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비지정

경주 골목길 답사 세번째 기록

참땅 2009. 9. 7.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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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골목길 답사 그 세 번재는 경주 황성동, 용강동 주변지역을 톺아 봤습니다.

인원 102(?)명 경주신라사람, 저 그리고 일당백을 능히 감당하는 아지매 한분

황성고원 내의 조선시대 이 비석은 경주시내의 한 가정집에서 옮겨 왔다는데 비신 받침이

아주 노골적입니다.

석탑 옥개석을 거꾸로 앉히고 그 윘면에다 연꽃 닢과 줄기, 봉오리를 돋을새김 하였는데

그 새긴 솜씨가 전혀 조악하질 않아 보는 맛이 꽤 좋습니다.

어쩌다 비석이나 부도 등을 석탑 옥개석 위에 올린 것을 보긴 했으나 아무런 조식없이 있는

그대로를 사용했는데 이 비석은 투박하지 않은 솜씨로 새긴 연꽃은 그런대로 보아줄만한

장식이라 처음부터 계단받침을 만들고 그 위에 비신을 올려놓았나 싶을 정도로 꽤 어울리게

새겨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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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도 특이 합니다.

앞면에는 각자를 새겨 누구의 비인지를 밝혔고 옆, 뒷면으로는 공굴리게 곡면으로 다듬어

대부분 비석의 형식인 각진 모남을 크게 벗어나 마치 뒤에서 보면 ‘당간지주’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옆, 뒷면을 장식한 점은 이 비석의 특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첫머리의 흥미있는 비석을 시작으로 몇몇기의 비석은 보통의 일반적인 비석으로서 흔히

볼 수 있는 불망비 등등 이고 조금 안쪽에는 현재 황성공원내의 궁도장으로 사용되는

‘호림정’이 있습니다.

일제당시까지도 임해전지 내에 있던 건축물로써 후에 경주군수가 왜색이 짙다하여

이곳 황성동으로 이건해 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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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공원 뒷문 쪽에 위치한 ‘박무의공비’는 제법 큰 비로서 각자를 뚜렷하고 크게 새겨

넣어 보기에도 시원한 비석이었으나 갑갑한 지붕과 나무창살로 감금하다시피 가두어

놓아 흡사 대장군이 외따로 떨어진 감옥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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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때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경주성 탈환에 참전, 이후 7년 동안경주를

지켰던 박의장은 후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승진했으며 그가 세상을 뜨자 조정에서 ‘무의공’이란

시호를 내렸답니다.

헌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몇가지 장면만 아니어도 그냥 넘어갈려고 했는데 여기서도 어김없이

비신받침은 석탑의 옥개석을 사용하였고 보호각 사방둘레 기둥 초석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옛적

초석도 있고 맷돌도 보입니다.

기둥초속으로 쓰이는 맷돌 - 맷돌의 용도가 이리도 다양 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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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와의 전설을 간직한 호원사터.

엄청나 크기의 층급받침이 무려 5개나 되는 옥개석이 뒤집혀진 채로 개인 가정집의 장독대로

쓰이는 이곳 호원사터는 호랑이 낭자와 서라벌 총각의 애끓는 사랑이야기가 전개되던 곳이기도 하답니다.

집안 곳곳마다 장독대 경계석으로 댓돌로도 화단 경계석으로도 쓰이는 석재는 석탑의 지대석이거나

장대석이었습니다.

엄청난 수의 도사견을 사육한다는 귀뜸에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움이는 조바심을 억지로 누르며

집안으로 들어가니 쬐끄만한 강아지 같은 개 두 마리만 시덥잖은 빈객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허지만 송아지만한 도사견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까봐 주인 할아버지께 미리 인사를 올리고

석탑재를 살펴보는 내내 마음은 두근반 세근반 편치 않았습니다.

비록 탑신은 보이지 않았지만 2기의 옥개석은 오랜 풍화의 시달림 속에서도 뚜렷한 층급받침과

상부의 찰주공, 화강암 고유의 순색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량의 지대석과 장대석이 이집 곳곳에서 다양한 용도로 쓰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고

갑갑할 따름입니다.

 

경주 동국대 도서관 앞 잔디밭에 진열된 다양한 야외 조각물도 눈을 쏠리게 하는 조각물이

여럿 있어 보는 즐거움을 충분히 느꼈지만 한층 더 흥미를 돋구는 것은 그 용도를 짐작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한면에 크게 장식된 ‘도깨비’상이었습니다.

부라린 눈과 콧구멍까지도 사실적이게 부조된 도깨비를 과감하게 한 면 가득 새긴 솜씨를

가진 석공은 가히 그 시대의 쾌남이었을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어쩌면 형식에 얽매어 따지기 좋아하는 이 시대는 그런 쾌남의 정신을 가진 장인을

그리워하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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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션인지, 별장인지 아님 어느 적 성당의 모습을 본딴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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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사 설법전 마당 한 구역에 어색하니 수줍게 서있는 이 석탑은 이것저것 마구

뒤섞어 놓은 부대찌개 마냥 시쳇말로 훈지만지입니다.

하부 층급받침이 뚜렷한 옥개석은 크기도 크기려니와 지붕마루에 간격을 넓게 두고

두 줄로 가로 새긴 일종의 선 장식은 처음 대해보는 양식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새겨진 장식이 아니고 후대에 부가된 장식 같은 느낌도 지울 수는 없지만,

왜 이런 장식을 새겼는지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상부로 올라 갈수록 용도의 짐작조차 어려운 여러 석재물은 아련한 충격을 느끼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작년 법천사터의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조물을 대했을 때의 감흥과도 비슷한 느낌이라면

지금이 그렇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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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탑 상륜부의 부재인 원반형 석재 밑에는 흡사 석등의 화사석 화창마냥 네모지게

두문을 관통지게 만들었고 나머지 면에는 알아보기 힘든 무슨 상을 새겼는데

언뜻보면 토끼 같기도 하고 도깨비 같기도 한 그림을 새겨 넣었고 그 밑에는

육각형의 석등, 부도 등의 상륜부재가 자리 잡고 그 하부에 육각원통형의 석재인데

위로 올라갈수록 적어져 원뿔형으로 다듬었는데 밑에는 육각모서리마다

위로 옴팡지게 말린 꽃봉오리 여섯 개를 달아 놓았네요. 

쳐다볼수록 신기하고 이채로움에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여기서도 마당 곳곳에 석탑 부재 등이 많이 눈에 띄어 또 한번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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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으로 향한 곳은 얼마 전(2006,12월경)에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 등록된 일제시대 양수장

건축물이었습니다. 현재 포항시 양수장 시설물이 있는 유강리에서 형산강 건너편 국당리에

위치해 있는데 이 부근은 기도처, 굿당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지금은 시설 노후화로 바로 옆 양수장을 이용하고 있지만 최근까지도 이 시설물을 이용하고

있었슴을 알 수 있는 표식이 여기저기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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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홍수 때 많은 물이 들어 왔음을 태풍이름, 년도 월일자별로 나무판자 벽에다 써놓은걸

뚜렷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제법 바람깨나 불어 제끼는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마지막 운곡서원에서 석등 하대석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나름 알찬 답사였답니다.

 

뜨끈한 음식이 그리바가 경주에서 해물찜으로 쇠주 한잔이 결국 경주읍성터

삼거리 막걸리 집까지 남정네 둘이는 예쁜미라 아지매한테 끌려 다니다 경주에서 포항까지

대리운전해가 오는 것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길눈이 해주신 김환대님에게 감사드리며 머시마 둘 덜꼬 해물찜 사믹이고

대리운전비까정 주신 예쁜미라 아지매님 고맙심미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