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기념공원 산 정상에 있는 흥해송라도중관해도 시비
[興海松羅途中觀海濤]흥해ㆍ송라 길에 바다의 파도를 보며- 석재 박효수(朴孝修)
세찬 바람 갑자기 일어 바다를 뒤집으니 / 颶風欻起飜滄溟
하늘과 물이 서로 붙어 캄캄해지다 / 天水相兼晦且冥
만 송이 은산은 낮아졌다 다시 일어서고 / 銀山萬朶低復屹
백 가지 천 가지 우레 북은 한 소리로 어울린다 / 百千雷鼓同一聲
부상 떠나갈 듯 지축이 흔들려 / 扶 桑將漂地軸動
용왕은 궁전이 무너질까 걱정이리 / 龍王坐愁宮殿傾
파신이 흩어지고 수족이 어지러워지니 / 波臣搖蕩水族亂
이는 누구의 소위냐 곤어와 고래일테다 / 誰之所爲鯤與鯨
어떻게 해서 나의 의천검 뽑아 / 安得杖我倚天劍
한 번 휘둘러 그 비늘을 눈처럼 찍으랴 / 一揮鱗甲雪碎輕
동해 바다 바로 비단결 같이 고와져 / 直敎東海淨如練
다시 태양을 받아 청명해지며 / 復瞻白日涵淸明
이무기ㆍ용ㆍ새우ㆍ게 그 생리를 즐기노라 / 蛟螭蝦蠏樂得所
임의 성스러운 덕택 속에 놀아 헤엄치게 할꼬 / 游泳聖澤之泠泠
포항시는 22일 흥해와 송라를 최초로 표현한 작품으로 영일만의 풍광을 노래한 한시
흥해송라도중관해도(興海松蘿途中觀海濤) 시비를 흥해읍 오도리 사방기념공원 관해루 옆에 건립해 지역의 해안 풍경을 알리는 중요한 관광자원화 하기로 했다.
석재 박효수(石齋 朴孝修)는 약 칠백여 년 전 고려 말의 문신이며 시인으로, 흥해송라도중관해도(興海松蘿途中觀海濤)는 박효수공이 직접 이곳을 지나다가 영일만의 풍광에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읊은 한시이다.
동문선 제7집에 수록된 이번 한시에는 영일만을 물이 맑고 깨끗해 아침 해가 떠오르면 바다와 하늘 구름과 파도가 함께 어우러져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무아지경에 이르며 울창한 송림과 반짝이는 백사장, 은빛 파도, 떼 지어 나르는 갈매기와 바다 속을 노니는 고기떼가 한 폭의 그림이 된다고 묘사했다.
사방공원 산 정상의 관해루
♣ 백률사 서루에 대한 정경도 있다- 몽고란으로 불탄 뒤의 형편을 읊은 것.
내 걸음이 좋은 때를 만나서
봄 산에 들리는 것 두견새 소리.
푸른 솔 그늘에서 길 비켜라 외치고
종을 쳐서 구름 절 문 열었네.
보타락가산(관음보살이 거처한다는 산) 올랐는 듯, 보배 구슬이 은하수에 솟은 듯,
갖가지 꽃 철마다 피어 향기롭기 언제나 화창한 봄,
있는 스님 오직 둘 셋, 누구가 향화의 주인인고.
서루에 올라 바라보니, 처마와 도리 날고 춤추는 듯,
남으로 탁 트여 반듯한 거리마다 집들이 늘어섰네.
문물이 옛 신라 땅이라 황금 절집이 사람 집과 섞여, 세는 중 열에 아홉이네.
성스러운 자취 범상한 발자취와 섞여, 길손이 다투어 구경하네.
제일가는 저택, 구슬로 된 궁궐들, 난리(몽고병란) 뒤에 돌밭으로 되었네.
마루에 백의관음 있어 신묘한 조화 둘도 짝이 없어
거문고와 만파식적 구름에 떠온 지난 일이 벽 뒤에 벌렸도다.
병란을 겁내어 예 와서 빌자 전쟁이 곧 감추어져
예 와서 빌자 어리석고 노둔한 데 총명을 주어 마음의 소원대로 응해.
넓은 문 막히지 않아 시원시원한 단 이슬 많아
뿌려진 다음 번열의 고뇌 가시어.
내 피로서 기름지어 이 몸으로 믿음의 향불 되어
다만 원하옵기 우리 임금 만복을 누리시어 삼한이 태평으로 향해
행운을 타고 비운은 털어,
만방에서 어린애처럼 연모하여 와 우러러 젖 빨듯이
억세나 약하나 먹히고 뱉아짐이 없이 자연스레 좋은 시대 열려
세상이 복희씨 옛날로 돌아가도록 하소서….
이를 생각하며 밤 깊이 앉았으니 달이 마루 한가운데 오르도다.
속리산에 관한 시조
높다란 사면 푸른 연꽃일세
긴 사허리 신령스런 구름 몇 겹인가
문장대는 천고의 이끼로 봉하고
만구루 소나무 그늘에 우타굴 있으며
용이 탑 속으로 돌아가니 진골이 남았네
나귀가 바위 악에 누웠으니 성스러운 자취를 묻도다
삼한을 길이 복되게 할 주인 그 누구인가
산호전 위의 부처님일세
박효수(朴孝修) 미상∼1377년(충숙왕 복위 6).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호는 석재(石齋).
1317년(충숙왕 4)부터 고시관(考試官)을 지냈으며 1321년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원나라에 상서(上書)하여 상왕(上王: 충선왕)을 환국하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평소에 지조가 있고 청렴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관직이 대언에 이르렀고, 충선왕과 친교가 있다 하여 충숙왕으로부터 불신을 받던 윤신걸(尹莘傑)에 대신하여 시관으로서 선비를 뽑아 학사연(學士宴)을 베푸니, 왕은 그 비용으로 은병(銀甁) 50개와 쌀 100석을 사(賜)하고 그를 연창군(延昌君)으로 봉하였다.(시험관-익제와 동 지공거)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6년, 1531)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 >경상도 慶尙道 [3] >동래현 東萊縣
○ 동래 온천을 노래한 박효수(朴孝修)의 시
골짜기 깊숙한 곳 돌못[石塘]이 펼쳐 있어,
맑게 흔들리는 물 가득히 괴어 있네.
허리에 닿을 정도 겨우 2자 깊이지만,
따스한 연기 같고 안개 같은 것 그 주위에 김 오른다.
아름다운 촛불이며 분홍빛 등불이 물 밑을 비추고 있을 때,
향내 어린 소매 걷고 부축해 욕탕에 들어갔다.
고운 손 자주 놀려 늙은이 등을 닦아 줌은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때 낀 살갗이 상설(霜雪)같이 녹아내린다.
마고(麻姑)가 가려운 데 긁어 주듯 상쾌하고,
더운 땀 얼굴에 나서 맑은 물 흘러내린다.
목욕을 마치고는 서서히 흰 모시로 닦고,
머리를 말린 다음 침상에 쓸어지 듯 누웠다.
몸은 가볍고 뼛속까지 시원하여 골수를 바꾼 듯하니,
표표(飄飄)히 나는 학(鶴)의 비상(飛翔) 무엇이 부러울까.
이 몸과 이 세상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달게 한잠 자니,
황홀하게 꿈속에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에 노는 듯하구나.
깬 뒤에는 다시 나그네의 몸으로 되돌아가,
역마의 먼지가 옷을 더럽힐 것이라네.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6년, 1531) > 제21권 > 慶尙道 [1] >경주부 慶州府
백률사(柏栗寺) : 금강산(金剛山)에 있다. 전단나무로 조각한 불상이 있다.
용암사지: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219번지
이반성면 우체국에서 용암리로 들어서다 제실 앞쪽에 형성된 곡부를 따라 오르면 보인다. 용암사지에 관한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다. 폐허지 위에 흩어져 있던 부조 및 석불좌상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옛 사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사찰이 건립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말 연기(烟起) 도선(道詵, 827~898)이 성모천왕(聖母天王)으로부터 비밀리에 부촉을 받고 선암(仙巖), 운암(雲巖), 용암(龍巖)의 세 사찰을 창건했다고 하는데, 용암사는 이 사찰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용암사지는 용암사가 있었던 터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암사는 고려시대 1314년(충숙왕 1) 무외(無畏) 국통 정오(丁午)가 온 이후로 크게 중창되기 시작했다. 1315년 충숙왕은 제찰사 한중희 등에게 전지를 내려 사찰을 경영하게 하였고, 1316년 가을에는 제찰사 박효수에게 사찰을 중창하게 함에 따라 1318년 80여 칸을 새로 짓고 20여 칸을 중수했다. 당시 전당 안에는 닥나무 종이를 바르고 왕골을 깔았다고 하며, 금당에는 석가여래상을 봉안했다고 한다.
또한 정오가 저축한 돈과 모금한 것으로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상을 도금했으며, 대장경도 봉안했다. 당시 염장별감 이백겸과 방우정은 왕명에 따라 설전지 3만여 장과 옻칠한 함상자 140여 개를 만들었으며, 정오의 제자 승숙, 일생 등은 강화도 판당에 가서 부족한 장경을 찍어와 신본과 구본을 합해 모두 600여 함을 만들어 비단으로 치장한 뒤 새 전당에 봉안했다. 이 해 11월 18일 방우정이 다시 왕명을 받아 7일 동안 낙성법회를 성대하게 베풀었다. 용암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용암사지에는 해주 정씨들이 세운 화덕재가 있으며, 건물 뒤편으로 용암사지 부도(보물 제372호)를 비롯하여 용암사지 석불(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 석등, 석비 등이 산재해 있다. 이들 석조물 주변으로 와편과 자기편이 지표에서 확인되었다. 용암사지 내에는 건물의 부재로 추정되는 치석된 석재들이 기단, 담장 등에 사용되고 있다.
용암사지에는 고려시대 부도를 비롯하여 석불, 석등, 석비 등이 산재해 있어 불교미술사적으로 진주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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