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道不遠人 人遠道 山非俗離 俗離 - 최치원 詩
보은의 얼굴로 일컬어지는 법주사는 속리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처음으로 창건하였으며, 절의 이름은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창건 이래로 여러 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쳤다.
신라 성덕왕 19년(720)과 혜공왕 12년(776)에 중창하였는데 이때부터 대찰의 규모를 갖추기 시작하였고, 고려에 들어서도 그 사세를 이어 홍건적의 침입 때는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왔다가 환궁하는 길에 들르기도 하였고 조선 태조는 즉위하기 전 백일기도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병에 걸렸던 세조는 딸린 암자인 복천암에서 사흘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정유재란 때 충청도 지방 승병의 본거지였다 하여 왜군들의 방화로 모조리 불에 타버렸으며 그 후 사명대사가 대대적인 중건을 시작하여 인조4년(1626)까지 중창이 마무리 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전 법주사 가람배치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화엄신앙측과 용화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축이 팔상전에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었으나 1990년 높이가 33미터에 이르는 청동 미륵불을 조성하면서 그 배치가 흩어져 버렸다.
♣ 일주문 湖西第一伽藍 벽하 조주승
俗離山大法住寺 광무6년임인년4월중건 - 고종6년 1902년
553년(신라 진흥왕)→776년(신라 혜공왕)→1624년(조선 인조)
근역서화징에 나오는 碧下 趙周昇
석정의 제자 중 가장 알려진 인물로는 벽하 조주승(1854-1903)을 들 수 있다.
벽하의 비조는 고려 대장 벽성군 증(贈) 좌정승 연벽(連璧)이다.
벽성(碧城)은 사실 김제의 옛 이름으로, 후손들이 벽성(김제)과 여러 이웃 고을에 널리 이주하여 살았다. 증조부인 필록과 조부인 동현은 모두 벼슬을 하였으며,
부친 하섭은 승훈랑을 하면서 일을 잘 처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벽하는 어려서부터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그의 부친이 수많은 종이를 사서 그에게 글씨를 쓰도록 하였다. 장성해서는 서예를 더욱 좋아하여 항상 임서(臨書:필첩을 보고 형태를 모방하는 것)를 하느라 거의 침식을 거를 정도였다. 부친은 벽하가 병이 들어 집안일을 보살피는 데 방해될까 염려하여 두 차례나 벼루를 불태웠지만, 끝내 글씨 공부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벽하는 대체로 30~40년 동안 해서와 행서의 임서 공부를 하였는데, 주로 왕대령의 ‘낙신부’와 안노공의 ‘가묘비’에서 더욱 그 절묘한 경지를 얻었다. 공은 일찍부터 석정 이정직에게 사사 받았지만 그 조예와 윤색(潤色)에 있어서는 스승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벽하가 운명하자 평소에 알고 지내던 매천(梅泉) 황현(黃玹:1885-1910)은 ‘곡조벽하(哭趙碧下)’라는 시를 지었는데, 명필들을 거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읊조리고 있다.
“송송재후이창암, 정족참차벽하삼, 논정천추동필원, 미응적막아호남(宋松齋後李蒼巖, 鼎足參差碧下三, 論定千秋東筆苑, 未應寂寞我湖南: 송재 송일중과
후의 창암 이삼만, 벽하 조주승이 끼어 정족을 이루며, 천년 조선의 서단을 논정하니, 우리 호남의 서단은 적막하지 않네.)”라고 하였다. 즉 황현은
송일중과 이창암을 조선의 국필로 인정하였고, 조벽하가 뒤를 이어 호남의 서맥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작품으로는 속리산 ‘법주사 일주문’과 전주 ‘추천대’, 남고산성의 ‘관성묘(전주교대 뒤편)’, 지리산 실상사의 ‘백장암’ 현액 등이 있다. 특히 이상한 일은 ‘관성묘’ 편액을 쓰고 관우가 나타나 데려간다는 현몽 3일 만인 고종 계묘(1903) 6월 14일(50세)에 인생을 마쳤다는 것이다. 벽하가 일찍 죽었는데 좀 더 살았다면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앞선다. 묘소는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옥녀봉 아래 갑좌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벽하의 아들 심농 조기석은 원래 김제에 살았는데, 일제시대에 창씨개명과 일본인들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 완주군 구이면 와동 마을로 이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여기서 조기석은 벽하의 서법과 화법을 계승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묵죽에 뛰어난 벽하
벽하는 석정에게 10년 동안 文‧詩‧書‧蘭‧竹을 그리는 법과, 시조, 거문고 등 일곱 가지 예능을 수련하였다. 즉 벽하는 해서와 행서의 기초를 튼튼히 다졌으며, 사군자의 기본도 충실히 연마했다. 또 진(晉),당(唐),송(宋) 및 여러 시대의 글씨를 보고 한 점 한 획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사군자 또한 그 기본기를 충실히 하여 명성을 떨쳤다. 특히 대나무를 그리는 솜씨는 매우 뛰어나 자하 신위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세간의 평이 있었다. 詩唱과 彈琴에 있어서도 樂工에 비견할 만큼 놀라운 경지에 들었으며, 세상 사람들은 그의 예능을 四節이라 칭했다.
석정의 제자 중에서 대나무로 뛰어난 사람으로 벽하와 유제 송기면을 들 수 있다. 유재의 대나무도 나름대로 특색이 있지만 벽하의 대나무는 필획이 거칠어서 마치 바람결에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 있다.
대원군이 벽하의 난과 대를 보고 ‘창난벽죽(倉蘭碧竹)’이라 칭송한 것을 보면 그의 솜씨가 매우 뛰어났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위창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에서 평하기를 “벽하는 글씨 공부한지 삼십여 년에 글자는 안노공(안진경:중국 중당 때의 사람으로 충신임)을 배웠고 또 대나무를 잘 그렸다”고 호평하였다. 대나무를 잘 그리려면 수많은 세월동안 공부하여야 하지만, 벽하는 많은 세월을 보내면서 틈만 나면 산천을 유람하였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일찍이 중국의 북경과 남경에서 3년을 유람하는 동안 이름난 학자들과 어울리고, 글씨와 그림의 대가들과 교류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중국 답사기간에 가지고 온 귀중한 서화와 자료는, 본인과 후학들이 공부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갑오동란으로 완산 청석교에 살 때 병화(兵火)를 입어 집이 완전 소실되었다. 어쨌든 벽하는 중국답사와 석정의 가르침이 글씨와 그림을 그리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어, 나중에는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특히 글씨를 쓸 때나 화제(畵題)를 쓸 때는 남의 글을 쓰지 않고 본인이 지은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육당 최남선이 조기석의 집에서 벽하를 평함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은 1925년 봄(삼월 하순부터 약 50여 일간의 순례)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지리산 순례를 시작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마한과 백제인의 정신적 지주인 모악산으로 미륵산을 거쳐 덕진 연못과 오목대, 남고산성, 한벽루, 완산칠봉을 지난다. 이 순례길에는 영호당(映湖堂) 석전(石顚) 대사가 동행하는데, 아마도 이 둘 사이는 한쪽이 스님이지만 죽마고우 이상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진 대사는 벽하 아들인 심농 조기석의 옛 친구일 뿐만 아니라, 보기 드문 맑은 선비이기 때문에, 모악산을 가는데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구이면 와동을 찾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둘은 조기석 집에 당도하여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조기석이 벽하의 대나무 그림을 보이자, 육당이 말하기를 “석정은 괴석도가 벽하는 묵죽도가 뛰어나다(石石碧竹)”라고 평하였다.
육당은 조기석의 집에서 벽하의 많은 글씨와 그림을 보았으며, 특히 벽하가 임서한 ‘난정서’ ‘낙신부’ ‘안씨가묘비’ 등을 보고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광화문 편액을 쓴 향수(香壽) 정학교(丁學敎)가 벽하의 구양순(초당의 서예가) 임서첩을 보고 제발을 붙였는데, 이것을 본 육당은 향수 정학교의 발문을 보고 굉장히 반가워했다. 이 작품에 적힌 정학교의 발문을 적어본다.
“구양순의 이 글씨는 명나라 때 외국사신이 바다의 풍파와 용을 달래기 위해 청한 것인데, 오늘날 벽하의 임서 법첩 또한 외국사신이 청한 것에 버금갈 만하다”고 극찬한다. 즉 정학교는 자신도 구양순 임서를 잘 하였지만, 벽하의 글씨도 대단하다고 한 것이다.
이 때 육당은 조기석의 글씨와 그림을 보고 가학(家學)을 잘 계승했다고 반가워하였으며, 아마도 덕진 연못에 있는 ‘취향정(醉香亭)’편액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옛 고구려의 고승인 보덕국사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절을 창건했다는 경복사지가 있는 마을이 구이면 행원마을이다. 행원마을 입구에 육모정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연안이씨들이 많이 기거한 곳으로 아담한 호수와 정자가 하나 있는데, 그 곳의 ‘영명정(迎明亭)’ 편액도 조기석이 썼다. 이 글씨는 아담하면서도 주변의 경관과 아주 잘 어울린다.
(일주문 창방이 지붕의 무게로 인해 꺾일 가능성으로 기둥전후에 가새 설치.
가새 밑 기둥 하부를 받아주기 위해 신방목과 일체형 초석+신방석)
♣ 하마비: 火巢(산불을 막기 위하여 능원/묘 등의 울타리, 해자 밖에 있는 풀과
나무를 불살라 버린 곳) - 이곳에서는 불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화재경계지)
♣ 속리산사실기비: 1666년(현종7) 송시열 찬, 송준길 서
속리산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바위 내력과 미신타파 주장
속리산의 사실을 기록함.
‘속리산’은 세상 사람들이 소금강산이라고 일컫는다. 금강산은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치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도 ‘조선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구경하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기까지 한다. 따라서 이 속리산은 금강산과 더불어 형과 아우의 사이이니, 그 기이함과 절승함을 알 만하다. 다만 옛날의 사적이 불분명하고 세속에서 전해지는 말이 허탄하다. 세조대왕께서 일찍이 南巡하시다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세속과 동떨어졌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김수온이 쓴 記文에 자세하다. 大谷 成선생이 이 산 아래에서 은거면서 매양 흥이 날 때면 이 산에서 홀로 노닐었는데, 그럴 적에 지어낸 詩가 많이 있다. 그렇다면 이 산은 더욱 帝王과 같이 높은 지위에 마땅하고 또한 南嶽과 雲谷의 韻致가 있다.
山勢는 모두 서쪽을 향해 뻗었는데, 오직 한 산록만 춤을 추듯 하다가 달려내려 온 다음 다시 솟구쳐 水晶峰이 되었다. 수정봉 위에 거북돌[龜石]이 있는데, 머리를 든 채 서쪽을 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史書에서 이르기를, “중국 사람이 이곳에 와서 보고 말하기를 ‘중국의 재물이 날로 동쪽의 조선으로 실려 오는 것은 이 거북돌 때문이다’ 하고, 마침내 그 머리를 잘라버렸다. 그 등어리에는 10층의 浮屠가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또한 거북돌의 머리를 잘라버릴 때 아울러 건립한 것인데, 이로써 地氣를 눌러 없애려는 것이다’ 한다.” 하였다. 그 머리는 崇禎 계사년(효종 4, 1653년)에 옥천군수 이두양(李斗陽) 侯가 총섭승(摠攝僧) 覺性을 효유(曉諭)하여 이어 붙이게 하였는데, 을사년(현종 6, 1665년)에 忠淸兵馬節度 민진익(閔震益) 公이 와서 부도를 보고 그곳 중의 말을 들은 다음에 즉시 관찰사 임의백(任義百) 公에게 권하여 부수어 없애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나는 중국의 재물이 언제 우리나라로 날로 실려 왔는지를 알지 못한다. 또한 그 머리를 잘라버린 뒤에 과연 중국의 재물이 실려 오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지금 충청병마절도가 부도를 다시 부수어 없애버린 것도 중국의 재물이 다시 실려 오기를 바란 뜻이 아니겠는가. 다만 황당한 이야기를 깨부수어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었더라면 그것이 곧 좋지 않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개 世道가 쇠미(衰微)해진 뒤로 이상한 이야기가 한꺼번에 일어난 나머지 심지어 이목(泥木)으로 하여금 능히 舍利를 만들어내게 하는가 하면 지봉(紙封)이 능히 問答을 하기까지 한다. 朱子는 말하기를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인데 또한 山川의 빼어난 精氣를 받은 것이다’ 하였다. 대저 사람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文王⋅武王의 道로 달려가도록 하지 않고 사설(邪說)로 빠져들게 하며, 산천의 빼어난 정기로 하여금 英傑한 인물을 만드는 데 쏟아 부어지도록 하지 않고 도리어 이상한 물건에 모여들도록 하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대저 부도를 만든 일은 총령(葱嶺)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것인데, 道家나 術士들이 점차 부도를 빙자하여 자기네들의 주장을 신비화하였다. 지난 날 이 부도를 세운 자도 또한 감히 높다랗게 우뚝 솟아올라 文壯天王과 으뜸을 겨루고자 한 것이었는데, 중들이나 遊客들이 그것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자랑스러워한 지가 몇 백 년이나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지금의 안사절도(按使節度)는 능히 獨立하여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마치 먼지나 티끌을 쓸어버리듯이 그것을 치워버렸으니, 단지 그의 견식과 취향만이 일반 사람들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 列聖께서 建用한 황극(皇極)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에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여 山中의 한 가지 故事로 갖추어두는 바이다.
崇禎 병오년(현종 7, 1666년) 2월 일.
은진(恩津)의 宋時烈이 記文을 짓고, 은진의 宋浚吉이 글씨를 씀.
♣ 벽암대사비: 벽암의 분사리(사리를 나누어 봉안)한 절이 조계산 송광사‧지리산 화엄사‧종남산 송광사‧속리산 법주사 네 곳. 서산 이후 사리 분장(分藏)
報恩 法住寺 碧嵓大師碑
벽암대사비명(篆字)
유명조선국 고속리산 사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 겸 선교십육종도총섭 비지쌍운 변혜무애 부종수교 복국우세 특사의발 벽암대사 비명 병서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정두경(鄭斗卿) 지음
숭헌대부 낭선군(朗善君)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이우(李俁) 글씨 씀
숭헌대부 복창군(福昌君)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이정(李楨) 전자(篆字) 씀
화상(和尙)의 성은 김(金)씨, 이름은 각성(覺性)이고 자는 징원(澄圓)이며 벽암(碧岩)은 그 호이다. 報恩 사람으로 어머니 曹씨가 자식이 없어 칠성신(北斗)에게 빌었는데 꿈에 오래된 거울을 보고 임신하여 萬曆 을해년(선조 8, 1575년) 12월 23일에 태어났다.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4세에 설묵(雪默)장로를 따라 머리를 깎았다. 부휴(浮休)대사가 선사를 한 번 보고는 뛰어나다 여겨서 데려다가 제자로 삼았다. 을미년(1595년)에 명나라 장수 이종성(李宗誠)이 왜장을 ▨에 책봉하는 사신으로 왔는데 해인사(海印寺)에서 대사를 만나 감탄하며, ‘불도징(佛圖澄)과 도안(道安)을 해외에서 다시 보는구나’ 라고 하였다. 선사가 일찍이 몇 명 사문과 함께 밤길을 가는데 큰 호랑이가 포효하며 나타났다. 여러 승려들이 크게 두려워하였으나 선사는 웃으면서, ‘이 놈은 다만 우리를 위해 앞길을 인도해 주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였다. 20여 리를 갔는데 호랑이가 따라 오다가 절 문에 이르렀다. 선사는 호랑이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멀리서부터 와서 서로 헤어지게 되니 너 또한 애썼다’라고 하였다. 호랑이가 선사 주위를 세 번 돌고는 거듭 울부짖으며 떠나니 절의 승려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송운 유정(松雲 惟政)이 부휴 선수(浮休 善修)에게 편지를 보내어, ‘법을 이을 사람을 얻었으니 축하합니다’ 라고 하였다.
선사는 세속의 일을 잊었고 새들이 손바닥 위에서 모이를 쪼아도 어루만지며 겁먹지 않게 하였다. 광해군 임자년(1612년)에 부휴선수가 미친 중에게 무고를 당해 붙잡혀 서울로 보내졌다. 선사도 함께 옥에 구금되었는데 안색이 태연자약하였다. 광해군이 친히 국문하여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서 곧바로 묶인 밧줄을 풀고 비단 옷 두 벌을 내어 각기 하사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고 갑자년(1624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았는데 선사를 임명하여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으로 삼았다. 공역이 끝나자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칭호를 내렸고 또 의발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어주(內醞: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를 하사하였는데 선사는 합장하고 절하며 말하기를, ‘산승(山僧)은 음주를 금하는(不飮酒) 계를 지켜야 하지만 이는 성왕이 하사한 것이니 어찌 감히 한 잔 마시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중사가 이를 보고하니 (▨▨▨) 칭찬하였다.
병자년(1636년) 겨울에 청나라 군대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선사는 의승(義僧) 3천을 모집하여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하고 관군과 함께 군대를 나누어 진격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더욱 가상히 여겼다. 임오년(인조 20, 1642년) 조정에서 천거하여 일본행 사신으로 삼았는데, 선사는 서울로 가다가 (▨▨▨) 사퇴하였다. 효종대왕이 즉위하기 전에 선사가 안주(安州)에서 뵙고 화엄(華嚴)의 종지(宗旨)를 논하여 밝혔는데, 효종이 크게 칭찬하며 벼루(龍眉)와 붓(畵管), 장식용 조개(硨?) 몇 알, 유리(琉璃)와 도서(圖書), 황금으로 된 사자(獅子)를 상으로 주었다. (▨▨▨) 상서(尙書) 이시방(李時昉)에게 ‘각성 노선사가 병환은 없는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으니 그 후대함이 이와 같았다.
기해년(1659년) 12월에 이르러 가벼운 질병을 보이다가 다음 해 경자년(현종 1, 1660년) 1월에 대중을 모아 작별을 고하고 게송 하나를 썼다.
염송(拈頌)이 30편이요 새겨진 경전(契經)이 8만 게송이로다. 어찌 뒤섞여 갈등을 일으키겠는가? 웃을 만 하도다. 많은 일이 있었구나.
바로 붓을 던지고 앉은 채로 입적하니 나이는 86세였고 법랍은 72년이었다. 다비하는 날 장례에 모인 이가 만 여명이었는데 막 불을 놓자 상서로운 바람이 홀연히 일어났고 날짐승이 슬피 울어댔다. 사리 3알을 얻었는데 모두 흰색이었다. 영골(靈骨)을 나누어 부도(方墳)를 세운 것이 모두 네 곳이었는데 조계산(曹溪) 송광사(松廣), 지리산(頭流) 화엄사(華嚴), 종남산(終南) 송광사(松廣), 속리산(俗離) 법주사(法住)이다.
선사의 사람됨은 용모가 단정하고 기상이 맑고 높았으니 만나 본 자는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 귀천에 상관없이 공경하고 존중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눈빛은 사람을 쏘았고 치아는 39개였는데 깨끗하고 하나같이 가지런하여 또한 신이한 모습이었다. 저술에는 『도중결의(圖中決疑)』, 『참상선지(叅商禪旨)』 등의 글이 있었는데 동양도위(東陽都尉) 신익성(申翊聖)이 서문을 지어 세상에 유통되었다. 처능(處能)대사는 선사의 전법제자인데 와서 명(銘)을 청하므로 결국 그를 위해 명을 짓는다. 명은,
고려 말에 태고보우(太古普愚) 공(公)이 있어
중국에 들어가 불지(佛旨)를 얻고 해동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선풍(禪風)이 크게 떨쳐져
스님들이 팔방(八葉)에서 고승(龍象)이 되기에 이르렀다.
괴로움의 바다(苦海)에 배를 띄워 중생을 구제하였고
그 본원을 본받으니 실로 임제(臨濟)의 정종(正宗)이도다.
높디높은 속리산(俗離)은 선사가 머문 곳이니
돌에 새겨 그 시작과 끝을 기록한다.
갑진년(현종 5, 1664년) 4월 일에 세움
♣ 봉교비석: 奉敎(임금님의 교지(敎旨)를 받들어)
禁遊客除雜役(놀러오는 사람들(遊客)을 막고 갖가지 노역(勞役)을 면제해준다)
咸豊元年三月 : 청나라 함풍 황제 원년 삼월(조선 철종 2년, 1851)
備邊司 : 비변사
이곳에서 노는 것을 금하며 어길 경우 잡역에 처함
속리산에 들어와 함부로 노닐지 말고 승려들에게 잡역을 시키지 말라
♣ 석주(노주석): 철주를 세우고 홈에 고정장치 후 두겹원 홈에 철제선으로 묶음
♣ 금강문: 나라연금강(인왕역사)+밀적금강(이왕역사)
문수보살(사자)+보현보살(코끼리) 현판: 만당 성주표 글씨
♣ 철당간: 1003년(고려 목종7) 높이 16m→1866년(고종3) 파괴→순종 높이 22m
統和二十四年歲次 통화(統和) 24년째 되던 해인
丙午正月▨▨成幢 병오년(목종9, 1006) 정월 일에 당(幢)을 주조하여 만들었다
棟法▨▨▨▨▨▨ 동량(棟樑)은 법▨(法▨)이다. ▨▨▨▨
♣ 석연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서,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다. 원래 이 석연지는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구품 연화장으로 환희원만 영원무궁 상품상생 광도중생 무량수의 감로천이다(상부 난간벽 천인상+보상화)
♣ 철확: 신라 성덕왕 때 주조되었다고 전해오는 거대한 이 쇠솥은 신도 3만 명이 먹을 장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기도 하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하였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 사천왕문: 불사의 산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 1칸은 통로이고 양쪽 2칸에는 높이 5.7m, 둘레 1.8m의 천왕상을 2구씩 4구를 만들어 세웠다. 국내 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되는 사천왕상으로 東方持國天王은 須彌山 동쪽 승신주(勝神洲)를 지키며 손에 비파를 들고 있으며, 西方廣目天王은 수미산 서쪽 우화주(牛貨洲)를 지키며 손에 용과 여의보주를 들고 있다. 南方增長天王은 수미산 남쪽 담부주(膽部洲)를 지키며 손에 칼을 잡고 있으며, 北方多聞天王은 수미산 북쪽 구노주를 지키며 손에 보탑을 들고 있다.
♣ 捌相殿: 팔상도가 봉안되어 있는 이 건물은 1984년까지만 해도 화순 쌍봉사 대웅전과 함께 우리나라 목조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었으나 쌍봉사 대웅전이 소실된 이후부터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탑이 되어 있다. 목조탑이라는 점 외에도 법주사 팔상전은 불사리 봉안처로서의 탑의 성격과 예배 장소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塔殿’ 형식의 건축물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5층 누각형식의 목조탑이다. 탑은 인도에서 복발형(覆鉢形)으로 시작되어 중국에 들어오면서 고루식(高樓式) 목탑으로 변형. 발달되었는데, 이러한 형식의 목탑이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었다. 우리나라 불교 건축사에서 가장 유명한 목탑은 지금은 볼 수 없는 황룡사 9층 목탑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왕 때 2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탑을 완성하였는데 그 높이가 총 225척에 달했다고 한다. 목탑은 삼국시대 뿐 아니라 고려시대도 세워졌음이 만복사지의 탑지에 의해 밝혀진 바 있고, 조선시대까지도 전해져왔음을 현존하는 유적에서 확인되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법주사 팔상전인 것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553년 신라 진흥왕 당시 의신(義信)스님에 의해 창건, 776년 신라 혜공왕 2년 병진(秉眞)스님에 의해 중창 되었다. 1597년 임진왜란 병화에 불타 없어진 것을 1605년(조선 선조 38년)부터 1626년에 걸쳐 惟政 四溟大師가 원래 양식과 거의 동일하게 중건하였다. 지난 1968년 전면 해체수리 할 때, 전체 건축물을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심주(心柱) 밑에서 부처님 사리가 들어 있는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법주사 팔상전이 불사리 봉안처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최근에는 상륜부가 기울어 이 부분을 다시 수리한 적이 있다.
법주사 팔상전이 목탑형식의 건물이라는 점에서 흔히 쌍봉사 대웅전과 비교하고 있지만 쌍봉사 대웅전과 크게 다른 점 하나가 있다. 그것은 쌍봉사 대웅전과 달리 법주사 팔상전은 사방에 계단이 설치된 높은 기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단부만 본다면 법주사 팔상전은 쌍봉사 대웅전보다 오히려 불국사 다보탑과 더 가까운 느낌을 준다.
불국사 다보탑은 법신불인 다보여래와 보신불인 석가모니불이 不二임을 상징하는 탑으로, 팔상전에서 보듯이 탑의 기단 사방에 돌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단은 정사각형의 모습을 취하면서 四諦와 八正道의 근본도리를 상징하고, 제1층을 향하여 올라가는 동서남북 사방의 계단은 오직 구도자에게만 허락된 수행의 수행경지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 기단 또한 그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팔상전에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각 층의 칸의 數이다. 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의 너비를 말하는 단위로 정확한 치수는 정해져 있지 않다. 1층.2층은 5칸, 3층.4층은 3칸, 5층은 1칸으로 되어 있다. 전체 층수를 5층으로 설정하고, 각 층의 칸수에 5.3.1의 칸수를 적용한 것은 일정한 체감율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는 동양 전통의 수리관(數理觀)이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5는 양수의 중심 수이고, 3은 완전의 수이며, 1은 그 자체가 양을 의미하는 상수(象數)이다. 옛 사람들은 탑의 층수뿐만 아니라 생활의 여러 방면에 이와 같은 양의 상수를 적용시켰다. 상수는 단순히 수를 셈의 대상이 아니라 삼라만상의 대응과 조화의 이치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와 같은 이치에 인간이 동참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찰에는 팔상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각들이 많다. 예컨대 쌍계사.통도사.운흥사.선암사.범어사.보경사 등 많은 팔상전 건물들이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팔상전 건물들은 예배 공간으로서의 기능만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법주사 팔상전은 불탑 형식의 구조로 된 불사리 봉안처로서의 성격과 예배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과 같이 탑의 내부가 예배공간으로 활용되었던 최초의 기록이 〈삼국유사〉 권5, ‘월명사도솔가(月明師兜率歌)’조에서 보인다. 내용 중에, “동입내원탑중이은(童入內院塔中而隱)”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동자가 탑 속으로 숨어들었다는 이야기다. 사람이 탑 속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 탑 내부에 그만한 공간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때 동자가 숨어들었다는 그 탑이 법주사 팔상전과 같은 형식의 목탑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법주사 팔상전은 팔상도를 봉안할 목적으로 건립된 건축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팔상도는 법주사뿐만 아니라 일반 사찰의 팔상전이나 영산전과에서도 팔상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반 사찰의 팔상전에서는 8폭의 팔상도가 불단을 향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열되어 있어 한 곳에서도 내용 전체를 파악할 수가 있다. 그러나 법주사 팔상전의 경우는 건물 중심에 조성된 네 벽을 돌아가면서 한 벽면에 두 폭씩 팔상도를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한 곳에서는 전체를 다 볼 수가 없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팔상전 안을 한 바퀴 돌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탑돌이를 한 셈이 된다. 이 탑돌이는 곧 심초석(心礎石)에 봉안된 불사리를 중심으로 한 탑돌이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법주사 팔상전의 팔상도 역시 다른 절의 팔상도처럼 도솔내의.비람강생.사문유관.유성출가.설산수도.수하항마.녹원전법.쌍림열반 등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 중 여덟 가지 중요 사건을 그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팔상도의 각 장면의 배치는 시계방향으로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도솔내의상’을 시작으로 해서 ‘쌍림열반상’에서 끝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법주사 발상도의 경우에 배치 순서가 좀 어긋나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원칙대로라면 ‘도솔내의’, ‘비람강생’, ‘사문유관’, ‘유성출가’ 등의 순으로 되어 있어 하나 실제는 ‘유성출가’, ‘사문유관’ 순으로 차례가 바뀌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배치해 놓은 이유를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팔상전 외부 장식 중 우리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2층 처마 밑 네 모서리에 장식된 난쟁이 형상의 인물상과 용의 형상이다. 난쟁이상은 공포를 구성하는 수서(垂舌 공포에서 쇠서 끝이 아래로 삐쭉하게 휘어 내린 모양으로 된 것) 위에 있는 두 개의 연꽃 봉오리 위에 쪼그리고 앉아 두 팔과 머리로 추녀를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눈은 왕방울 눈이고, 나선형으로 표현된 눈썹과 수염은 짙은 색깔로 채색되어 있다. 이 난쟁이 형상은 불교 외호신중의 하나로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양함과 동시에 불자와 불전을 수호하는 기능을 가진 존재로 알려져 있다.
이 난쟁이 상과 닮은 조각상이 팔공산 환성사 대웅전 불단 우측면에도 있다. 적갈색 몸에 볼록 튀어나온 배, 부리부리한 눈과 주먹코가 인상적인 이 난쟁이상은 쪼그리고 앉아 짧고 통통한 두 팔을 들어 위쪽의 단을 받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 절 스님들 이것을 나찰이라 부르고 있다. 일본의 사찰 건물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조각상을 볼 수 있는데, 나라 현 호류지(法隆寺)의 오층 목탑에 장식된 난쟁이 조각상이 바로 그런 예다.
끝으로 살펴 볼 것은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리장치이다. 1968년 9월 팔상전을 해체 할 때 심초석에 마련된 네모꼴의 사리공안에서 사리장엄구와 함께 은제 사리호가 원형 그대로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석탑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경우는 많지만 목탑에서 발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사리장치가 발견됨으로써 법주사 팔상전이 사리 봉안처로의서 성격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사리호는 연꽃 모양의 뚜껑을 가진 그릇 표면에 큼직한 연당초(蓮唐草) 무늬를 새기고 여백 부분에 어란(魚卵) 무늬를 채운 소박한 장식의 용기이다. 사리호를 쌌던 보자기에는 한글이 섞인 축원문이 먹으로 쓰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 ‘병生王孫昌盛萬歲’.‘身如金剛심신안락’.‘을사생최씨’ 등의 글자가 판독되었다. 함께 발견된 사리함 내부 장식 동판에서도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명문에 의해 팔상전의 중건내력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불상 앞에는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미륵불 방향 계단 아래 돌[長/短]은 음양조화: 배례석. 석조계단 갑석과 면석이 만나는 소맷돌:그렝이 떠서 밀착)
♣ 쌍사자석등: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간주(竿柱)에 변화를 주어 특색을 발휘한 전형적인 신라시대의 8각석등이다.
지표에 놓인 넓은 팔각 지대석은 아래위에 테를 돌리고 우주형을 표시하였으나 각 면에 조식은 없고 상면에는 각형과 반원형 2단의 뚜렷한 굄이 표현되었다.
下臺石은 8각으로 꽃잎 속에 花形이 장식된 단판복련(單瓣覆蓮) 8엽이 조각되었다. 8각기둥을 대신한 雙獅子는 뒷발을 하대석에 버티어 가슴을 대고 마주 서서 앞발로 上臺石을 받쳤으며, 머리는 들어서 위를 향하였는데 머리에는 갈기가 있고 다리와 몸에는 근육까지 표현되었다.
상대석에는 서로 양식이 다른 단판의 仰蓮을 이중으로 조각하였다. 火舍石(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8각으로 네 곳에 장방형 火窓을 내었는데, 화창 주위에 작은 구멍이 있는 것은 다른 사실이 있었던 듯하다.
개석은 크고 8각이며 처마 밑은 수평이나 추녀 끝이 약간 反轉되었으며, 정상에는 복련을 조각하였다. 옥개 위에는 球形의 寶珠가 남아 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석등 중에서도 간고한 조각수법과 넓은 지대석 및 옥개석 등의 비례에서 장중한 품격이 넘치고 있다.
쌍사자상을 보면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다른 한 마리는 입을 다문 형상이다. "입을 벌린 것은 범어 첫 글자 '아 a' 자를 상징하며 창조·출발·시작을, 입을 다문 것은 범어 마지막 글자 '훔 hum' 자를 상징하며, 끝과 소멸을 의미한단다. '아'와 '훔'을 합하면 원만구족(圓滿具足)을 상징하는 범어(梵語) '옴 om' 자가 된다. 그러므로 쌍사자형상은 완성을" 의미한단다. 생성과 소멸, 시작과 끝을 의미하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한편 입을 다문 사자는 묵언수향을 강조하는 禪을 상징하고, 이블 벌린 사자는 염불과 경전을 강조하는 敎를 상징한다고 한다.
♣ 사천왕석등: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 제작된 사천왕석등은 우리나라 석등의 정형이라고 할 수 있는 8각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높이 3.9m에 이르는 이 석등은 지대석‧하대‧중대(간주)‧상받침대‧상대(화사석)‧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장 중요한 상대의 각 면에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 대웅보전: 얕은 기단 위에 서 있는 중층인 이 건물은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총 120간,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축물이다.
내부에는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三身佛)이 안치되어 있다. 중앙에 봉안한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 비로자나불상 이고, 좌측에 안치한 불상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의 노사나불(아미타불)상이며, 우측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화신으로 나투신 석가모니불상이다.
수미단 상부 삼세불 상대좌에 사자상
임진란으로 산림이 불타 자재 수급 어려워 내부 고주도 2~3개 부재 이용.
계단 좌우 소맷돌 가운데 넓적한 판석 3장은 부처님을 모신 연 왕래 시 답도이다
답도 좌우 계단 연화문 초각
♣ 소조삼신불: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실내 안존불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이다. 세 분 부처님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우리 사람에게는 정신 즉 마음이 있고, 공부를 하면 지식이 있게 되는 즉 덕이 있고, 사람마다 제각기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 셋을 포용하고 있다. 법당의 가운데 부처님은 마음을, 왼쪽 부처님은 덕을, 그리고 오른쪽 부처님은 육신을 뜻한 것이다. 이렇듯 부처님은 원래 한 분이지만 우리 중생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세 몸(三身)으로 모셔 놓은 것이다.
점토로 만들어졌으며,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배치한 삼불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1626년(인조 4)에 조성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하였다.
비로자나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기다란 귀, 건장하면서 굴곡이 없는 몸체와 무릎 때문에 둔중해 보인다.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있고 手印은 智拳印을 취하고 있다. 法衣는 양어깨를 모두 덮은 通肩으로 대의 자락이 팔목에서 대칭되게 흘러내리고 있다.
아미타불상은 형태가 본존불과 거의 비슷하며, 수인은 왼손과 오른손이 뒤바뀐 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큼직한 중앙계주가 있다.
석가모니불상은 비로자나불상·아미타불상과 체형, 얼굴모습 등이 거의 같고 양식은 비슷하다. 수인은 석가여래불의 전형적인 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한편 아미타불상과 석가여래불상은 수인이나 불상의 성격이 서로 다른 데도 불구하고 법의 착용법이 같다. 전체적으로 장대한 체구에 비하여 얼굴은 동안(童顔)이며 옷주름을 두텁게 표현하였다.
大雄寶殿 편액: 법주사 대웅전 글씨는 석봉체를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안진경의 필의(筆意-어떤 글씨체를 염두에 둔 것)를 조화시킨 활달한 운필의 해서이다.
어필편액(御筆扁額)은 서명이나 낙관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하니 이 편액 역시 확실하다고 고증할 수는 없으나 조선 19대 왕인 숙종(肅宗)의 어필이라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大雄寶殿 편액 글씨를 보면, 불국사와 송림사의 ‘대웅전(大雄寶)’ 글씨와 똑같다.
大雄寶殿 글씨 중 ‘寶’ 자를 뺀 나머지 세 글자를 비교해보면 모두가 똑같다
그렇다면 법주사 '대웅보전'의 편액에서 '보'자를 빼고 모사해서 '대웅전'이라는 편액을 만든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 법주사‧송림사‧불국사의 대웅전 필적이 모두 똑같다. 이와 관련하여 동방불교대학 김일두박사는 '한국사찰의 편액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법주사의 대웅보전 편액이 먼저 쓴 것이고 불국사와 송림사의 대웅전 현판은 이를 모각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법주사의 편액이나 법주사의 것을 모사한 운문사의 편액은 불국사 대웅전 편액과는 달리 금니(金泥)로 되어 있는데 옛날에는 어필(御筆)의 경우 금니로 하는 관례가 많았다고 한다.
사찰에 御筆이 있는 경우는, 조선시대 억불정책 정권 아래서 왕의 글씨 편액을 걸어놓음으로써 관리나 양반들의 횡포를 최소화하려는 측면도 크기 때문에 법주사에서도 숙종 재위 중에 불사를 하면서 御筆扁額을 걸고자 했을 것이다.
물론 숙종의 편액 글씨가 뛰어나 선호한 것도 그 이유가 될 것이다.
♣ 후불도: 비로자나불도(中央): 大正6년(1917년)
아미타불도(向左): 佛紀2952년(1928년)+아미타불도(向右): 建陽2년(1897년)
사천왕도(向左): 佛紀2952년(1928년)+사천왕도(向右): 建陽2년(1897년)
삼장탱(向左): (1928년) + 신중탱(向右): (1897년)
♣ 범종: 가경 9년 1804년(순조4) 7월에 4천근의 동 사용하여 만든 종
대시주자 1명과 일반 시주자 15명
범종은 전체적으로 규모는 크지만 종신의 문양이 얕고 장식도 선명하지 않으며, 주조 기법도 뛰어난 편이 아니다. 그러나 명문이 있어 종 제작에 관련된 이들과 제작 연도, 사찰명을 정확히 알 수 있고, 전형적인 조선시대 범종의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존 가치가 높다
♣ 삼성각: 산신탱+칠성여래도+독성탱 - 1991년
♣ 명부전: 무독귀왕+지장보살+도명존자. 시왕상+동자상, 각 2구 판관녹사인왕
지장보살도: 1996년, 동종: 1992년
♣ 진영각: 중앙(石霜/震河/坦應/法英/玲璘/衝恩/普欣/莊信/函월/義信/太古/冥一/
智榮/世弘/靜俊/明察/道弘/弘珉/性印. 좌(大圓/湖岩/龍虛). 우(亘玄/太田)
♣ 희견보살상: 두툼한 판석과 커다란 그릇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의 입상이다. 전체 높이 2m에 이르는 이 보살상은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장하는 희견 보살을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희견 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스스로 몸과 팔을 불태워 소신(燒身) 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이다. 보살상은 하나의 돌로 대좌에서 머리 위의 판석까지를 조각하였고, 맨 위의 향로만이 다른 돌이다. 보살이 밟고 서 있는 대좌는 별다른 조각 없이 판석에 가깝다. 아마도 이 대좌의 반쯤은 땅속에 묻어 고정시켰던 것 같다.
보살상의 상호는 심하게 파손되어 전혀 알아 볼 수 없으나 볼록한 가슴, 굵은 다리와 팔에서 역동적 분위기가 나타난다. 어깨에 두른 겉옷은 팔을 들 때 자연스럽게 펼쳐지듯이 가슴을 활짝 드러내며 옆으로 젖혀졌다. 속옷은 하의에만 표현하였는데 배꼽 아래로 띠 매듭이 보인다. 두 팔과 머리로 떠받친 그릇받침은 투박한 판석이다. 그 위의 향로는 네 겹의 굵은 연꽃잎을 둘러 화려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대담한 기법이 돋보이는 통일신라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 보살상의 주인공을 가섭존자(迦葉尊者)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희견 보살은 단정한 모습에 왼손에는 깃발을 든 모습으로 나타나므로 이 보살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석가여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가섭 존자에 가깝다고 한다. 가섭 존자는 석가가 입멸한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열반에 들지 말고 세상에 남아 가사와 발우를 전하라는 석가여래의 가르침을 받는다. 이러한 경설을 바탕으로 두고 법주사의 보살상은 희견 보살이 아닌 가섭 존자가 미륵불에게 전할 가사와 발우를 머리에 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명칭은 가섭봉발가사탑(迦葉奉鉢袈裟塔)으로 해야 옳다고 한다. 이러한 이견도 주목할 만하다. 일찍부터 법주사는 미륵도량이었고 가람 곳곳에는 미륵불과 관련된 유물이 산재하고 있으므로 미륵신앙을 구현한 가섭존자의 조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 당나라 때 유행했던 곤륜노(崑崙努)를 조각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곤륜노는 돈황벽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상으로 얼굴 골격이나 옷차림 모습 등으로 미뤄 당시 동남아에서 당나라로 잡혀온 노예로 추정(국립중앙박물관 000학예사)하였다. 본래 향로는 뚜껑을 갖고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없어졌다.
♣ 원통보전: 창건 당시 의신조사(義信組師)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서 776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창하고, 임진왜란 떼 소실된 것을 1624년 벽암대사(碧巖大師)가 다시금 복원하였다. 원통보전은 正方形의 특이한 건축양식으로서 조선 중기의 미묘하고도 화려한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고, 주심포계의 단층 건물로 사모지붕에 절병통으로 조성된 특유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 목조관음보살좌상: 1655년(효종 6)에 조성된 이 관음보살좌상은 법주사 원통보전(보물 916)에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을 모신 다음 화염보주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을 쓰고 있다. 배 부분에도 복갑(腹甲) 같은 둥근 꽃장식 판을 두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불단 양옆에는 남해용왕과 南巡童子의 조각상을 배치하였다. 더구나 조선 말기에 그린 관음탱이 후불탱으로 걸려 있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네모난 얼굴에 두 눈을 아래로 내려뜨고 있어 인상이 근엄해 보인다.
手印은 오른손은 가슴선까지 올리고 왼손은 배 높이에 둔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댄 下品中生印을 취하고 있는데, 마치 실제 인물의 손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두 손은 다른 보살상처럼 가냘프다기보다는 크고 굵은 손가락들의 움직임이 크다. 양쪽 어깨를 덮은 天衣 자락은 신체의 곡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부피감 있는 곡선미가 드러난다.
♣ 선희궁원당: 조선 21대 왕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곳으로, 조성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765년으로 추정된다. 영빈이씨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모신 후에는 법주사와 관련된 역대 큰스님들의 초상을 모셔둔 ‘祖師閣’으로 사용하다가 1990년 대웅보전 서쪽에 진영각(眞影閣)을 따로 갖추면서 지금은 빈 상태이다. 따라서 법주사에서는 ‘구(舊) 조사각’이라 부르기도 한다.
♣ 석옹: 주방 근처에 있었는데 현재는 법주사 경내 摠持禪院 왼쪽 40m 정도 떨어진 곳에 묻혀 있는 항아리 형태의 석조물이다.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속리산 3,000여 승려들의 김칫독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 궁현당: 법주사의 선당(禪堂)으로 중수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인 1632년(인조 10)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852년(철종 3)에 기존의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고쳐 지은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는 현존하는 상량문에 적힌 ‘숭정기원사임자년(崇禎紀元四壬子年)’이라는 기록에 따른 것으로, 특히 상량문에는 그 당시 법주사에 기거하던 스님들과 선당을 지은 목수들의 명단도 기록되어 있다. 상량문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과 보존 상태가 양호한 조선시대 건물.
♣ 청동미륵불: 법주사의 이미지라 할 만큼 법주사 하면 미륵대불을 떠올린다. 하지만 높이 8m의 기단 위에 25m 높이로 우뚝 선 미륵대불이 법주사에 자리 잡은 것은 불과 40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 미륵대불이 위치한 곳에는 옛날 산호전(珊瑚殿)·산호보광명전(珊瑚普光明殿), 또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이라 불리던 법당이 있었다. 이 법당 안에는 신라시대 진표 스님이 조성한 금색의 미륵장륙상이 있어 오랫동안 법주사의 구심적 역할을 해왔었다. 그러나 1872년(고종 9) 경복궁 복원을 위한 당백전(當百錢) 주조란 명분을 들어 흥선대원군은 미륵장륙상을 압수하여 녹이고 말았다.
이후 1939년 주지 석상(石霜) 스님의 원력과 김영곤(金永坤) 거사의 시주에 의해 미륵불 조성불사를 착수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미륵불을 조성한 것은 1964년에 이르러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시주로 완성하였다. 그러나 시멘트로 조성한 불상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외관이 볼썽사납게 변하였다. 1990년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지 월탄 스님과 사부대중들이 힘을 합쳐 지금의 청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완성하였다. 여기에 소요된 청동의 무게는 무려 160톤에 달한다. 점안식 날 하늘에서는 서광이 비추고 머리 위에서는 백호광명(白毫光明)이 치솟아 모든 대중이 환희와 감탄에 젖었다고 한다. 최근 청동 위에 금칠하였다.
이 상은 미륵불입상으로 통통하고 원만한 얼굴에 머리는 나발로 중앙계주가 있는 육계를 갖췄다. 머리 뒤의 두광은 투각으로 화염문과 법륜, 화불을 장식하였다. 법의는 통견식으로 걸치고 법의자락은 상반신에서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자연스럽게 흐르고, 하반신에서는 무릎 밑으로 U자형 주름을 이룬다. 대좌는 복련과 앙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이다. 이 상은 최근 개금불사를 하여 금색의 휘광을 내뿜고 있다(불전에 불상이 있었던 위치와 높이에 모셨으며 서산대사 일기에 위치와 높이 기록을 확인하여 조성)
♣자정국존비: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전액(篆額)]
고려국(高麗國)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자정국존(慈淨國尊) 비명(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密直司) 좌부대언(左副代言) 판선공사사(判繕工寺事) 진현관(進賢館) 제학(提學) 지제교(知製敎) 신(臣) 이숙기(李叔琪)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봉상대부(奉常大夫) 전교(典校)부령(副令) 직보문각(直寶文閣) 신(臣) 김원발(全元發)은 교지(敎旨)에 의하여 쓰다
신(臣)이 삼가 불교의 경전을 상고해 보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가장 큰 목적을 입으로 말씀하신 것은 경(經)이라 하고, 마음을 나타낸 것은 선(禪)이라 한다. 그러므로 선(禪)은 가히 마음으로 전할 수 있으나, 교(敎)는 구연(口演)하기가 더욱 어렵다. 능히 입으로 강설하여 그 뜻을 연출해서 후학을 계몽하여 계(戒)·정(定)·혜(慧) 내3학(內三學)의 도단주(都壇主)가 되신 분은 오직 자은국일대사(慈恩國一大師)가 바로 이 분이다.
스님의 휘는 자안(子安)이나, 뒤에 현몽(現夢)으로 말미암아 미수(彌授)로 개명하였다.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이고 선계(先系)는 일선군(一善郡)에서 나왔다. 아버지는 한제(漢磾)이니 봉순대부(奉順大夫) 전객령(典客令)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어머니는 문씨(文氏)이니 공진(公進)의 딸로 화주군(和義郡)부인(夫人)에 추봉되었다. 출생한 후 며칠만에 어머니가 돌아갔으므로 자씨(姊氏)의 손에 의해서 자라났다. 9살 때 스승에게 나아가 시(詩)와 서(書)를 배웠는데 한 번만 들으면 문득 외웠으며 총명하고 민첩한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다. 13살 적에 선산(善山) 원흥사(元興寺) 종연(宗然)스님을 찾아가 그를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비구계(比丘戒)를 받은 다음 경론(經論)을 수학하였다. 19살 때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상품과(上品科)에 합격하고 양주 국녕사(國寧寺)에 주석하였다. 29살 적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받고, 주로 유식론종지(唯識論宗旨)를 강설하였다. 기사(耆師)와 석덕(碩德)들이 모두 스님 앞에 경(經)을 펴고 배웠으므로, 희대(稀代)의 뛰어난 학자라고 칭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미령(弱齡)의 나이에 이미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종승(宗乘)을 어깨에 짊어져서 당대의 표준이 되었다. 삼중대사(三重大師)로서 주법(主法)한 적이 이전에는 없었는데 스님이 바로 그렇게 되신 분이다.
두 번째로 주석한 웅신사(熊神寺)에 있을 적에는 특별히 비서(批署)를 내려 수좌(首座)로 추대하였고, 세 번째로 장의사(莊義寺)에 주석하면서는 또 승통직(僧統職)을 받았다. 네 번째로는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에 주석하다가 전하(殿下)에 나아가 하산(下山)하도록 윤허를 신청하였다. 이때 대장군(大將軍) 김자정(金子廷)이 왕의 교지를 전달하였는데,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대종장(大宗匠)은 백천만겁을 지나도 만나기 어렵사오니, 스님께서는 경론(經論)의 장소(章疏)를 지어 길이 세간(世間)에 유통하여 널리 후진을 계몽토록 하소서"라고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스님께서는 왕명을 받은 이후로 항상 손에 경권(經卷)을 놓지 아니하고, 강론(講論)에 여념이 없이 일대시교(一代時敎)를 홍양(弘揚)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삼아 경론에 대한 주해를 찬술한 것이 무려 92권이나 되었다. 다섯 번째로 중흥사(重興寺)에 주석하면서 정진하다가 태위대왕(太尉大王)이 즉조(卽阼)하던 해인 무술년(戊戌年) 5월에 이르러 왕이 비서(批署)를 내려 석교(釋敎)도승통(都僧統)과 중흥사주지행지원명대사(重興寺住持行智圓明大師)로 추대하였다.
여섯 번째로 유가사(瑜伽寺)의 주지로 있을 때 충렬왕은 원(元)나라 수도인 연도(燕都)에 있었다. 왕은 특히『다반야경(大般若經)』을 신지(信持)하여 숙위(宿衛)하는 신료(臣僚)들로 하여금 밤마다 독송(讀誦)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전하(殿下) 일행이 모두『대반야경』을 독송하였다. 일찍이 어느 날 상국(上國)의 한 강주(講主)가『법화경(法華經)』신해품(信解品)에 난해한 부분을 해석하여 주기를 요청하였다. 당시 모든 강사들이 "이는 능히 해석할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왕이 사신을 스님에게로 보내어 이에 대한 주해(註解)와 또 심지관경(心地觀經)에 대한 소기(疏記)를 짓도록 청하였다. 스님은 이 신해품 주해와 심지경관(心地觀經)에 대한 소기(疏記)를 사신에게 주어 왕에게 봉헌(封獻)하였다. 모든 강사들이 이를 보고 저마다 주장하던 쟁론(爭論)을 그치고 모두 찬미(讚美)하면서 그 희유(稀有)한 탁견(卓見)에 탄복하였을 뿐아니라 임금도 더욱 존숭하였다. 일곱 번째로 다시 장의사(莊義寺)로 이주하였다. 무신년(戊申年) 4월 비서(批署)를 내려 대자은종사(大慈恩宗師) 개내삼학도단주(開內三學都壇主) 대장의사주지(大莊義寺住持) 왕교도승통(五敎都僧統) 광지묘변(廣智妙辯) 불각보명대사(佛覺普明大師)로 법칭(法稱)을 올렸다. 개내함학도단주(開內三學都壇主)라는 7자는 보록(寶錄)에도 실려 있다. 기유년(己酉年)에는 숭교원(崇敎院)의 교학(敎學)이 되었고, 계축년(癸丑年)에 이르러 비서(批署)를 내려 대자은종사(大慈恩宗師) 삼중대광(三重大匡) 양가(兩街)도승통(都僧統) 보리(菩提)살타(薩埵) 마가나가(摩訶那伽) 국일대사(國一大師) 우세군(祐世君)이라는 법칭(法稱)을 봉증하고 별도로 일품(一品)의 봉록(俸祿)을 드렸다.
갑인년(甲寅年) 1월에 연경궁(延慶宮)에서 백팔만승재(百八萬僧齋)를 베푸는 날에 임금께서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이라는 직인을 새로 주조하여 손수 바쳤다. 을묘년(乙卯年)에는 내전참회사(內殿懺悔師) 삼학법주(三學法主) 덕혜원증(德慧圓證) 장통현변(藏通玄辯) 국일대사(國一大師)로 책봉하고, 참회부(懺悔府)를 설립하고 별도로 은(銀)으로 직인을 만들어 승정(僧政)을 전담 관리하되, 비로소 오교(五敎)와 이종(二宗)의 사사(寺舍)를 관리토록 하였다. 정사년(丁巳年)에는 불해징원(佛海澄圓) 홍자광지대도사(弘慈廣智大導師)로 봉하였으며, 무오년(戊午年)에는 법가(法駕)를 준비하여 대민천사(大旻天寺) 강원(講院)으로 맞아들여 법상종(法相宗) 3대가(三大家)의 장소(章疏)를 강설하였다. 신유년(辛酉年)에는 법주사(法住寺)로써 하산(下山)할 곳으로 삼았다가 다시 동화사(桐華寺)로 이주하였다. 갑자년(甲子年)에 이르러 오공진각(悟空眞覺) 묘원무애국존(妙圓無礙國尊)으로 책봉하였고, 을축년(乙丑年)에는 다시 법주사로 이주하였다가 정묘년(丁卯年) 12월 1일 아침 서기(書記)를 방장실로 불러 주상(主上)에게 올릴 편지를 써서 직인과 함께 봉하고 상주목사(尙州牧使)인 김영후(金永煦)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하고, 해가 포시(晡時)에 이를 무렵 조용히 앉아 입적(入寂)하였다. 8일에 이르러 법주사 서북쪽 산등성이에서 다비(茶毗)하고 산호전(珊瑚殿) 동쪽 모퉁이에 탑을 세웠다. 세수는 88이요, 법랍은 75세였다.
스님의 사람됨은 간결하여 연식(緣飾)함이 없고, 천성(天性)에 의해 진리를 따르며 도를 닦았다. 일상생활은 인시(寅時)의 아침에는 죽공양을 하고, 오시(午時)의 점심공양에는 밥을 먹으며, 해가 정오(正午)를 지나면 오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는 일체 먹지 아니하였다. 중흥사(重興寺)에서 무릇 18년을 주석하는 동안 초청을 받지 아니하고는 한 번도 권세가의 대문을 밟지 아니하였다. 날마다 용궁해장(龍宮海藏)인 내서(內書)에 속하는 경론(經論)을 연구하며 번역하여 정통하지 않음이 없으며, 다른 서적(書籍)인 외전(外典)까지도 또한 모두 섭렵하여 강기(强記)하였으며 항상 배움을 싫어하지 아니하며, 또한 가르치되 권태(倦怠)를 느끼지 아니하였다. 항상 후진을 유액(誘掖)하는 마음을 깊이 간직하여 비록 배우지 못한 동몽(童蒙)들이 찾아와서 모서(某書)를 강(講)하고 모서를 논(論)해주기를 청하면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여 강설하여 주고 열한(烈寒)과 혹서(酷暑)에도 거처(居處)의 불편함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사방(四方)으로부터 학인(學人)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어 스님의 여윤(餘潤)을 얻고자 하였다. 일국(一國)의 공경(公卿)과 사대부(士大夫)의 자제(子弟)들 중 배움에 뜻을 둔 사람으로 스님의 문하에서 배출된 자가 매우 많았다. 스님의 평생 사업이 대개 이와 같았다.
임금께서 부고(訃告)를 듣고 애도하시면서 관원(官員)을 보내어 사후의 일을 돕게 하고, 시호를 자정국존(慈淨國尊)이라 하고 탑호를 보명(普明)이라 추증(追贈)하였다. 지금의 임금이신 충혜왕께서 선위(禪位)를 이어받은 원년(元年) 8월에 문인(門人)인 자은종(慈恩宗)의 원흥사(元興寺)주지(住持) 도승통(都僧統) 대사거현(大師居玄)과 기림사(祇林寺)주지(住持) 원지대사행영(圓智大師行英)과 천신사(天神寺)주지(住持) 통현대사충서(通玄大師冲瑞)와 현화사(玄化寺)주지(住持) 자진원묘(慈眞圓妙) (결락) 등 314인이 스님의 행장자료(行狀資料)를 모아 임금에게 올리고 행적비(行跡碑)를 세울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소신(小臣)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신(臣) 숙기(叔琪)가 왕명을 받고 두려워서어찌할 바를 몰라주저하다가 마치 높은 데에서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운월지지(隕越之地)를 무릅쓰고, 삼가 손을 씻고향불을 피운 다음 부처님께배계(拜稽)하고 비문을 지었다. 명(銘)하여 이르되
시방세계(十方世界) 법왕(法王)이신 석가출세(釋迦出世)는
우담발화(優曇鉢華) 나타나듯 희귀(稀貴)하도다.
마음 등불 높이 들어 밖을 비추고
지혜 거울 갈고 닦아 안을 밝히다. ①
계정혜(戒定慧)인 삼학도(三學道)를 펴고 전하여
임금님을 돕고 도와 성군(聖君)되시다.
75년 수행 끝에 입적(入寂)하시니
자은종(慈恩宗)의 깊은 진리(眞理) 홍포(弘布)하였네! ②
5탁세(五濁世)인 남염부제(南閻浮提)뒤로 돌리고
도솔천궁 내원(內院)으로 돌아가시니
문인(門人)들이 산호전(珊瑚殿) 옆 터를 닦아서
백옥탑(白玉塔)을 세우려고 뜻을 모으다. ③
그 유골(遺骨)은 탑(塔) 속에서 보이지 않고
유가(瑜伽)종사(宗師) 이름만이 진동(震動)하도다.
소신(小臣)에게 명을 내려 비(碑)를 세우나
이 비문(碑文)은 조잡하여 화조(華藻)가 없네. ④
붓을 잡고 먹을 묻혀 글을 지으니
스며드는 두려움을 참고 견디다. ⑤
지정(至正) 2년임오(壬午) 9월 일에 문인(門人)인 대자은종사(大慈恩宗師)로써 자은교관(慈恩敎觀)
을 전(傳)하며, 5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며 중흥사지주(重興寺住持) 겸천신사주지(兼天神寺住持) (결락)
명(明) 국일대사(國一大師) 삼중대사우세군(三重大匡祐世君)인 도탁(道卓)과 주지(住持)인 자명진각광교대사(慈明眞覺廣敎大師) 탄기(坦起)등이 비석을 세우다.
♣적멸보궁(능인전): 世尊舍利塔 앞에 자리 잡고 있는 건물. 안에는 주존인 석가모 니불과 함께 연대를 미상의 16羅漢상과 여래상과 1992년에 조성한 神衆幀.
♣세존사리탑: 1362년(공민왕 11) 공민왕이 홍건적을 격파하고 법주사에 행차하여 통도사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모니의 사리 한 개를 이곳에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형식은 八角圓堂形으로서 기단부 위에 塔身을 얹고 그 위에 屋蓋石을 얹었으며, 정상부에 相輪을 장식하였다. 기단부는 上臺·中臺·下臺로 구성되었는데, 평면방형의 地臺石 위에 평면 8각의 기단이 놓여 있다. 기단의 윗면은 경사지게 깎여 있으며 각 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던 듯하나 지금은 마멸되어 알 수 없다. 하대도 상면을 경사지게 깎았으며 하면은 8각의 각 면의 眼象 안에 三山形의 花文을 장식하였다. 중대는 8각의 각 면에 우주(隅柱: 모서리기둥)와 안상을 조각하고 안상 안에 삼산형의 화문을 조출(彫出)하였다.
상대는 八葉의 複瓣仰蓮으로 장식하였고, 판단(瓣端) 위에 낮은 부연(副椽: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을 표현하였다. 탑신은 球形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옥개석은 8각으로 落水面 경사는 상단에서는 급하나 하단부에 이르러 다소 완만하고, 옥개의 각 변은 곡선을 이루었다.
상륜부는 낮은 弧形의 圓座 위에 큼직한 圓臺를 마련하고 그 위에 寶珠를 장식하였다. 전체적으로 아담한 형태의 사리탑으로 고려 말기의 부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물전시관
① 신법천문도설: 관상감의 안국빈(安國賓) 등 6명이 북경천문대 대장이었던 선교사 대진현(戴進賢, Kogler, I.)의 성표(星表:기산점 1723년)를 사용, 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남쪽 하늘의 별까지 포함하여 제작한 신법천문도가 그려져 있다. 1곡을 한 폭으로 보면 높이 183. 5㎝, 너비 56㎝로 8폭 전체의 길이가 451㎝나 되는 대형이다.
제1폭에는 신법천문도설(新法天文圖說)이라는 제자(題字) 옆에 당시의 천문학적 지식을 510자로 설명하고, 그 왼쪽에 해와 달, 그리고 천리경(千里鏡:지금의 망원경)으로 본 5개의 행성의 모양을 위에서부터 토성·목성·화성·금성·수성의 순서로 크기와 색깔을 달리하여 그렸다.
제2·3·4폭을 합한 세 폭에 지름이 각각 165㎝, 162.7㎝, 161㎝ 되는 대·중·소의 원이 삼중으로 그려져 있는데, 가운데 원과 안쪽 원에는 조(條)와 간(間)이 각각 180개로 되어 있어서 모든 방위를 360등분하고 있다. 따라서 조와 간 사이는 1°에 해당된다.
제5·6·7폭의 세 폭은 위의 제2·3·4폭과 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여기에서는 황도의 남극을 중심으로 남쪽 하늘의 별들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도 적도가 그려져 있으나, 북쪽 하늘과는 달리 대원의 하단에서 위로 23.5° 되는 점과 대원의 좌우 양끝을 연결하는 반원으로 적도를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대원의 좌우 양끝은 북쪽 하늘과는 반대로 왼쪽 끝이 춘분점, 오른쪽 끝이 추분점이 된다.
제8폭에는 이 천문도 제작에 참여한 6명의 관상감 관원들의 직위와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② 선조대왕어필병풍: 조선시대의 선조대왕 어필 병풍이다. 1758년(영조 34)에 왕이 ‘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 ‘주서무일편병풍(周書無逸篇屛風)’ 등을 법주사에 하사할 때 함께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 병풍은 모두 8폭이며, 한 폭당 크기는 가로 67cm, 세로 190cm이다. 병풍의 글씨는 초서체(草書體)의 붓글씨로, 초서(草書)에 능한 선조가 1631년경에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병풍은 목판본이기는 하나 조선시대의 목판 인쇄 문화와 서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③ 주서무일편병풍: 서무일편병풍은 경서(經書) 중 《서경(書經)》의 ‘주서무일편(周書無逸篇)’을 옮겨 적어 만든 것이다. 병풍을 제작한 시기와 옮겨 적은 이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제작 시기는 1758년(영조 34) 이전으로 추정된다.
병풍의 크기는 총 10폭이며, 한 폭당 가로 73.5cm, 세로 170cm이다. 글씨는 먹을 사용하지 않고 금분(金粉)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④원숭이상
법주사 경내에 불쑥 들어와 있는 원숭이 조각상은 묘한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인도신화에 '하누만'(Hanuman)이라고 불리는 반인(半人)-半원숭이의 상상동물이 등장한다. 인간의 몸을 하고 있으나 원숭이 얼굴상과 긴 꼬리를 지녔다. 변장술에 능해 산처럼 거대한 몸으로 변할 수 있고 고양이처럼 작아질 수 있다.
또 단 한 번의 뜀뛰기로 나흘간을 날아 500㎞의 해협을 건너기도 하고, 거대한 산을 들어올리기도 한다. 신화속의 하누만은 불교 라마왕을 잘 모셔서 마지막에는 불사의 능력을 받게 되었고, 이후 신의 일종으로 숭배되었다.
이 원숭이가 중국으로 건너와 명나라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이 됐다. 바로 손오공(孫悟空)이다. 손오공은 동승신주(東勝神州) 오래국(傲來國) 화과산(花果山)의 영험한 돌의 알에서 출생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강력한 힘이 있었지만 선술을 배우자 더욱 강해져서 10만8천리도 한순간에 날아가는 근두운, 자유자재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여의봉 등을 손에 넣었다.
천계의 신들에게도 대드는 반항아였지만 후에 삼장법사의 제자가 되어 법사와 함께 천축(天竺·인도)까지 여행하여 불교경전을 손에 넣는 일을 도와줬다.
법주사가 예로부터 대웅보전 앞에 원숭이 조각상을 세워놓고 있는 것은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삼장법사가 인도에 가서 불교경전을 가져온 것과 법주사 창건주 신라의 의신(義信) 대사가 서역으로부터 나귀에 불경을 싣고 들어온 설화는 그 상징성에 있어 닮은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대웅보전 앞 원숭이 조각상은 설치연대가 오래 되지는 않았다. 표면이 매끄럽고 때가 거의 묻지 않은 모습이다. 본래 원숭이 조각상은 금동미륵대불 지하에 위치한 성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서유기' 속의 원숭이를 상징하는 조각상은 법주사 말사인 청주 우암산 기슭의 관음사 대웅전 앞에서도 만날 수 있다.
♣ 석조: 720년(성덕왕 19)에 조성되어 법주사가 번창하여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 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30㎝, 길이 446㎝, 너비 240㎝, 두께 21㎝의 대형 화강암 석조로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는 부피를 지니고 있다.
바닥에서 맨 위에 이르기까지 4벽이 수직을 이루고 있으며 안팎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장식이 없어 단조로운 모습이나 윗면의 가장자리를 경사지게 깎아내어 모각이 없게 하였다. 벽체의 두께도 다르게 하여 긴 쪽은 23㎝, 짧은 쪽은 34㎝로 하여 수리적인 비례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남쪽 벽체 바닥에는 지름 11㎝의 구멍이 있어서 실제 용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모서리 일부에 약간의 파손을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 추래암삼층석탑: 전설에 의하면 옛날 수정봉의 산신이 산봉우리를 정리하다 보니 커다란 바위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제멋대로 자리를 변경하였는 지라 괘씸하게 생각하여 "너는 이 수정봉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이다"하고 산봉우리 밑으로 굴려 버렸는데 그 바위가 현재 위치에 떨어졌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하늘나라의 궁전에서 정원사가 돌 사이에 낙엽이 쌓여있어서 그 낙엽을 걷어 내고 바위를 옮겨 놓다가 실수를 하여 지구상에 떨어지게 되었고, 정원사는 기왕에 떨어질 바에야 명산인 속리산에 떨어지도록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떨어져 내려온 바위라 하여 "추래암"이라고 하였다.
10년 전에는 추래암 바위 위에 노송과 돌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노송은 죽고 돌탑만이 남아 있다. 추래암 바위 아래에는 열반굴이 있고 굴속 바위벽 오른쪽에 미륵불 왼쪽에 지장보살상 그리고 바위벽에 南無阿彌陀佛이라 새겨져 있다.
♣ 마애여래좌상: 마애여래의상은 사리각 옆 墜來岩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서 활짝 피어있는 연화좌에 걸터앉아 두 발을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미륵불의상(彌勒佛倚像)임을 알 수 있다. 바위 옆에는 지장보살로 추정되는 불상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전체적인 불상의 모습으로 보아 법상종(法相宗: 미륵신앙)사찰인 법주사의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본래 佛畵를 보고 조각된 듯 보이며, 불상을 조각한 선(線)이 매우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머리 쪽을 보면, 나발(작고 촘촘한 소라모양의 머리칼)이 표현되었고 위쪽에는 육계(둥근 상투)가 돋았으며, 그 가운데에 반달 구슬장식 등 특히, 머리장식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에는 크고 긴 코와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이와 두꺼운 입술이 잘 표현되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고 삼도(목에 있는 3줄의 주름)는 두껍고 진하게 표현되어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준다. 수인(手印: 손모양)은 설법인으로 오른손은 손바닥을 보이며 동그라미를 만들고 왼손은 가볍게 오른손을 받치고 있다. 법의(法衣)는 왼쪽 어깨에만 걸친 형태로 가슴에서 다리 사이로 흘러내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다. 또한, 화사한 연꽃 위에 앉은 자세와 커다란 연꽃잎 위에 발을 올려놓은 모습은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아주 오래전, 추래암에 새겨진 미륵부처의 모습(의자에 걸터앉듯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있는)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드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 마애불 가운데에서도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진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낮은 육계/반달모양 구슬 장식/줄 맞춘 나발)
♣ 마애지장보살의상: 왼손 보주/오른다리 내리고 왼다리 비스듬히 올린 반가상
♣ 암각화: 삼국유사 의해편(관동풍악 발연수 석기조)
중국 최초 불법 전래인 마등과 축법란의 낙양성 백마사 전설과 비슷
포항 송라 보경사의 창건기(사명대사) 유래와도 닮았음.
추래암 암각을 살펴보면 잔등에 짐을 짊어지거나 무릎을 꿇은 소 모양의 짐승들이 분간되고, 승려인 듯한 인물도 분간이 된다. 이 선각들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그것이 『삼국유사』 의해편 ‘관동풍악 발연수 석기’조에 나오는 기사를 그림으로 옮겨 새긴 것이라는 설이다.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으로 가는데 길에서 소가 끄는 수레를 탄 사람을 만났더니 그 소들이 율사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수레에 탄 사람이 내려와 물었다. ‘이 소들이 무슨 까닭으로 스님을 보고 우는 것이며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것입니까?’ 율사가 말하기를, ‘나는 금산수(金山藪)의 진표라는 중이요. 내가 일찌기 변산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미륵ㆍ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戒法)과 참 패쪽을 받았기에 절을 지어 길이 수도할 자리를 찾고자 오는 것이오. 이 소들이 겉은 어리석은 듯하지만 속은 밝아서 내가 계법 받은 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이요.’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짐승도 오히려 이러한 신심이 있는데 하물며 나는 사람으로서 어찌 그런 마음이 없으리오.’ 그는 즉시 제 손으로 낫을 쥐고 자기 머리털을 잘랐다. 율사는 자비심으로 다시 그의 머리를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가다가 속리산 동구 안에 이르러 길상초가 난 자리를 보고 표를 해 두었다.”
한국불교연구원에서 펴낸 ‘한국의 사찰’ 시리즈 『법주사』에서는, 의좌형(倚座型) 불상 오른쪽의 선각을 두고, “음각으로 짐 실은 말 앞에 꿇어앉은 소의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 아마 진표율사가 불경을 끌고 속리산에 들어오다가, 소가 法을 구했다는 전설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싶다.”라고 하여 추래암 선각들이 『삼국유사』의 기사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 선각이 진흥왕 때 법주사를 창건했다는 의신(義信) 스님이 중국에서 불경을 싣고 온 것을 상징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그 두 번 째 설이다.
두 가지 설의 어느 편을 따르더라도 이 선각들은 통일신라시대 내지 그 이전에 새겨진 것임이 분명하다. 『삼국유사』에 기댄 설을 따라 진표의 행적과 결부시킨다면 선각의 제작시기는 경덕왕대인 8세기 후반이 될 터이고, 의신의 법주사 창건과 연계시킨다면 진흥왕 대인 6세기 중반이 될 터이다. 그 어느 경우든 추래암 선각들은 법주사 유물 중 최고령의 것이 된다. 그리고 의신의 창건이든, 진표의 창건이든 간에 법주사 태생의 비밀이 이 추래암 선각에 담겨져 있음도 분명해진다.
☛ 속리산 문수봉에서 시작한 맥은 남으로 천황봉을 돌아 법주사 남산에 이르고 북서쪽으로 문장대에 다다르기 전 남하하여 법주사를 감싸니 형세가 설법을 하고 있는 설법승의 명당 형국이 된다. 그리고 그 형상의 입안에 법주사가 있으니 부처님의 법이 머무르는 법주사가 되는 것이다. 법주사의 창건 신화에는 길상초가 등장한다. 길상초는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개오시(開悟時) 길상초를 깔고 앉아서 수도하고 그 모양이 칼을 닮아 마왕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상스러운 풀이다. 인도나 동남아 국가에서는 이처럼 상서로운 의미의 길상초를 지혜로운 풀이라는 의미와 번뇌와 근심을 없애주는 의미가 있는 식물로 방석을 만들어 사용하면 번뇌를 없애주고 지혜를 주며 집안에 두면 길하고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는 식물.
♣부도: 석상대종사탑비, 금오당태전대종사부도/탑비(1976년)
대선사 진하당비(1927년), 중흥주 탄응당비(1927년)
조선불교조계종 대종사 석상당탑 비문
부처님법이 세상에 알려진지 이천구백일흔여섯해며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옮아온지 일천사백일흔여덟 해이다. 이사이에 닦음이 높고 덕과 배움이 훌륭한 스님네와 왕사국사많 이 나시여 크게 사람을 건져 이롭게하고 부처님 법을 널리 펴셨으나 우리 스님 또한 갸륵한 계행과 우람한 학덕을 갖추셨다.
스님의 법명은 신수요, 법호는 석상, 속성은 장씨이니 충청남도 부여에서 탄생하셨다. 아버지는 인동장씨 홍근씨요 어머니는 은진 송씨시니 그의 세째 아드님으로서 열여덟살 때까지 공자님 글을 모조리 배워 마치시고 열아홉살 적에 강원도 금강산 신계사에서 진하큰스님을 스승삼고 머리 깎고 오계 받아 부처님제자 되시니 곧 청허휴정 스님의 열여섯째 법손이시다.
일찍이 제방학자에 두루 삼장12부를 배워 끝내시고 화두 듦으로 일삼으면서, 금강산 건봉사와 속리산 법주사와 계룡산 동학사의 불교전문강원 주실을 맡아 지내셔 눈푸른 강사를 많이 내셨다. 교리에는 화엄원교에 더욱 밝게 아시여 힘 얻음이 많더니 드디어 교를 버리고 선에 드사 몰록 크게 깨달음을 얻어 선교일여의 지경을 체득하여, 하택 신회선사의 법 바다에 배타고 노니시다가 필경 지해를 멀리 물리치시고 맑은 바람 밝은 달로 벗하고, 우는새 흐르는 물로 짝하여 희롱하고 노니시며, 곳곳으로 중생교화에 여러해 동안 애쓰시되, 꾸밈과 자랑과 치례와 빛냄을 몹시 꺼리는 성질이셨다.
단기4262년 기사부터 제4대 주지를 맡아 12해 동안 법을 위하여 몸을 잊으시니 복천선원의 창설, 절과 포교당의 건축, 대동강습소의 설립, 청년도제의 교육과 및 가산 김수곤거사와 서로 서원을 맺으셔 세계에서 제일 큰 미륵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하셨다.
말하쟎아도 일이 스스로 되어가고 구하잖아도 정재가 스스로 모아졌다. 우리스님 우람스러운 몸집에 진중하고 둥근머리 아늑하고 조촐하시며 아담하고 은은한 얼굴, 사람이 그리워하고 짐승도 딸고저하며 부드럽고 희망 머금은 삶이 있는 목소리, 한갖 믿음의 뿌리며 중생의 숫된 마음을 자아내신다.
수줍은 몸가짐과 조심스러운 말씀과 태도, 그 성스러움을 범할까 사람들이 어려워하며, 높고높은 하늘 밑에 발재겨 디디잖고, 땅두께 한이 없되 가볍게 걸으시며, 땅넓이 갓이 없되 오고감이 드무시며, 누움을 싫어하고 앉음을 좋아하되 책상다리 함을 꺼리시며, 요이불 깔덮잖고 오똑이 누우시며, 아프면 찡그리고 기쁘면 웃어 즐기시되 싫다좋다 함이 없으시며, 꾀도 없고 수도 없으셨다.
이미 늙어 모든 인연을 끊어 돌려버리시고 오직 마음머리를 밝히시는 한편, 정토발원에 골똑히 정진하셨다.
세상인연이 다하여 꼴두아비 몸과 꿈집을 떨쳐버리시고 열반에 드시니 때는 단기 4280년 정해 동짓달 열이틀이셨으니 이제 중된 나이 57살, 속가나이 75살이셨다. 입적하시던날 밤에 몰란 절에 상서구름이 서쪽으로 길게 뻗쳐 희디흰 광명이 하늘에 찔러 솟았었다. 이제 스님의 수행을 높이 본보기 위하여 이때 주지 호광화상이 부도조성을 발기하매 사부대중이 흔연 찬동하여 정재 수십여만원을 거둬모아 스님의 정골탑을 받들어 모시고 다시 한장의 빗돌을 세우니 애오라지 뒷사람을 가르치자 함이요, 스님을 세상에 자랑하려 함이 아니다.
내 이에 스님의 일상의 한모를 법의 한 갈래를 들어 읊주리어 보리라.
빗긴볕 소등위에 피리부는 저 아이야
너의 소 짐 없거든 내아들 실어주렴
싣기는 어렵잖아도 부릴사이 없어라
바람아 부지마라 솔남개 흰꽃 진다
말없는 청산 속에 값 없는 물마시고
산집에 무심한 설월로 함께 놀다가리라
한뉘는 그냥저냥 단칸방 지켜오니
빈칸은 내차지나 반칸은 구름차지
강산은 디릴데 없어 둘러두고 보리라
덧없는 궂세상에 눈같은 맑은 계행
숭없는 싸움적에 메같은 굳은 선정
지혜칼 밝혀들어 옳바른길 가시네
오똑한 둥근부도 영원에 빗드리니
봉오리 높은산도 부끄러워 여기는 양
두어라 돌사람깰까 마음저펴 하노라
숲속에 우는 학이 솔남개 깃들이니
고라니 짓는 밤달 이슬에 젖겻어라
이대로 분명하니 내잠 잡고 가리라
봄바람 부는곳에 마른가지 잎이피고
가을잎 지는적에 돌사람 우짖으네
불기2976년(1949) 을축 5월5일
湖鏡 基煥 撰
法應 圭植 書
* 대처승 강기환 찬(사찰 한글 비문 中 가장 명문)
♣신증동국여지승람: 나무 남근을 깎고 붉은 칠을 하여 속리산여신에게 바쳤음.
조선말 법주사 승려들이 대자재천왕재 후 남근공의를 연희화한 송이놀이가 음란하다하여 폐지.
♣ 한국의 산사 세계유산등재 추진위원회
속리산 법주사 ‧ 순천 선암사 ‧ 해남 대흥사 ‧ 공주 마곡사 ‧ 양산 통도사 ‧
안동 봉정사 ‧ 영주 부석사 - 7개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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