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곡사 부도
- 2002년도와 2015년도 비교
승탑군(부도밭) 진입로도 깨끗이 정비하였지만 옛맛은...
여기는 깔끔합니다.
바람을 막아주고(장풍), 햇볕이 깊게 들어오는 양지바른 곳...
2015년
몸체부 탑신 같지 않은 부재에서 거의 완전한(?) 몸체를 갖게 되었습니다.
2002년 문화유적분포지도
雲華堂 浮屠
부도군의 전열 좌측 첫 번째에 위치하며 부도비를 갖추었다.
종형부도로 탑신석은 파손이 심하며, 옥개석과 연화문이 새겨진
탑신받침을 갖추었다. 크기는 하대석 가로90㎝·세로80㎝·높이10㎝,
연화문이 새겨진 부분은 아랫지름52㎝·높이12㎝,
연화문 하대석은 윗지름45㎝·높이15㎝, 옥개석은 폭90㎝·높이80㎝이다.
파손으로 인하여 비신의 일부가 결실되었다.
비석 전면에는 ‘…五十八年, 雲華堂大師…信浮屠碑, 己亥五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크기는 폭34㎝·잔존높이33㎝·두께12㎝이다.
2015년 - 2002년도 사진과 비교하면 부재 한 기가 추가되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좌측 운흥당부도의 탑신을 추가하며 원래 탑신으로 추정하였던 부재를
계영당부도의 상대석(?)으로 끼워 넣은 것 같습니다.
2002년 문화유적분포지도
桂影堂 浮屠: 1737년
부도군의 전열 좌측 두 번째에 위치하며 부도비를 갖추었다.
부도는 방형의 기단부 위에 연화대좌를 놓았으며,
상부에는 종형의 탑신석이 남아있다. 탑신석 위에는 부도비석편이 얹혀 있다.
부도의 크기는 받침 가로75㎝·세로73㎝·높이6㎝, 연화대좌 지름68㎝·높이25㎝,
부도 탑신부는 폭40㎝·잔존높이26㎝이다.
비신의 일부만 잔존한다. 비석 전면에는 ‘淸雲堂 八..., 桂影堂宇, 乾隆2年...’
이라고 쓰여 있다. 비석의 크기는 폭33㎝·잔존높이 34㎝·두께12㎝이다.
2015년
泉谷寺事蹟碑: 1689년
절 입구 바깥쪽 길가에 세워져있던 것을 최근에 경내로 옮겼다고 한다.
비석은 부도군 전열 중앙에 위치하며, 정면 상단에는 ‘泉谷寺事蹟碑’,
아래에는 ‘事蹟記’가 새겨져 있다. 비는 깨져 둘로 나뉜 것을 시멘트로 접합시켰다.
비신의 크기는 폭55㎝·높이142㎝·두께 20㎝, 비좌는 가로73㎝·세로46㎝·높이5㎝이다.
역사 속 1689년: 숙종은 원자 정호 사건을 빌미로 1689년 기사환국을 단행했다.
서인을 물리치고 남인을 재등용한 것이다. 조정은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
남인 차지가 되고 송시열의 상소문을 기화로 100여명 이상의 서인이 쫓겨났다.
특히 기사환국은 인조 때부터 조선 후기 사상사, 정치사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송시열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2015년
아래 사진과 비교하면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측편 월하대선사부도의 중대석, 상대석을 大○堂浮屠에 합체하였습니다.
그래도 몸체는 찾지 못햇는가 봅니다.
2002년 문화유적분포지도
大○堂 浮屠: 1740년
부도군내에 위치한 부도로 탑신부가 없으며, 상륜부가 없어진 팔각형 옥개석과
기단부가 있다. 두께 폭90㎝·높이35㎝, 받침 가로78㎝·세로58㎝·높이5㎝,
대좌아래 지름48㎝·높이20㎝, 대좌 위 지름40㎝·높이14㎝이다.
부도비에는 ‘大○堂大師社惠, 乾隆五年庚申三月, 海月堂法弟…’이라고
글씨가 새겨져 있다. 부도비의 규모는 폭32㎝·두께10㎝·높이67㎝이다.
2015년
허~걱. 몸체가 확 바뀌고 몇몇 부재가 자리를 바꿔 잡았습니다.
어디로~?
2002년 문화유적분포지도
月河大禪師 浮屠: 1743년
부도군의 전열 좌측 다섯 번째에 위치하며 부도비를 갖추었다.
탑신석이 결실되었으며 현재의 부재들도 원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받침석 가로100㎝·세로90㎝·높이6㎝, 대좌 아랫지름58㎝·높이16㎝,
대좌 중대석 지름36㎝·높이18㎝, 대좌 상대석 지름52㎝·높이16㎝,
옥개석 가로72㎝·세로68㎝·높이80㎝이다.
비좌를 갖추었으며, 비석 전면에 ‘月河大禪師塔, 乾隆八年癸亥二月二十日立’
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좌크기는 가로58㎝·세로32㎝·높이14㎝, 비신은 폭31.5㎝·높이72㎝·두께7㎝이다.
2015년
2002년 문화유적분포지도
淸波堂 浮屠: 1744년
부도군의 후열 좌측 첫 번 째에 위치하며 부도비를 갖추었다.
종형부도로 사각형 옥개석과 상륜부가 있다.
크기는 하대석이 가로110㎝·세로115㎝·높이15㎝,
탑신받침은 중앙지름 80㎝·높이7㎝, 탑신석은 지름80㎝·높이78㎝,
옥개석은 가로80㎝·세로85㎝·높이85㎝이다.
비석 전면에 ‘桂影堂門人, 淸波堂大師雷善, 乾隆九年甲子五月日立’
이라고 새겨져 있다. 크기는 폭39㎝·높이70㎝·두께8㎝이다.
2015년
2002년 문화유적분포지도
榲雪堂 浮屠
부도군의 후열 좌측 두번째에 위치하며 부도비를 갖추었다.
종형부도로 탑신석은 파손이 심하며, 옥개석은 결실되었다.
크기는 하대석 가로80㎝·세로70㎝, 연화대좌형 받침석은 아랫지름50㎝·
윗지름45㎝·높이32㎝, 탑신석은 지름50㎝·잔존높이63㎝이다.
비석은 현재 파손된 상태이다. 비석의 양쪽 모서리부분은 귀접이했고,
전면에는 ‘淸虛堂…,榲雪堂…,乾隆…’라고 새겨져 있다.
크기는 폭34㎝·잔존높이33㎝·두께12㎝이다.
2015년
옥개석 처마부분에 팔괘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으로 보입니다.
2002년 문화유적분포지도
月風堂 浮屠: 1716년
부도군의 후열 좌측 세 번째에 위치하며 부도비를 갖추었다.
종형부도로 팔괘가 표현된 팔각형 옥개석을 얹었으며 상륜부가 있다.
크기는 지대석이 가로80㎝·세로68㎝·높이13㎝, 하대석 지름60㎝·높이20㎝,
신부 지름55㎝·높이62㎝, 상륜부 폭80㎝·높이80㎝이다.
비석 전면에 ‘月風堂大師法淸浮屠前碑, 康熙五十二月丙申二月日’
이라고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비석을 세운 제자와 시주자의 이름이 있다.
크기는 폭33㎝·높이66㎝·두께14㎝이다.
2015년
2002년 문화유적분포지도
三谷堂 浮屠
1703년 부도군의 후열 좌측 네 번 째에 위치하며 부도비를 갖추었다.
부도는 팔각원당부도로 탑신부는 모를 죽인 팔각형이며,
사각형의 옥개석을 얹었고 보주가 있다.
크기는 하대석 가로110㎝·세로86㎝·높이10㎝, 탑신부 가로50㎝·세로46㎝·
높이82㎝, 옥개석 가로88㎝·세로 82㎝·높이44㎝이다.
비석은 받침을 갖추었으며 전면에는 ‘樹雲堂大師寶暹, 三谷堂大師自小吾舍利碑,
康熙四十二年癸未十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부도비의 크기는 비좌 가로 54㎝·세로34㎝·높이12㎝,
비신은 폭 37㎝·높이70㎝·두께12㎝이다.
2015년
옥개석 처마 모서리에 풍탁을 달았던 구멍 흔적이 보입니다.
2002년 문화유적분포지도
海月堂 浮屠: 1715년
海月堂 浮屠는 부도군의 후열 좌측 다섯 번째에 위치하며 부도비를 갖추었다.
종형부도로 사각형 옥개석과 보주를 갖추었다.
크기는 하대석이 가로96㎝·세로80㎝·높이26㎝,
탑신받침은 윗지름66㎝·높이10㎝, 탑신석은 지름56㎝·높이72㎝,
옥개석은 가로70㎝·세로75㎝·높이53㎝이다.
부도비 전면에 ‘淸○堂七代之法孫, 海月堂大師楚一浮屠前碑,
康熙五十四年乙未十二月日立’라고 새겨져 있다.
크기는 비좌가 가로60㎝·세로40㎝·높이12㎝,
비신은 폭40㎝·높이90㎝·두께17㎝이다. - 문화유적분포지도 포항시편 참고.
♣ 康熙: 1662년부터 1722년까지 사용.
♣ 乾隆: 1735년부터 1795년까지 사용.
♣ 조선 영조(1724~1776), 정조(177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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