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비지정문화재

포항 흥해민속박물관의 충비갑련지비

참땅 2009. 11. 9. 10:47

노비

보통 '종'이라 불렀는데, 노(奴)는 남자종, 비(婢)는 여자종을 말한다.

조선시대 노비는 소유자가 국가기관이나 왕실 또는 개인 인지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는데 공노비의 경우 그들의 상전에 대한 의무부담이 노역인지 현물인지에

따라 선상노비와 납공노비의 2가지로 구분된다.

선상이라 함은 일정한 기간 동안 중앙 또는 지방의 관아에 신역을 제공하는 것이며,

납공이라 함은 신공으로서 면포 등을 상납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된다.

솔거노비는 상전 가족의 일원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독자적인 재화 축적의 기회나

행동의 제한을 받았으며, 대부분 하인으로서 각종 사역 및 경작에 동원되었다.

또한 다른 동산처럼 소유의 객체인 '물'로 인정되어, 인격과 몸까지 모두 상전의

소유물이 되었다.


외거노비는 상전으로부터 독립된 가호와 가계를 유지하면서 행동의 제한을 크게 받지 않는 등 그 예속도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대신 이들은 상전에게 매년 신공을 바쳐야 했는데, 상전 또는 타인의 토지를 경작하여 소작료를 제외한 생산물의 일부를 소유하고 독자적인 가계의 경리를 유지했기 때문에 양인 전호농민과 그 처지가 유사했다.

                                            -이상 노비에 관한 사전적 지식(吳永敎 편)입니다.

 

 

포항에는 ‘忠婢’ 즉 여자종을 기리는 비가 3기나 있습니다.

포항 곡강의 충비순량지비(忠婢順良殉節之淵), 광남서원의 충비단량지비

그리고 지금 소개하고자하는 충비갑련지비 입니다.


원래 이비는 포항시 용흥동 산 41-3번지 연화재 중턱 오른편 길가 부근 지역에

있었으나, 포항-대구 간 고속국도 진입 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지금은 흥해 민속박물관 야외 전시장 비석군 맨 끝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관찰사, 현감, 군수님들의 거사비니 불망비니 하다가 갑자기 앞면에 큼지막하게

忠婢甲連之碑’ 라고 새겨진 초라한 비 하나가 떡하니 나타나는데

이비가 바로 그것입니다.

 

 

“생명을 버리고 대의를 취하며 몸을 죽이고 명분을 이룸은 군자의 일이다.

그러나 대의를 알아야 생명을 버리고 명분을 알아야 몸을 죽이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대의와 명분을 알지 못하고도 능히 그 생명을 버리고 그 몸을 죽이는 자는

진실로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타고난 떳떳한 본성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임금님(순조) 즉위한 지 29년 되는 기축(1829)년에 내가 영남의 안절사로 나간 다음해였다.

남쪽의 연일현에 송씨 성을 가진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는 여관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런데 그 연약함을 업신여기고 그 여관업을 탈취하고 심히 능욕하는 자가 있었다.

과부의 힘이 그자에 상대가 되지 않아서 과부가 분하게 여기고 그자를 꾸짖으며 형산강에 뛰어들었다. 과부에게 갑련이라는 몸종이 있는데 나이가 24세였다.

주인 과부를 뒤쫓아 가며 크게 소리치며 말하기를

“주인마님이 죽는데 내 어찌 혼자 살려고 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물에 들어가 그 주인을 잡아당기고 끌어올려서 물위로 떠올라 물에서 나오게 하였다.

뱃사람 여럿이 과부를 강가에 다다르게 하였다. 그래서 과부는 죽지 않았다.

그러나 갑련은 파도에 떠밀려 배 밑창으로 쓸려 들어가 한참만에야 건져내었지만 이미 죽어 있었다. 당시 이웃마을과 사방 배 위의 행상(行商, 도붓장수)들로 이 일을 보았던 자는 서로 끌어당기며 연일현 관아로 달려가 고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현에서는 성(省, 경상감영)에 보고하였는데 내가 그 일을 듣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대의와 명분을 모르면서 능히 생명을 버리고 몸을 죽인 것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그 사실을 갖추어 조정에 보고를 하니 임금님께서 그 충성을 아름다이 여기고 그 일을 표창하라고 명하셨다. 고을 사람들이 임금님의 명을 중히 여기고 재물을 내어 빗돌을 세워 그 일을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며 나에게 기록을 구하였다.


슬프다! 명분이야 진실로 갑련이가 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찌 그 구한 바가 아니었다는 것으로 하여 그 명분을 드러내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미 그 일을 가지고 현창하였으니 내 어찌 사양 하리오?

그 일을 기념하여 썩지 않게 하리니,  마침내 이 일을 비명으로 이렇게 노래한다.


하늘이 너를 이룰 때 홀로 살게 하지 않았으니,

어찌 너로 하여금 홀로 죽게 하리오?

죽었지만 그 마을에 정표하고 그 물가에 빗돌을 세웠으니,

빗돌을 만지거들랑 살아있는 충비인 듯 여길지라.


가선대부 행경상도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대구도호부 겸 순찰사 박기수 짓고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홍문관제학 이면승 머리글자 쓰다.“

 

 

비문 내용 중에서 ‘남쪽의 연일현’ 이라함은 지금의 중명리, 국당리, 부조지역을

말합니다.

그 당시 조선 시대 전국 5대 시장에 속하는 부조시장이 형성되었던

그래서 여관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주인 과부 송씨에게 갑련이라는 여자종이

있었는데, 갑련이가 주인 송씨를 살리고 자기는 순절(?)한 그 충성심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다는 얘기입니다.


포항지역에 세워진 이 3기의 비석들은 거의 1800년대에 건립된 것입니다.

여기서 지는 두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조선 후기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노예들의 신분상승을 국가차원에서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획책으로 최하층 신분인 노비에게 상(비석 건립)을 내렸다는 것과 

둘째는 개인 사노비 중에서도 솔거노비인 갑련이가 주인을 위해 자기 몸을

희생했다는 것은 주인과 종의 신분제를 떠나 끈끈한 정이 없으면 불가능 했을 것이란 것입니다.

물론 주인 송씨가 과부여서 특히나 그 정은 더욱 더 돈독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자기를 희생하면서 주인을 구한 갑련.

애가 있으면서도 주인 아씨를 따라 같이 순절한 순량.

죽을 목숨으로 주인 손자를 구해 한 가문을 회생시킨 단량.   


이 얘기는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