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해의 전설과 비지정 문화재를 찾아(1)
참새미(참샘), 참새이, 냉천(冷泉)
참새미 우물은 없어졌지만 메워버린 그 터 곁을 감나무만이 홀로 지키고 서있습니다.
성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약 200여년 전에 회덕황씨의 선조가 터를 잡아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마을에 사람이 살게 되고 당장 먹을 물이 필요하게
되자, 이 마을 사람들은 샘을 파기로 하고 물이 많이 나오는 곳을 찾아내는
옛 풍습대로 놋그릇에 물을 떠 새벽별 3개가 비치는 곳을 찾아 이곳을 다닌 끝에
지금의 우물이 있는 곳에서 새벽별 세 개가 어리었다고 한다.
제를 지내던 제당자리가 주위 과수원과 밭에 둘러싸여 그 흔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큰 소나무가 있었음은 이 터가 신성한 장소였음을 충분히 대변하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기뻐하며 그 장소에 우물을 파고 애써 판 우물의 맛을 좋게 하고자
신라 27대 선덕여왕의 피부병 치료로 널리 알려진 천곡사의 물길을 끌어들이기로
하고 두루미(물 긷는 항아리)에 천곡사의 물을 담고 삼을 드리워 마을 우물까지
물을 조금씩 흘리며 물길을 표시해주자 천곡사의 물의 한 지류가 이 물길을 따라
마을 우물로 찾아 들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이 곳 우물의 물이 매우 차고 맛이
좋아 유명해지자 마을 사람들이 참샘이라고 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마을
이름으로 불러지고 있다.
수십년 전에 그 명맥이 단절되었음은 옛사람들과의 정보소통 부재이리라...
이 물길이 당시 동네의 농업용수이었음을 지금의 사람들은 알고나 있을지...
원래의 터전 성씨였던 황씨는 단 2세대뿐이고, 장씨/권씨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음력 6월 15일 우물 옆 돌 제단에서 동제를 지냈으나 90년대 중반부터 동제는
지내지 않고 제당은 폐허가 되었고 바로 옆 자리에 달전제일교회가 들어섰다.
벌샘이(伐泉·羅泉)
저 사다리 언저리즈음에 물이 솟아 나왔고,
망천리 마을회관 옆에 물이 솟아나는 큰 샘이 있어 벌샘이라 하였다. 한때 동부면
사무소가 있었다. 500여년 전 영일정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을 일구었다고 하는데,
마을 한가운데에 벌샘(伐泉)이 있어 원류가 매우 활발하여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여름에는 매우 차고 겨울에는 매우 따뜻하고 맛이 좋아 음료에 적합하고
또 오래 복용하면 장수한다고 하여 이 샘을 나천 또는 벌천이라 하였다고 한다.
물은 흘러 흘러 동네 아낙들의 빨레터가 되었건만,
지금은 폐수처럼 혼탁한 물로 변해버려 쓸모없는 亡川이 되어버렸습니다.
전에 두 번이나 벌샘을 찾아 다녔으나 허탕질했건만 오늘은 우에 이리
쉽게 찾을 수 있었는지 - 아매도 인연이 될라카이 이리 되는가 싶습니다.
길 가운데 솟아있는 그 나무는 이리도 당당하였음에...
벌샘이 북쪽에 400여 년생 회화나무가 한그루 남아 있고 그 앞에 화짓 대배기란
터가 있는데 영일 정씨 성검(晟儉)이란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그 집에 화짓대(솟
대)를 세웠던 곳이라 전하며, 그 북쪽 옛 서당 부근에 윤리학당(倫理學堂)이 있었다.
벌 샘이 옆에 울림석(蔚林石)이라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길을 낼 때 묻어버렸다고 한다.
벌샘이 곁 제당에서 정월보름날 제사를 지내왔으나 3년 전에 폐지하였고 지금은
제당마저 없어져 버렸다.
대원사
칠포 관방성이 건축되면서 기존의 사찰이 폐지되었고
한참이나 지난 1945년도에 새로이 창건된 사찰입니다.
이제 룡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 보렵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합니다. 지처럼 입구에서 벗지 마시고 내부로 쫌만 들어가면
신발장이 따로 있습니다. 천불전 현판이 보입니다.
천불전을 지나 계속가면 계단이 나오고
이제 완전한 룡의 내부입니다. 주위로 불상과 불화 그리고 이상한 사진과 액자의 그림이
즐비하게 나열된 통로가 이어집니다.
불상은 주로 석가여래, 지장보살, 관음보살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단정한 지장보살은 자비의 미소를 품고.
평탄한 통로에서 이제 오르막 게단이 나타납니다.
여기가 끝인데, 대세지보살이 '여까정...' 하며 아쉬움을 표합니다.
원래는 룡의 옆구리에서 대웅전 통로가 있었는데, 지금은 문을 폐쇄하였습니다.
벽면에는 십이지상을, 평방에는 룡과 박쥐를 그리고 창방에는 범어를 넣었습니다.
오봉산 봉수대(오봉대)
쳐다보기만 했던 오봉산 봉수대 터를 오늘은 기어코 - 그래도 늘 혼자였습니다.
빗돌이 왜 깨졌지, 했는데 시멘트였네요.
그나마 제대로된 빗돌은 손에 꼽을 정도.
산꼭대기에다 산소를 모셨다는 건, 절손될 위험성이 높은데...
아마 산정이라도 평탄한 구역이 있어 그런갑다 싶습니다.
여기 오봉산 공동묘지에서 유일하게 상석을 갖춘 산소입니다.
봉수대 터안에도 어김없이 산소를 썼습니다.
오봉산 봉수대(석축을 했던 흔적이 높이 4m, 지름 20m정도 남아 있다.)
지금은 이 주위가 마을 공동묘지로 되어 있어 공동묘지산이라 부르고 있다.
옛날에는 심한 가뭄이 들면 공동묘지산과 곤륜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곤륜산은 건너편 칠포리암각화가 있는 산입니다.
산 아래에서 보면 홀로 우뚝하니 서 있던 그 소나무를 이제 바로 앞에서 봅니다.
저 아래로 오도리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여기 공동묘지에서 비머리 가첨석을 갖춘 제대로 된 비석이 또 유일합니다.
이것 또한 유일무이한 비라고 해야 할까요?
박능일비: 흥해 우목리 죽천초등학교 동편 바닷가에 있습니다.
朴能一(1859.2.29.~1917.7.20)의 號는 無號이며 본관은 月城으로 군위군 우보면
호포리에서 출생하여 朴春立공에게 修學한 후 德業을 성취하였다.
국운이 쇄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왜병이 우리 강토를 휩쓸고 다닐 때 국권회복을
위해 충심을 불태웠으나, 나라의 운세가 점차 기울어져 국권이 왜놈들에게 수침 당함에
의분을 참지 못해 죽음으로서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맹세하고, 흥해읍 우목리 마을앞
바위 위에 [擧其事而生 不若 蹈海而死 朝鮮逸民 朴能一]이란 글자 열아홉자를 새겨놓고
바닷물에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나니 그 해가 1917년 여름이었다.
지금은 영일 신항만 공사로 인해 바위는 파묻혀 버렸다.
폐허된 해안초소를 지나 대밭앞에 있습니다.
원래의 터는 아래 해안 쪽으로 십여미터 바닷가에 있었는데
신항만 공사로 이건되었습니다.
朝鮮逸民無號 朴能一蹈海碑(조선일민무호 박능일도해비)
안내간판은 온통 하이얀 백지입니다.
할말이 너무 많아 다 쓸 수 없기에 이렇게 백지인 상태로... 설마?
멀리 흥해까지 당도하여 의분으로 자결을 한 박능일선생은 이 코알의 현실을
저 세상에서나마 보고 있을까요?
여기 마을 사람들은 정부로부터 보상금과 이주를 약속하였지만 지금 이주약속은
전혀 이루어지질 않아 적막강산 마을로 변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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