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암각화

바위문화의 흔적을 찾아- 1

참땅 2010. 5. 6. 11:59

어느 날 부턴가 우리 집의 어린이날 행사는 부친의 묘소에 들르는 것으로 시작을

하였는데 애들이 두세 살부터 시작하여 지금껏 이어오고 있으며 오늘도 예외는

아닙니다. 

묘소에 들러 잠깐의 참배 후 오늘은 경주 양북으로 바위구멍을 찾아보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동해면 염장마을 할매돌

 

신정1리 염장마을에 있는 것으로 할매 짝지돌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도구리 동해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할배 짝지돌과 같은 선돌입니다.


동네 할머니①:그걸 말라꼬 찍는교?

저: 아, 예 귀경 왔니더

동네 할머니②: 그거 파 갈라꼬 그라능교?

동네 할머니①: 저거를 판다꼬 우에 싣고 가것누...

동네 할머니③: 저 차 보이 싣지도 몬 하겠구마는...

 

♣ 선돌: 길쭉한 돌을 그대로 또는 약간 손질하여 세운 사람의 의지가 깃들인 돌기둥.

입석(立石 menhir)이라고도 한다. 고인돌과 더불어 대표적인 바위문화[巨石文化]에

속한다. 고인돌에 비교하여 볼 때 우리나라에는 많이 분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선돌 자체가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조사가 활발하지 않았던 데 그 원인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근대화 과정에서 간간이 그 문화전승이 파괴·단절되면서 없어진

것이 많다. 분포지역은 함경도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이며, 우리와는 축조양

태가 다르지만 프랑스의 브르타뉴를 비롯한 서부 유럽과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데 고인돌과 거의 같은 분포권을 보이는 점이

주목된다.

                                                                                                 - 사전적 의미

 

금광저수지 공원에 있는 영세불망비

 

조선 순조 때(1820년)에 만든 김정희 영세불망비가 있는데 이는 금광저수지를 만든

김정희(金正橲)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랍니다.

근데 우리가 알고 있는 추사 김정희도 순조시대 인물이고, 여기 이 비의 주인공도

순조 때 사람이라 쫌 헷갈립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년~1856년)는 1819년 식년시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암행

어사를 지낸 적이 있다는데 혹 그 당시에 이 지역을 다녀가셨을까?

이 비는 자연석바위에 비문을 새긴 앞면을 가공하여 선각으로 사각의 틀을 만들고 그

안에 비문을 새겼는데, 양 옆과 뒷면은 자연 그대로 놔둔 채 가공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금광저수지에는 한때 황소개구리가 집단적으로 서식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월남전

에 참전했던 한 군인이 월남에서 귀국할 때 들여와 오천부대 내에서 키우다가 홍수로

말미암아 그 중 몇 마리가 이 저수지에 밀려들어오면서 이후부터 이 저수지에 서식하게

되었는데, 지 기억으로 황소개구리를 잡으려고 사냥총을 들고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개구리를 사냥총으로... 참말로 웃기는 얘기지만 서글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적 제31호로 지정된 감은사터에 국보 제112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2기에도

바위구멍이 약 900 개가 있습니다.

동탑의 경우 1층 기단에 160여개, 2층 기단에 130여개가 있으며

서탑의 경우 1층 기단에 150여개, 2층 기단에는 무려 430여개가 있습니다. 

바위구멍 유적이 인공의 유적에서 발견된 경우는 많으나 감은사터 석탑처럼 확실한

불적에 새겨진 예는 그리 흔한 편이 아닙니다.

 

 

 

 

 

더욱이 신라의 석탑 중 양식과 규모면에서 최고, 최대에 속하는 감은사삼층석탑 기단부

에 이처럼 많은 구멍이 새겨져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일뿐더러, 바위구멍의 수에

있어서도 지금껏 발견된 것 중에 가장 많다는 특징 또한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탑에 바위구멍이 새겨진 것은 탑이 불사리, 불경, 불상 등을 안치하며 불가숭

배의 대상이기도 하거니와, 탑돌이 행사에서 볼 수 있듯이 간절한 소망을 기원하는 중요

한 기도처였으며, 불상에서 그렇게 하였듯이 접촉하거나 석탑의 일부를 갈아서 취함으

로 영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러한 바위구멍들이 계속적으로 이어져 형성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간혹 이렇게 시멘트로 바위구멍을 메워버린 것도 있습니다.

 

감은사터 한쪽 구석에 모아놓은 석물을 살피다가 눈에 띄여 소개합니다.

한때 노반에 사용되어지다가 지금은 이렇게 땅에 내려와 편안히 쉬고 있네요.

 

일제시대의 잔존인 ‘고적 제47호 감은사지’ - 의외로 비가 변색 없이 깨끗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