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비지정문화재

임진왜란과 장기의 이눌비

참땅 2011. 2. 1. 11:02

 

채전밭을 하얗게 솜이불처럼 뒤덮은 밭을 가로질러 대나무 밭 뒤편에 '이눌'의 사적비가 있다. 그 일대가 장기향교의 옛터이다.

 

훈도공 이눌(李訥)의 자는 약우(若愚) 호는 낙의재(樂義齋)이며 본관은 청안(淸安)이다. 고려조 청안군 충원공 양길의 후손이다. 장기현(지금의 포항시 구룡포읍, 장기면, 대보면 동부, 동해면 상정리·중산리·공당리를 포함하는 지역) 현감 '이 기'의 현손이며, 훈련원첨정 '이신정'의 아들로 선조 2년(1569)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개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지혜와 용명이 있고 무예가 뛰어났다. 입실리 출신 이응춘(李應春) 의병장의 종질이 된다. 이눌(李訥)공은 어려서 아버지에게 '효경' '논어'를 배워 효제를 행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하인들과 이웃 주민, 승려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천사장(天使將)이라는 기를 앞세워 많은 전공을 세웠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인들이란 당시로서는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하던 '종'이나, '백정'들을 말하며, 승려들은 불국사 소속 승려들을 말한다. 이들 의병 승려들 때문에 왜군들은 보복으로 불국사에 방화하여 목조건물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기도 했다.

 


대나무 밭에 바짝 붙어 허튼 돌담을 쌓고 거대한 지붕돌 아래로는 역시 돌로 만든 

기둥이 있는데, 위아래로 난간석을 두르게끔 간주도 있다.  

 

선조 25년(1592) 4월 왜구의 침공설로 시국이 어수선할 때 '이눌'공은 황룡언덕에 훈련장을 마련하고 마을 장정들을 모아 무예를 연마하였으며, 또한 남천위의 '무정'에서 김석견, 권사악, 황희안 등 뜻을 같이하는 향리의 유생들과 강무회(講武會)를 갖는 등 유사시를 대비하였다.

 

이러한 대비 끝에 동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 일 만에 경주성이 함락되자 비분강개한 이눌(李訥)공은 종숙 이응춘 의병장과 재종 이승금, 이삼한 등과 더불어 지체 없이 의병을 일으켰다.

 

비각 내의 이눌공 사적비는 평범하나 돌로 만든 비각이 좀 처럼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의병을 결성하자말자 같은 달 24일 경주성 탈환을 위해 제일 먼저 '항왜결의(抗倭結義)'를 맹약하고, 남천과 계림 등지에서 진을 치고 적을 방어하였다. 이때 적의 대병이 동해안으로 침투한다는 소식을 듣자말자 의병을 이끌고 수영포로 달려가 적을 무찔렀고, 동년 6월 9일에는 '문천회맹(汶川會盟)'에 참가하였다.

 

이후 이눌공은 선조 25년(1592) 7월 영천성 탈환에 참전하여 적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우고, 동년 8월과 9월 경주성 탈환에 두 번이나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선조 26년 2월에는 태화강 전투에 참전하고, 동년 10월에는 '구강동고록(鷗江同苦錄)'에도 서명하였다. 선조 29년 9월에는 '팔공산회맹'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해 7월 21일 방어사 곽재우 장군이 지휘하는 '화왕산회맹'에도 참가하여 성을 지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리고 동년 9월 22일 다시 의병을 일으켜 팔공산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채몽석, 박충윤, 손처약, 이이잠, 손시 등 의사들의 공적을 기리는 시를 지어 찬양하였다.

 

성교유허장사랑 훈도이공사적비

 

전술한바와 같이 이눌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주의 문천에서 각처의 의병들과 개회한 '문천회맹', 그리고 울산에 있는 반구동에서 개회한 '구강회맹'에 참가하여 왜적을 타도하기 위한 결사동맹(決死同盟)을 맺었다. 이후 이눌공은 김득복(金得福), 황희안과 함께 대왕암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 등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왜적 4백 여 명과 양산으로 진격하는 왜적 70여명을 참수하였으며, 10월에는 울산으로 가서 같은 개곡리 출신인 견천지와 안시명, 윤홍명, 서충인, 장희춘, 권사악, 최계종 ,박춘무, 안국보 등과 합세하여 싸웠다.

 

1592년 6월에는 김득복(金得福) 등과 함께 금오산에서 적 4백여명을 참살하고 도창·조총27병을 노획하였으며, 7월에는 영천에서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 의병장 권응수(權應銖) 등과 합세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이듬해인 1593년 1월에는 적의 대선단이 태화강으로 침입하자 박손(朴孫), 이우춘(입실리 출신 의장) 등 의사들과 전선 10여척을 준비하고, 수전계획을 세워 마침 불어오는 강풍을 이용하여 화공과 모래를 퍼 날리는 전법으로 적을 격파 대승을 거두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흡사 비의 갓머리처럼 만든 자붕돌은 통돌로 만들었다는 점과 그 크기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곽재우(郭再祐)장군과 합세하여 적을 공략하였고, 대구의 팔공산싸움에서 적탄을 맞았으나 승리를 거두었다. 난이 끝난 뒤 재산을 모두 털어 백성을 구휼하고, 자제들을 '낙의재'에 모아 충효의 길을 가르쳤다. 선조 38년(1605) 선무원종공 1등에 녹훈되었다. 그 후 공의 사적은 1858년 후손들에 의해 '낙의재 유집'으로 간행되었다.

 

이눌공은 외동읍 내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여러 번 세웠다. 선조 25년 4월 28일 자신의 향리인 개곡리에서 전개된 전투에서는 동해안에서 동대산맥(東大山脈)의 ‘바디령재’를 넘어 온 30-40명의 왜병들을 절반이나 살육하고 격퇴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이 전투는 경주부의 의병과 왜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전투였다.


팔각원형의 기둥돌에는 위아래로 난간석을 두른 흔적이 보이는데 나무나 돌을

고정시켰던 장방형의 홈이 패어져 있다. 

 

이눌공은 또 1595년 2월 28일, 김득복(金得福) 등과 함께 지금의 괘릉리 소재 영지저수지 아래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을 한밤중에 저수지를 무너트려 수공으로 격파함으로써 '영지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왜군에게 시달리던 방어리 백성들을 구출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영지전투는 부산포에 상륙한 왜병들이 경상좌도를 따라 북상하다가 지금의 괘릉리 소재 영지저수지 둑 아래인 ‘영호’마을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이 정보를 입수한 천사장(天使將) 이눌(李訥), 격의장(激義將) 이여양, 분격장(奮擊將) 이언춘(李彦春 : 지금의 경주시 동천동 출신으로 경주이씨 판윤공파 후손) 등은 김득복군(金得福軍)과 합세하여 이를 섬멸하였다.

 

지난 1월 3일에 내렸던 눈이 얼마나 많이 퍼부었는지 한달이 지나도록 여즉 군데군데

눈이 채녹지 않고 있다. 삼명서원 입구이다.

 

불국사에 유진하면서 왜군의 격퇴를 숙의하던 김득복(金得福)과 이눌(李訥), 이언춘 등은 우선 김득상과 황희안 등을 파견하여 실상을 파악한 후 그날 밤 모든 의군을 불국사에서 ‘영호’마을 뒤 소나무 숲에 잠입시키고 그곳에서 3대로 나누어 매복하였다. 황희안을 분대장으로 하는 62명의 궁수들은 마을 건너 편 숲에 매복시키고, 삽을 든 40여명은 김득복(金得福)이 인솔하여 영지저수지 둑 안쪽에 은신하게 하였으며, 이눌공의 군대 100여명과 이언춘의 군대는 공격조로 편성하여 대기했다.

 

삼명서원 강당- 허튼 주초석 위에 팔각으로 다듬은 이중의 주초석을 얹었다. 

 

의병군은 5경쯤(새벽3시경) 되자 행동을 개시하여 남쪽(영지초등학교 통학로가 있던 쪽)과 북쪽(밀개가 있는 쪽으로 옛적 영지못 안과 신계리에 거주하던 영지초등학교 학생들이 통학하던 길)에서 못둑을 끊었다. 지금은 견고한 제방이지만, 당시에는 20여명의 장정이 삽으로 끊을 정도로 허술한 제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삽시간에 못둑이 터져 홍수가 덮치자 잠을 자던 왜병들은 급류에 휘말려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고, 사살자도 30여명에 달했다. ‘낙의재실기(樂義齋實紀)’ 등에 의하면 죽은 왜병이 만명이나 되었다고 하나, 증명이 되지는 않고 있다. 아무튼 이때의 승리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이 된다. 그러나 이 전투로 불국사의 목조건물들이 왜병들의 보복으로 전소되는 화를 당하기도 했다. 자신들을 소탕한 의병들의 본부가 불국사에 있었고, 불국사의 승려들이 의병에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이눌공의 위패를 모신 '상의사' 건물

계단의 끝 무렵에 소맷돌 구실을 하는 난간석이 두개 보인다.

 

현재 포항시 장기면 마현리에는 이눌공의 유허비가 있고,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삼명서원(三明書院)이 있다. 삼명서원은 지방 유림의 공의로 1553년(명종 8)에 낙의재(樂義齋) 이눌(李訥;1569∼159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1854년(철종 5)에 중수하였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보존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1968년에 보수하였다.

 

'약우이선생' 위패- 참배를 한 후 교각 위의 위패를 개(開)하니

묵은 위패가 아니라 조금은 실망스러웠지만...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강당·서재(전사청)·내문·외삼문·주소 등이 있는데, 서원의 배치는 전면에 강학 공간인 강당 있고, 후면에 제향 공간인 사우가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의 구조로 되어 있다. 사우인 3칸 규모의 상의사는 이눌 ‘약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9월 9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1,800여 평 등이 있다.

 

사우 내에 이상한 물건이 있어 금낙두선생님께 여쭈어 본즉...

 

여기에서 한 가지 유념하여야 할 것은 임진왜란 당시 포항지역, 경주 외동지역과 울산지역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와 백성들을 구출한 것은 정규의 훈련을 받은 관군들이 아니고, 위에서 말한 포항·경주 인근 출신 의병장들과 그 의병장들이 살던 동네에서 하인이랄 수도 없는 '종'들과 '백정', 순박한 무지렁이 서민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무로 만든 목기에는 마른(즉 건조한) 제수용품을 올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군들이 울산으로 침입하자 울산에 있던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밀양으로 도주하고, 예하 관군들조차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경주성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가토 키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제2번대가 1592년 4월 18일 부산에 상륙하여 하루가 지난 19일에 언양을 치고, 사흘이 지난 21일 경주로 진격했을 때 경주성에는 판관 박의장(朴毅長)과 장기현감 이수일 등이 거느린 관군이 있었으나, 일본군이 몰려오자 그대로 무너져 성을 버리고 도주해 버렸다. 관군들이 모두 도주하다보니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이 경상좌도를 따라 걸어서 올라왔는데도 3일만에 경주성까지 함락한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나무로 만든 목기에는 젖은 제수용품을 올린다는데...

정식 명칭은 잘모릅니다.

 

관군과 부자들은 모두 제 혼자 살겠다고 도망 가버리고, 도망갈 수도 없는 비천한 백성들은 수도 없이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고 짓밟히고 있으니, 보다 못한 의사들의 지휘 하에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종'들과 '백정'들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너무나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선조대왕은 전쟁이 끝난 후 도망간 좌수사 등을 잡아 처형하고, 의병에 참가한 자는 '백정'이라도 모두 포상하라고 어명을 하달하기도 했었다.                 (띠리한 촌 놈 고산자의 쉼터 참고) 

 

 

장기 현내들에서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용산 몸체 어깨죽지 쯤에

'용암' 이라 각자가 새겨진 곳에 조그만 감실이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장기향교의 성현 위패를 감실 속에 감추어 화를 면했다는 기념으로 

'훈도공이눌 성판권안유적'의 마애비입니다. 

 

여기서 50M 지척에 할매바위가 있고 할배, 할배의 첩 그리고 용의 전설이

서린 바위가 산재해 있어 재미있는 얘기가 존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