 것을 지켜보면서

"폐양식장을 활용 한 독특한 횟집을 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평소 회를 즐겨온 박씨는 횟집을 찾는 손님들이 횟감을 직접 고르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손님들이 바다낚시의 손맛을 느끼면서 횟감을 찾는

재미를 맛보게 하면 장사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대견했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어 수산 전문가들과 기존 횟집 주인

들을 찾아다니면서 자문했다. 한결같이 "장사가 되겠다"는 반응들이었다.

'해보자'는 결심이 선 박씨는 올해 초 구룡포 해변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펼치기에

안성맞춤인 폐양식장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곳은 육지와 바다가 맞닿은 곳에 콘크리트로 제방을 쌓고 제방 아래쪽에 철제로

스크린을 설치해 양식어류들이 놀고 있는 양식장으로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게 돼

있었다. 박씨는 이 양식장에서 손님들이 횟감을 바로 낚아 올릴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개장 초기부터 손님이 몰렸다.

고객들은 자신이 먹을 횟감을 직접 낚아 올리는 재미에다 수족관이 아닌 천연의

바다와 바로 통해 있는 양식장에서 자연산처럼 뛰노는 횟감의 신선함에 반해 버렸

.

방문객들이 도구 없이 찾아와도 낚시를 할 수 있도록 현장에 장비도 갖춰 놓고

있다. 바다낚시 초보자라도 낚싯대를 드리우고 10분 안에 고기를 낚아 올릴 수

있도록 양식장에 다양한 어종들을 풍성하게 풀어놓았다.  (POSRUN 참고)

 

 

두 번의 태풍 때문인지 바다목장은 을씨년스럽기조차 하다.

고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사람 손길조차 보이지 않는다.

 

바다목장 옆길은 사람들이 다니던 다니지 않던 제멋에 겨워 힘껏 자기의 위태를

자랑하고 있는 길 짧은 가로수가 그 풍취를 뽐내며 서있다.

 

 

두번의 태풍을 비껴나간 동해바다는 한가로왔다.

고무다라이를 허리에 둘러맨 할아버지가 수경을 들고 청각 채취를 하고 있다.

'할아버지요 머 잡는교?'

. . . . .

 

머쓱하다. 엔간하모 대답이라도 쫌 해주지.

허기사 '웬 미친넘들이고' 싶기도 하겠다.

보모 모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