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지역/충청도

청주 용두사터 철당간

참땅 2015. 2. 2. 11:56

용두사터 철당간

 

포항을 떠나 청주에서 터전을 잡은 조카가 스키보드를 타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왼쪽(오른쪽?) 엉치뼈 절골로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다기에 식구들과 청주로 병문안을

다녀오기로 작정을 하고 더불어 몇몇군데 답사 리스트를 잡았다.

어차피 네 식구가 한 자리에 모이기도 힘든 여건상 병문안 핑계로 코에 바람도 넣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오자는 결론을 내렸었다.

 

1시간여 병원에서 잡담하다 갈 길이 멀다는 구실을 잡고 먼저 청주시내에 위치한

용두사터 철당간으로 방향을 잡았다.

중앙공원에 도착하니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인지 무료급식 받으려는 인파 줄이 길다랗게

이어져 있는 입구 즈음에 어찌어찌 주차를 하고 공원을 둘러보았다.

망선루, 하마비, 압각수 등등도 있지만 마음은 오직 용두사터 철당간이었다.

 

(디지탈청주문화대전 펌)

 

국보 제41호인 용두사터 철당간은 청주 중앙공원 동북쪽의 여러 건물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철로 만든 당간이다. 공주 갑사 철당간, 안성 칠장사 당간과 함께 현재 전하고 있는

대표적인 철당간이다. 특히 건립 시기가 명확히 알려져 있는 귀중한 철당간이기도 하다.

철당간의 주변 지역은 이전의 절터로 짐작되지만, 현재는 넓은 광장으로 변하여 관련

유물을 확인할 수는 없다.

 

 

당간은 화강암으로 만든 지주 사이에 끼워져 있다. 당간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으며,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바깥쪽면의 가운데 부분에는 굵게 돋을새김된 선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 앞뒤쪽면의 테두리에는 가늘게 오목새김된 선이 있는데, 바깥쪽면

의 돋을새김된 선과 어울리면서 장식적인 의장을 보인다. 꼭대기 부분에는 안쪽면에서

바깥쪽면으로 약간의 굴곡이 있고, 맨 아래부분에는 널찍한 받침돌과 간대가 놓여 있으며, 당간을 고정시키는 장치인 간구는 꼭대기 부분의 안쪽면에 빗장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다.

 

 

당간은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위아래로 물려 이어지게 만들었다. 아래로부터 세 번째

철통에는 393여 자의 글자가 주조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다. 그것에 의하면,

이 당간은 원래 30개의 철통으로 이루어졌으며, 청주 지역의 호가인 김예종(金芮宗)

사촌형 희일(希一) 등과 함께 철당간을 주조하여 사찰을 꾸몄다고 한다. 특히 당시에는

유행병인 염질(染疾)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부처께 재앙의 예방과 사후의 극락천도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고 하였다.

 

기문에서 유준풍삼년태세임술삼월이십구일주성(維峻豊三年太歲壬戌三月二十九日鑄

)’이라고 하였는데, 준풍은 고려 광종 11년부터 사용한 연호이므로, 이 철당간이 962

(광종 13)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간의 높이는 13.1m, 철통 20(당초 30), 지주는 화강암으로 높이 4.2m, 40cm

. 철통의 지름 43cm, 높이 65.5cm이며, 철당기의 해서체 글자 크기는 2.8cm이다.

본래 30단의 철통으로 높이 약 20m 정도로 지금의 아파트 6~7층 높이에 해당되었지만

지금은 20단의 철통만 남아 있다. 10개는 조선말경 대원군 시절 경복궁 중건을 위해

당백전 주조를 하려고 가져갔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철당간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있다.

팔도를 순례하던 운등사(雲燈寺) 주지 혜원(蕙園)스님이 청주 고을을 지나다가 청주 북

쪽에 있는 율량 객방(栗陽客房)에서 하루 밤 쉬어 가게 되었다. 자정이 넘자 큰 비가 내

렸고 먼동이 틀 무렵 서쪽 하늘에 영롱한 무지개가 다리를 놓은 위로 부처님이 나타나

혜원(蕙園)스님에게 용두사에 들어가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돛대를 세워라

말했.

비몽사몽간에 부처님의 현시(顯示)를 받은 혜원(蕙園)스님은 급히 행장을 수습하여

용두사 주지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도 혜원(蕙園)스님과 꼭 같은 현시를 부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두 스님이 아무리 생각해도 부처님이 현시한 돛대가 무엇을 뜻하

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며칠 뒤 한 초립동이 나타나 목암사에 올라가서 조용히 살펴보

면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고 사라졌다.

혜원(蕙園)스님이 혼자 목암산(牧岩山)에 올라가 초막을 짓고 청주 고을을 살펴보다가

어느 날 밤중에 고을이 북쪽으로 움직이는 착각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 길로 내려와 용두사 경내에 지주(支柱)를 모아 김예종에게 철당간을 세우도록 하였

. 청주는 풍수지리적(風水地理的) 형국이 배가 지나가는 모양인 이른바 행주형(行舟

)이어서 주성(舟城)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청주가 행주형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

이 설명하고 있다.

무심천(無心川)은 청주 시가지를 가운데 두고 석교초등학교 부근에서 동쪽은 서운동,

문화동, 우암동 쪽으로 직류(直流)하여 청주농고 앞에서 서류(西流)하였고, 서쪽은 대체

로 현재의 하도(河道)에 따라 흘러 내덕동 부근에서 두 내가 합류하였다고 전한다.(지금

1939년 및 1969년 무심천(無心川) 제방공사에 의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청주의 지형은 마치 물위에 배가 떠 있는 형상과 같아서 주성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 전설은 당간의 생긴 모양이 마치 배의 돛대처럼 생긴 것을 비유하여 용두사의 창건에

대한 당위성과 명분을 만인의 안녕을 위한 부처님의 자비로 설명하는 기본 모티브를 가지고 있다. 또한 청주의 지형을 배에 비유하여 배에서 중요한 부분인 돛대를 세움으로

써 용두사의 지리적 위치 및 격을 청주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있다.

지금도 용두사지 철당간이 서 있는 위치는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 거리

인 성안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 청주목(淸州牧) 고적조(古蹟條)銅檣 在州城內龍頭寺 寺廢而檣在焉 高十餘丈 世傳 初設州時 用術者言 建此以 表行舟之勢(

당간은 주성 내 용두사에 있는데, 절은 폐사되고 철당간만 남아 있다. 그 높이가 십여 장

이다. 대대로 내려오는데, 처음 주가 설치될 때 술자의 말에 따라 이를 건립하였는데 겉

으로 보기에 배가 가는 형세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라 용두사가 고려 건립

, 즉 통일신라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디지탈청주문화대전)

 

 

 

龍頭寺幢竿記

      前翰林學生金遠撰兼書 鐫者孫錫

早聆幢竿所製餝佛門之玉樓播盖由來

粧寶殿之神旆其猶也鶴翔碧空龍躍

下霄立之者旁發信心望之者心傾丹

愿固知伏魔鐵杖挫賊霓旌頃有堂大

等金芮宗者也州里豪族鄕閭冠族偶因染

疾忽約

佛天仰祈則敬造鐵幢俯擔則莊嚴玉刹然而

難停逝水易沒黃泉已間數歲遲延隔時

容易於時從兄堂大等正朝賜丹銀魚袋

金介一等彼爲還願此繼頹繹令鑄

成三十段之鐵筒連立六十尺之幢柱穿雲

捧日貫霧倚空魯氏雲梯難攀龍盖甘

寧錦纜永敞璅繩可謂奉仁心深典亡情切

植金剛之不朽營玉刹之無窮僕者膠柱頑

流剋舟膚物忽蒙勸我聊表短章其詞曰

幢竿始立天半可壓巧成物像莊嚴佛法兄

弟兩家令脩善業鑄之植之无窮永劫

 

當寺令釋紬大德 檀越兼令金希一正朝金守▨」

金釋同釋希▨ 金寬謙大等監司上和尙信學▨▨」

前侍郎孫熙 前兵部卿慶柱洪大學院卿韓明

寔柰前司倉慶 奇俊大舍學院郎中孫仁謙鑄▨▨

維峻豊三年太歲壬戌二月二十九日鑄成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용두사(龍頭寺) 철당간기(鐵幢竿記)

 

전 한림학생(翰林學生) 김원(金遠)이 짓고 아울러 썼으며 새긴 이는 손석(孫錫)이다.

일찍이 듣건대 당간(幢竿 : 장대를 높이 세워 깃발을 매다는 것으로 불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기 위해 사찰이나 법당 앞에 세움)이 만들어진 바는 불문(佛門)을 꾸미는

옥같은 표지이며 번개(幡盖 : 깃발로서 불보살의 위덕을 나타내는 장엄 도구)의 유래는 법당을 장엄하는 신령스런 깃발이라 하였다. 그 모양은 학이 푸른 창공을 날아오르고

용이 푸른 하늘을 뛰쳐 오르는 것과 같다. 세운 사람은 크게 신심(信心)을 일으키고 바라

보는 사람은 반드시 충정의 정성을 기울일 것이니 진실로 마귀를 항복받는 쇠지팡이요

도적을 물리치는 무지개 깃발임을 알겠다.

근래에 당대등(堂大等 : 고려 향리 중의 최고위 직함. 983년에 戶長으로 바뀜) 김예종(

芮宗)이라는 이가 있으니 고을의 큰 가문이요 지방의 손꼽히는 집안이다. 우연히 병에

걸려 문득 부처와 하늘에 약속하기를, 우러러 철당간을 삼가 만들기를 빌고, 엎드려 훌

륭한 사찰을 장엄할 것을 맹서하였다. 그러나 세월은 멈추기 어렵고 죽음에 빠지기는

쉬워 그 사이에 몇 년이 늦어지고 때는 쉽게 멀어졌다. 이때에 종형인 당대등 김희일(

希一) 등이 저쪽에서 돌이킨 서원이 되게 하고 이쪽에서 끊어진 인연을 이어 마침내 30

단의 철통을 주조하게 하고 이어 60척의 당주(幢柱)를 세웠다.

구름을 뚫고 해를 받들고 안개를 관통하여 공중에 기대어, 노반(盧班 : 수레에 사다리를

달아 성을 공격하는 도구를 만든 사람)의 사다리로도 용개(龍盖)에 오르기 어렵고 감녕

(甘寧 : 오나라 사람으로 호사를 즐겨 비단으로 배를 묶음)의 비단 밧줄로도 옥돌줄을

당하기 어렵겠다. 죽은 이를 받드는 마음이 깊고 망한 이를 일으키는 정이 간절하여,

금강의 썩지 않음을 심고 옥찰(玉刹)의 무궁함을 영위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아교처

럼 완고한 사람으로 어리석고 천박한데 문득 나에게 권유함을 입게 되어 겨우 짧은 글을

 나타낸다. ()에 이르기를,

당간이 처음 서서 하늘 가운데에 미치니

공교롭게 물건의 모양을 이루어 불법을 장엄하도다.

형제간의 두 집이 합쳐 선업을 닦아

주조하고 세우니 영겁토록 무궁하리라

 

이 절(용두사)의 영()은 석주(釋紬) 대덕(大德)

단월(檀越) 겸 영()은 김희일(金希一) 정조(正朝), 김수(金守), 김석희(金釋希)

(大等 : 고려 향리의 유력자 직임으로 당대등에 이은 둘째 직책. 성종 때 副戶長으로

이름이 바뀜), 김관겸(金寬謙)

감사(監司)는 상화상(上和尙) 신학(信學), ▨▨, 전시랑(前侍郎) 손희(孫熙) 대등, 전병

부경(前兵部卿) 경주흥(慶柱洪) 대등, 학원경(學院卿) 한명식(韓明寔) 나말(柰末 : 나마

(奈麻), 신라의 17관등의 11관등), 전사창(前司倉) 경기준(慶奇俊) 대사(大舍 : 신라 17

관등의 12관등), 학원낭중(學院郎中) 손인겸(孫仁謙)

주대▨▨(鑄大▨▨)

 

준풍(峻豊 : 고려 광종의 연호, 960~963) 3(962, 광종 13) 임술년 229일에 주조하

여 완성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