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비지정문화재

장기의 성판권안휴허지를 찾아

참땅 2012. 2. 7. 14:31

 

장기향교의 오성팔현 위패를 권안하였던 원래의 터를 찾아 

꿩대신 닭 - 국구암 찾으려다 실패 후

임란 때 공을 세운 세 분들의 유허비- 원래의 자리는 이곳이 아니다.

 

비석 2기가 있으나 죽계(좌)의 비가 없어 최근에 새로이 조성하였다.

 

성판권안유허비(聖版權安遺墟碑)

신창1리 뱃머리에 있는 유허비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기향교에 모시던

오성 팔현의 위폐를 현의 동쪽에 있는 용암굴에 권안시켜 전쟁의 참화를 면하게 한

직재 서방경, 낙와 서극인, 죽계 이대임 세분의 공덕을 기리는 유허비이다.

 

 

 

직재 서방경(1542~1628)

자는 군길, 호는 직재, 본관은 달성으로 판도판서 서진의 후손이다.

장기현에서 출생하여 학문에 전념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세 갈래길로

나누어 북진하므로 공이 분개하여 칼을 뽑아 맹세하고 종질인 낙와 서극인,

죽계 이대임 등과 급히 향교로 달려가 오성팔현 위패를 용암석굴에 안전하게

감추어 놓은 다음 의병을 모집하여 장기현을 지키다가 곽재우 휘하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고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5성과 8현 위판을 다시 모셔오니

성현위패를 피난시킨 공적을 찬양하여 경주판관 해주판관을 제수하고 세상을

떠난 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증직 받았다.


낙와 서극인(1567~1634)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동해연안을 침공, 장기고을에 입성하여 방화, 살인 등

만행을 저지르게 되자 공은 장기향교에 봉안된 오성(공자, 안자, 증자, 자성, 맹자)

위패를 석굴 속에 보관하였다가 난이 평정된 후에 다시 복위하게 한 공으로

봉사를 제수받았다


죽계 이대임(1574~1635)

본관은 창녕. 자는 사중, 호는 죽계. 부는 참의를 지낸 이국추(李國樞)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방경‧서극인‧이눌(李訥)과

함께 장기와 경주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포항시 장기면에 있는 학삼서원에 배향되었다.

 

 

원래 비가 있던 곳임을 알기 위해 새로이 비를 세웠다.

 

용암굴 내부의 모습- 이곳에 위패를 안치했단다.

 

내부에서 밖으로 본 모습

 

어렵사리 찾은 유적지를 금선생님께서 가리키고 있다.

 

 

直齋處士徐公方慶 

樂窩處士徐公克仁

聖版權安遺墟 

 

서방경, 서극인, 이대임, 이눌 등이 같이 임란을 겪으며

장기향교의 위패를 권안하였으나 애초 서방경, 서극인의

이름자만 올리는 비석을 세웠다고 추정됩니다.

그러자 영천이씨 측에서 지금의 할매바위가 있는 용암에다

이눌의 성판권안유허 각자를 조성하였고

그 이후 비각을 옮긴데에다 이대임의 비석을 추가 조성

하였으리라 판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