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지역 비지정문화재를 찾아 - 그 네번 째
장기면 임중리와 양포리 지역입니다.
김사민: 포항시 남구 장기면 임중2리
임중리 새장터 마을 앞 국도변에 위치하며 효자 金士敏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조 광무(光武) 2년(1898년) 건립된 비각이며, 정면1칸 측면1칸의 북동향 건물로
맞배지붕의 겹처마이다. 정면에는 ‘旌孝閣’ 현판이 있고 양쪽에는 방풍판이 있다.
비신 전면에는 ‘子嘉善大夫金海金公四敏之碑(자가선대부김해김공사민지비)’라고
새겨져 있으며, 비신의 크기는 폭 37.5㎝·높이 146㎝·두께 16㎝이다.
김사민은 김해김씨 문중으로 예조판서를 지낸 자정의 현손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효행이 남달랐다. 15세 때 부친이 중병에 걸려 위독할 때 어느 도인이 두꺼비회를
복용하시면 나으리라 하심에 엄동설한에 두꺼비를 구할 길이 없어 애를 태우며
하늘을 향해 기도하니 김사민의 효심을 알고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동쪽 20 리
바위 밑에 가면 두꺼비를 구할 수 있다고 하여 급히 그 곳에 달려가서 눈을 헤치고
땅을 파니 두꺼비 한 쌍이 있어 집으로 가져와서 드시게 하니 차도가 있었다.
다시 부친의 병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로서 희생시켜 5년을 더 연명하시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3년간을 산속에서 시묘를
하였는데 호랑이가 와서 호위하여 주었으며, 모친이 별세하였을 때도 3년간 시묘를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효행을 이 지방을 지나던 관찰사가 듣고 이 고을에
효자비를 세워 후세에 빛나게 하라하여 조선 헌종7년(1841년) 김해김씨 문중에서
선조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다.
덕미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임중리
덕계(德溪) 임재화(林再華)공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장기향교의 재건을 위하여
대대로 살던 자기 집터를 향교재건에 희사한 공로를 기린 유허비(遺墟碑)다.
덕미각은 906번 국도변의 임중 2리로 들어서는 입구에 위치한 북동향 건물로,
정면1칸 측면1칸이다.
전면에는 ‘忠勳都事德溪林公遺墟碑(충훈도사덕계임공유허비)’라고 새겨져 있으며,
비신의 크기는 폭 43㎝·높이 136㎝·두께 26㎝이다.
집터는 향교부지로 이용되다가 향교를 장기읍성내로 이전하고 현재 장기초등학교로
이용되고 있으며 현 학교부지 소유자는 향교유지 재단소유이다.
덕림서원: 포항시 남구 장기면 임중리
해주 오씨의 서원으로 고려 충선왕 때 인물인 蔡軒(채헌) 吳邦祐(오방우)를 배향한다. 영조 16년(1740)에 창건되었으며, 순조 5년(1805) 중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
로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었으며, 그 뒤 1946년에 중수하였다.
건물은 강당·묘우·남재·북재가 있으며, 강당은 정면5칸 측면2칸으로 팔작지붕의
겹처마 건물이다. 중앙에는 강당인 ‘德林書院’ 현판이 있다.
매년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頭) 4두(豆)이며,
재산으로는 전답 1,500여 평이 있다.
사당인 정헌묘(貞獻廟)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에 이익공 양식을
취하고 있다. 장여를 화반이 받치고 있는 모양으로 초가되어 있으며, 겹처마에 풍판을
달았다. 잘 치석된 원형초석에 원기둥을 세웠고, 기단은 자연석을 쌓아 올렸다.
루를 설치하였다.
오방우(吳邦祐): 1313년(충선왕 5년) ~ 1393년(태조 2년).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동도(東道), 호는 규헌(葵軒),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연총(延寵)의 증손으로
고려 충목왕 때 예부시에 급제하고 공민왕 때 오도안렴사를 지낸 해주오씨 장기
입향조이다. 시호는 정헌(貞獻)이다.
정유서 유허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수성리
정유서의 호는 학포(學圃), 본은 영일(迎日)로서 고려시대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낸 정인언(鄭仁彦)의 후손으로 학포 鄭維瑞는 임진왜란 때 동생 鄭維祿(정유록)과
지방 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모아 가재를 털어 군수물자를 조달하였으며,
記事官(기사관)으로 활약하여 많은 공적을 남겼다.
임란이 끝난 후 공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가선대부를 추증한 후 宣武原從功臣錄에
올렸다. 비각은 정면1칸 측면1칸의 건물로 맞배지붕에 겹처마이다.
기둥 초석이 높고 치석 수법도 아주 잘 되어 있다.
경모재: 포항시 남구 장기면 수성리
鄭龜公(정귀공)은 문충공 정몽주선생의 6대손으로 관직은 훈련주부(訓練主溥)이며
오천 정씨의 장기 입향조(入鄕祖)로 후손들이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개XX들 때문에 접근도 못하고 비굴하게 돌아서야만 했다
못된 개이XX들...
장인풍 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양포리
조선 정조 때 동부승지를 지낸 장인풍은 자는 유만, 호는 해은(海隱)으로
정조 5년(1781년) 출생하여 순조 32년(1832년) 사망하였으며,
비각은 仁同 張氏 門中에서 장인풍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비각은 정면1칸 측면1칸의 건물로 맞배지붕의 겹처마이며, 비석은 비좌와 이수를
갖추었다. 비석 전면에는 ‘孝子張先生旌閭之碑(효자장선생정려지비)’라고 각자되어
있으며, 비신의 크기는 폭 56㎝·높이 146㎝·두께 26㎝, 이수는 가로 91㎝·세로 59㎝·
높이 49㎝이다.
조선 정조 시 동부승지벼슬을 역임한 효자 장인풍은 자는 유만 호는 해은이요
본관은 인동이다. 장해은 공이 나이 12살 되던 해에는 집이 가난한데다가 흉년이 들어
거치른 밥과 물을 마시며 연명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게다가 모친의 신병마저
겹치자 소년 가장이 되어 스스로 땔나무를 해오고 때로는 백리 밖에 나가서 품팔이를
하며 쌀을 장만하여 물을 길러다가 죽을 끓이고 약을 달여 드렸으며, 추운 겨울에
모친께서 입맛을 잃고 ‘살아있는 물고기나 한번 먹어 봤으면...’ 하셨다.
궁핍한 살림에 사다 드릴수도 없어 강에 나가서 얼음을 깨고 들여다보며
목 놓아 울고 있으니 갑자기 큰 붕어 한 마리가 얼음 위로 뛰어 올라 왔다고 한다.
그 후 모친상을 당하여서는 부친상 때와 같이 움막을 지어 놓고 정성을 다하여
채식을 하며 3년을 시묘하였다고 한다.
효자 장인풍은 조선 정조 5년(1781년)에 태어나서 순종 32년(1832년)에 별세하였으며
문중 유림에서 그의 효성을 후세에 알리고자 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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