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금곡리 삼효각
금산서원
아늑하고 포근한 속곳에 금산서원이 그리고 그 들목에 염호선생유허비/각이 있고
맞붙어 오늘 찾아 볼 삼효각이 보인다.
금산서원은 1707년(숙종 33)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허진수(許進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897년 강당을 건립하였고 1906년 동재 및 문을 건립하였으며
1926년에 사우를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하정(下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3,000여평, 임야 10정보, 대지 400평 등이 있다.
올 때마다 잠겨져 잇어 그 내부를 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은 혹시...
三孝閣
효자 허기(許琦)와 허기의 며느리 곡강최씨(曲江崔氏), 월성최씨(月城崔氏)
세 사람의 효성을 표창한 정려각으로 효자비, 효열여비, 효부비를
조선 순조10년(1810년)에 예조에서 임금에게 고하여 사림(士林)과
김해허씨(金海許氏) 문중에서 세웠다.
삼효각
임신중춘일 - 임신년 한창 봄인 날
뿔과 아래 위 어금니를 드러낸 청룡
중앙의 허기를 중심으로 좌 월성 최씨, 우 곡강 최씨 비가 보인다.
효자근위장군행룡양위부호군김해허기지려
숭정기원후사경오
당우십일년하한
명정삼려
효자 근위장군행룡양위부호군김해허공정려비
효자 허기는 어려서 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에서 칭송이 많았으며
18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묘 옆에 움막을 치고 기거하며 3년간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으며, 홀로 된 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셨다.
어린나이에 상을 당해 부친의 묘를 좋은 곳에 정하지 못했음을 한탄하다가
뒤늦게 명당으로 이장하여 제사를 드릴 때 따라 놓은 술잔이 모두 말라
없어 졌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비좌에 옆드린 연꽃문양을 새겼다.
효부장자식처곡강최씨지려
효열부곡강최씨정려비
허기에게는 허식(許湜)과 허온(許溫) 두 아들이 있었는데 허식은 장가간 지
8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처 곡강최씨는 남편이 죽은 후 시어머니가 병들어
자리에 눕자 옷도 벗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항상 시어머니 곁을 지키며 극진하게
간호하였고,
효부차자온처월성최씨지려
효부월성최씨정려비
허온의 처 월성최씨 역시 시아버지 허기가 병들어 눕자 직접 변을
받아내며 병의 상태를 점검하면서 정성으로 보살폈다 전한다.
삼효각 내의 현판
<순조 왕을 감동시킨 허기(許琦)와 그 두 며느리의 효행>
장기 금곡리에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한 허기(許琦)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나이 18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묘소 옆에 움막을 치고 기거를 하며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고, 어머니에게도 예를 다하고 공손하게 대하여
자식의 도리를 다 해 왔다.
그는 나이가 어려 상을 당했던 관계로 묘 터를 잘 골라 쓰지 못하였던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뒤늦게 좋은 명당 터를 찾아 이장을 한 다음 제사를
드렸더니 이상하게도 술잔에 부어두었던 술 3잔이 모두 말라 없어지는 게 아닌가?
이를 이상하게 여기던 차에 아버지 제삿날 제사를 지내고 고개를 돌아보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시와 똑 같이 제상에 앉아 있어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놀란 일이 있었다 한다.
허기에게는 허식(許湜)과 허온(許溫)이란 두 아들이 있었다.
허식은 장가 간지 8년 만에 불행하게도 세상을 떴다.
허식의 처 곡강 최씨(曲江 崔氏)는 남편이 죽자 3년 동안 머리를 빗지 않고
시어머니에게 정성을 다 했다. 시어머니가 이질에 걸려 한 달이 넘도록 자리에
눕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옷도 벗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변을 손수 받아 처리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시어머니의 추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허온의 처인 월성최씨(月城 崔氏) 역시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허씨 가문에
시집 온 뒤에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하더니 시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직접 변을 받아내기도 하고, 또 변의 맛을 보아가면서까지 병환의
상태를 점검하면서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해 왔다.
어느 해 겨울, 찬바람이 불고 눈이 하얗게 쌓인 날이었다.
시아버지가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최씨는 무작정 길을 나섰으나
고기를 팔러 다니는 상인이 없어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홀연 듯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와 도로변에 앉았다. 최씨가 쫓아가서 손으로 잡아 그것으로
시아버지의 저녁 반찬을 해드린 일이 있었다.
이런 허기와 그 두 며느리의 효행은 금방 고을전체에 퍼졌다.
이에 조선 순조 때 도내의 유림(儒林)들이 연명하여 경상감사와 예조에 장계를
올렸더니 왕께서도 감명을 받고 정려각(旌閭閣)을 내렸다.
장기 금곡리에 현재도 남아 있는 삼효각(三孝閣)은 이런 경위로 조선 순조 10년에 세워진 것이다.
《순조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순조 10년(서기 1810) 9월 3일에 효자로 장기(長鬐)의 고(故 )사인(士人)
허기(許琦)에게 마을에서 정문(旌門)을 세워주라고 명하고,
허기의 두 며느리 최씨에게는 효행으로 급복(給復:넉넉하게 선물을 내림)하였다.
예조에서 유생의 건의로 인하여 청하였기 때문이다.』
향 우에서 좌로 쓰는게 맞는 것 같은데, 향 좌에서 우로 씌어져 있다.
한글쓰기형...
염호 허선생 유허비각 현판
염호허선생유허비
배향인물: 허진수(許進壽)
자는 사서(士瑞), 호는 염호(廉湖), 본관은 김해(金海),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천품이 온화하고 재기가 뛰어난 영재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도산서원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선조7년(1574년) 나라에서
그의 학행을 가상히 여겨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내렸으며,
만년에는 고향에서 정자를 짓고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금곡리라는 지명은 조선조 중엽 명종 때의 선비 염호 許進壽라는 분이 이 동네에
기거하면서 청풍을 즐기며 동해의 일출과 더불어 거문고를 탔다고 하여 거문고
금(琴)자를 따서 琴日이라 하였고, 上.中.下琴과 용암을 합하여 금곡리라 하였다.
- 김해허씨 대종회 참고
'포항 > 비지정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효자각에 솔개와 호랑이가 나투었네요. (0) | 2018.04.16 |
---|---|
망주석 세호에 새(鳥) 장식 (0) | 2018.04.03 |
오천은 포은선생의 고향 아닌 관향 (0) | 2017.07.14 |
포은선생을 소환하다 - 왜곡의 현장 (0) | 2017.07.14 |
오어사 가는 길 (0) | 2017.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