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비지정문화재

구룡포공원 공덕비의 이모저모

참땅 2010. 8. 20. 13:47

 

엄청 더바빠진 포항을 피해 달아난 구룡포는 파도에 밀려온 해풍으로

언제 더밨나 캐사며 비웃음인양 하얀 포말로 부서진다.

방파제에서 바라본 구룡포공원은 심상보통소학교(현 구룡포동부초교)와

도가와 야사브로의 송덕비를 감추고 속살을 내비추지 않는다.

 

지금의 홍보전시관 뒷골목으로 자드락길 오르막 길위에도 일제의 흔적을

찿을 수 있는데 여기는 속칭 빨간집으로 유명했던 집이다.

밤이면 5촉짜리 빨간전구가 춤추듯 매달려있던 곳인데,

고무줄 새총이 새삼 그리워지고픈 이 곳은

이까발이(오징어잡이) 서너달만에 육땅냄새 하 그리워,

술잔에 어리는 아리따운 여인네의 분내음에 현혹되어

밤이 가는지, 날이 새는지 그네의 하이얀 속살은

선풍기 바람 돈벼락에 나비처럼 술상 위를 날아 다녔었다. 

 

지금은 구6리 전 이장님 댁이 되었다.

 

리어카 한대도 겨우 다니던 이 좁아 터진 골목에 떡집도 있었고,

약국, 이발소, 미장원, 세탁소, 철물점도 있던 곳이었건만

저어기 두서너번째 집이 아마 가가 살던 곳이지 싶은데...

지금은 이렇게 반리모델링 한 집으로 인해 그 기억을 삼켜 버렸다.

 

나른한 오후의 한나절은 햇살 아래 숨을 고르고 있는데

스쳐가는 나그네만 바쁜척 숨이 가쁘다.

 

적산가옥 거리는 1층 개조, 2층 그냥

이 안골목에는 한때 잘살았던 사람들은 전부 돈 벌아가 좋은데로 이사 갔고

지금은 투기장으로 변해버린 것 같다.

 

계단 입구에 있는 이 적산가옥은 곧 포항시에서 매입하여

관광객들에게 개방하여 내부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랍니다.

 

얼마전 광광객 유치 홍보 차 계단을 싹 씻고 칠도 쫌 하고...

 

다시한번 송덕비를 짚어본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한 경술국치가 올 8월이면 100년을 맞는다. 당시를 거슬러 돌아보면 일본이 기를 쓰고 침략했던 곳은 바로 바다와 인접한 곳이었다.

이 가운데 불과 100여 년 전 원래 마을이 없던 곳이었지만 일본인들이 들어와 조성한 구룡포는 일제의 근대역사가 송두리째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국내 몇 안 되는 근대 흔적이 남아있다고 해서 포항시가 관광자원화에 나서고 있는 구룡포 일본가옥 거리.

이 거리가 있는 뒷산 언덕은 구룡포공원으로 불린다. 일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으로 오르는 67개의 계단 양편에는 현재 왼쪽으로 61개 오른쪽으로 59개 모두 120개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 비를 자세히 보면 앞면은 한국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뒷면은 시멘트 덧칠이 돼 있다.

1944년 이 돌기둥에는 구룡포항을 조성하는 데 일조한 구룡포 이주 원조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하지만 광복으로 일본인들이 쫓겨 가고 몇 년이 흐른 뒤 돌기둥의 비문은 시멘트로 감춰진다.

그 뒤 1960년 구룡포 주민들은 이 나라를 위해 산화한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봉안할 충혼각을 건립하게 된다.

충혼각을 세우는 과정에 도움을 준 후원자들의 이름이 다시 앞뒤를 돌려 세운 돌기둥에 각인됐고 현재에 이르게 됐다.


최근에는 당시 시멘트 덧칠을 두고 구룡포 주민들의 항일 또는 반일 흔적이라면서 해석을 지나치게 확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시멘트로 덮혀 있는 일본인 도가와 야스브로(十河 彌三郞)의 공덕비도 마찬가지로 반일흔적의 상징처럼 해석해 왔다.

당시 시멘트 덧칠은 대한청년단이 주도했다. 그러나 구룡포 대한청년단은 해방 후 좌우익이 충돌하던 어수선한 분위기에 편승해 권력을 차지한 무소불위의 세력이었다.

증언에 따르면 그들에게 밉보이는 사람들은 지금의 호미곶면 구만리 앞바다와 장기면 모포리 앞바다에서 몸에 돌을 달아 수장됐다고 한다.

법보다 주먹이 먼저이던 시대에 얼마나 악행을 일삼던 세력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도 이들을 반일투사로 보거나 일본에 분노하고 항거한 사람들로 과장한다면 진짜 항일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할까?

그들의 목적은 반일이 아니라 권력획득이었는데도 그들의 행동을 항일에만 초점을 맞춰야만 할까?

그런데 최근에야 남아 있는 120개의 돌기둥 가운데 시멘트로 발라지지 않고 당당히 서있는 돌기둥 하나가 발견됐다.

그것도 바로 구룡포공원에 우뚝 서 있는 일본인 공덕비의 주인공인 도가와 야스브로(十河 彌三郞)의 이름이 새겨진 비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당시 모두 130여개가 넘었다고 하는 돌기둥의 일본인 이름이 모두 시멘트로 덮였는데 유독 도가와 야스브로(十河 彌三郞)의 돌기둥만 온전한 이유는 뭘까?

그러면 해방 후 반일과 항거로 저질렀다고 하는 시멘트 칠이 도가와(十河) 송덕비와는 달리 도가와(十河)의 돌기둥은 왜 훼손이 안됐느냐에 대한 답은 무얼까?

한일병합 100주년, 호국의 달을 맞아 필자는 가슴에 한을 묻고 사라진 순국열사들을 생각하면서 시멘트 덧칠만 했던 항일에 부끄러워 머리를 들 수 없다.

                                                                                            (K뉴스에서 발췌)

 

이기 문제의 계단 난간에 서 있는 도가와 야사브로의 비입니다.

양쪽으로 시멘트가 덧씌워진 비가 있고  현재 120개의 비중에

유일하게 시멘트가 덧씌원진 흔적이 없습니다.

 

도가와 야사브로의 이름이 맞나요?

 

요건 얼마전에 구룡포 모씨가 대체 언제 일본인 비가 만들어졌나 궁금해가

덧씌원진 시맨트를 걷어낸 흔적입니다.

 

몇 십년  전만 하더라도 구룡포에 극장이 있었는데...

 

일본 신사 앞에 세워졌던 시멘트 토리이가 파손된 채 땅바닥에 반쯤 묻혀

지나다니는 관광객의 발에 밟혀 신음하고 있습니다. 

 

눈살미가 좋은신 분은 시멘트가 씌위진 끝부분에 글자체가 어렴풋이 보일겝니다.

윗부분에 3글자, 그 아래로 3글자 해서 6자가 있는데,     

 

길게 아래로는 글자가를 새기지 않았답니다.

 

웃기는건 도가와 야사브로가 생전에 이 비 앞에서 사진을 찍은게 최근 발굴되었다네요.

 

 

이비는 구룡포방파제 입구에 있습니다.

우편에 글자를 갈아뭉갠 흔적이 보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