噴玉亭(분옥정) 현판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는 신라 왕손인 경주 김씨 ‘치동문중’(致洞門中)의 집성촌이다.
입향조 일암(逸庵) 김언헌(金彦憲)이 청도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울창한 산림을 손수
벌채하고 터전을 잡으니 벌치동(伐致洞)이 된다. 그러나 벌 자의 어감이 거칠게 느껴져
벌 자를 떼어내고 치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때가 1636년(인조 14년) 공의 나이 27세
되던 해 늦가을이었다.
윗대는 충청도에 살았다. 고조 십청헌 김세필(金世弼)이 크게 현달하여 연산‧중종 양조
의 문신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다가 그나마 임진왜란으로 가세가 다소
기울어진 것 같다. 따라서 사헌부 집의(종3품)를 지낸 아버지 김업(金嶪)이 가족을
이끌고 청도 금천으로 이거했다. 공은 집의공(執義公)과 어머니 숙부인 문화 류씨
사이에 1609년(광해군 1년) 삼 형제 중 차남으로 청도에서 태어났다.
치동은 기계천의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흘러 농사짓기에 알맞고, 뒤쪽은 봉좌산이
우뚝 솟아 계곡이 깊어 은거에 좋은 곳이다. 공이 이곳에 자리 잡은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그들에게 인조(仁祖)가 무릎을 꿇고 아홉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당했으니 아마도 공은 그런 환란으로부터 스스로 몸을 지키고자 미리
이곳을 점지했던 것 같다.
공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면서 명문의 후예답게 자기 수양과 자녀 교육,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1682년(숙종 8년) 돌아가시니 향년 73세였다.
공의 이러한 후손들을 위한 배려가 헛되지 않아 증손 돈옹 김계영(金啓榮)에 이르러
빛을 발했으니 1693년(숙종 19년) 마침내 약관 19세에 생원시에 급제했다.
그러나 이듬해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몰락하고 정권이 노론으로 바뀌는 등
세태가 어수선하자 돈옹 역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했다.
그의 각오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용추의 상류 용계를 따라 50m쯤 이목골 여울의 바위에
새겨진 세이탄(洗耳灘)이라는 음각문자에서 알 수 있다.
중국의 고사 영수세이(潁水洗耳)가 말하듯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결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뜻을 변하지 않는 바위에 새긴 것이다.
이후 낙재 태노(泰魯)가 다시 진사에 급제하고, 하곡(下谷) 김시원(時元), 학파(學坡)
김시형(時亨) 형제가 1768년(영조 44년) 남덕재(覽德齋, 판서 홍기섭의 친필 현판)를
건립해 후학 교육에 힘을 써서 한적한 시골 마을에 글 읽는 소리가 넘치면서 문향으로
자리 잡았다.
입구부터 범상치 않은 것이 입향조가 심은 큰 소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고,
관지(觀之) 김종해가 심은 보기 드문 뚝향나무도 있어 잘 다듬어진 잔디밭과 함께
경내가 아주 정갈했다.
분옥정은 돈옹의 학덕을 기리고자 관지가 후학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기거하던 집터를
선뜻 내 놓고 김종한이 여러 종인을 참여시켜 1820년(순조 20년)에 지은 정자다.
여느 정자와 달리 출입은 건물 뒤편으로 하고, 앞면은 계곡물을 향하게 배치하였다.
또한,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T자형 평면을 갖춘,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이 정자 건축 연구에 자료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누마루에 앉아 보면 서북쪽 계곡에 가지가 아주 많은 만지송이 있어 정자의 품격을 한껏
높여준다.
- 포항시사 참고
遯翁亭記 - 驪江 李紀曦
양동마을 여강이씨 생원 이번(李蕃)과 영의정으로 추증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그리고 좌승지로 추증된 수암(守庵) 이응인(李應仁), 이응인과 아내 경주 손씨 이조판서
중돈(仲暾)의 증손녀 사이에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의온을 낳았고, 그의 종후손이 이기희이다.
이기희는 1850년경 7세손 원주(源胄)와 先祖 이의온의 시문집을 편집, 간행하기도 하였다.
花樹亭記 - 萊伯 尹景鎭
1767년(영조 43)~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치행(穉行)이다.
본관은 坡平이고, 거주지는 漢陽이다.
증조부는 윤동설(尹東卨), 조부는 윤광택(尹光宅), 부친은 윤미기(尹美基)이다.
외조부는 이돈중(李敦中), 처부는 김재진(金在鎭)이다.
1804년(순조 4) 식년시 진사에 3등 26위로 합격하였으며,
1809년(순조 9) 증광시에 을과 4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헌납(獻納)‧도청(都廳)‧동래부사(東萊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1815년(순조 15) 홍문관의 교리(校理)‧수찬(修撰) 등을 추천하는 홍문록(弘文錄)‧
도당록(都堂錄)에 뽑혔다.
1827년(순조 27) 동래부사를 역임하면서 일본의 간파쿠[關白]가
손자를 낳았다는 소식을 알리고자 파견한 사신이 도착하였다는 것과
이에 역관 파견과 예단 마련 등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요청을 담은
장달(狀達)을 조정으로 올려 보냈다.
花樹亭追韻 - 八世孫 性煥
龍溪精舍 - 酉當 金魯敬
花樹亭記 - 右相 金道喜
김도희(金道喜) 본관 慶州人, 1783~1860 - 추사 김정희와 6촌
조선의 문신. 자(字)는 사경(士經), 호(號)는 주하(柱下), 시호는 효헌(孝憲),
판서 노응(魯應)의 아들. 1813년(순조1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설서(說書)·참의(參議)를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올랐으며,
이어 경기도 관찰사·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역임, 1938년 형조 판서를 지내고,
1842년(헌종 8) 우의정, 1843년(헌종 9) 좌의정, 뒤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1945년(헌종 11) 흉언죄인(凶言罪人)의 처리와 조선에 온 영국군함의
처리방침 및 죄인을 타도로 정배하는 일을 형조에서 관장하지 못하게 하고,
서원을 함부로 건립하는 것을 금하였다. 51년 실록총재관이 되어 《헌종실록》을
편찬하였다.
문헌(文獻)
1. 1364대 한성부윤 김도희(金道喜): 헌종 8년(1842)12월25일
2. 평택시 진위(振威): 김도희(金道喜) 본관(本貫) 경주(慶州) 자(字) 사경(士經)
호(號) 주하(柱下). 진위(振威)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 건립1837
3. 현풍 현감·군수 선정비: 현풍면 성하리 달성군민체육관 옆
김도희 순상국 현풍 현감·군수 선정비 <1841년>
순상국김공휘도희영세불망비 <1841년>
4. 진위(振威)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경기도관찰사 건립1837
登噴玉亭有感 - 谷山 韓奉夏
追呤 - 宗門 世煥
月湧碧川流 달이 솟으니 푸른 시냇물 흘러가고
山高白老休 산이 높으니 백발노인 쉬어가네
遯翁原深托
生鳳勢遐投
富貴非君事 부귀는 그대가 쫓을 일 아니며
文章爲代謨 문장은 대를 이어 꽤해야 할 일!
人心靜能慮 사람의 마음은 고요해야 생각이 깊어지고
物理勤相求 사물의 이치는 움직여야 탐구할 수 있다네
噴玉亭 - 六世孫 泰魯
噴玉亭韻 - 完山 李垕
噴玉亭 - 驪江 李鼎儼
이정엄(李鼎儼) 본관 여강(驪江). 을해(乙亥)1755년 생, 호는 남려(南廬).
진사(進士) 관직,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으로 良洞九曲을 지었다.
정조(正祖) 19년 (179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3위
噴玉亭韻 - 月城 李英雨
이영우(1853~1913)
경주 이씨 이제현의 후손으로 형조판서 碧梧 李時發의 10손이다.
자는 文則, 호는 隱松, 1863년(철종 4년) 고령군 출생.
고문서 경매카페에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경신년 4월 이영우(李英雨)가 수급자 미상에게 문안과 가족의 생활 형편을 염려하며 보낸
간찰(簡札)
경신(庚申)년 4월 친척인 이영우(李英雨)가 보낸 간찰(簡札)이다. 간찰은 친척이나 스승,
친구, 동문 등과 주고받은 편지로 서찰(書札)이라고도 한다. 형식은 대체로 서두 인사,
근황 및 가족 동향 여쭈기, 자신과 가족의 안부 전하기, 현안 설명 및 부탁 사항, 마무리로
구성된다. 인편을 통해 보내준 서찰에 대해 즉시 답장을 올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여러 가족의 근황이 궁금하다고 하며 평소 여러 가족의 일상 생활 형편에 대해 염려하였다.
자신과 가족의 안부를 전하고 마무리했다.
噴玉亭韻 - 達城 徐暎均
花樹亭 - 酉當 金魯敬
噴玉亭 - 秋史 金正喜
聽流軒 - 秋史 金正喜
天止齊(?) - 미상
유당 김노경의 호와 낙관은 있지만 추사 김정희의 호와 낙관은 없어 안타깝습니다.
'포항 > 비지정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항의 지명의 유래 (0) | 2016.01.14 |
---|---|
포항 천곡사 승탑(부도) (0) | 2015.12.09 |
포항 기계의 바위에 새긴 글자 2기 (0) | 2015.12.03 |
구룡포읍 후동리를 찾아서 (0) | 2015.03.31 |
오어사 시주비 (0) | 2015.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