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에 하마비가 있네요.
그렇게도 극성스럽게 불가마 같던 한여름 무더위가
물러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가을이 왔습니다.
송광사 청량각을 지나 일주문 방향으로 가다가
‘절에도 하마비가 있는가?’
송광사에는 성수각이 있었는데 현재의 관음전이다. 임금님과 왕비, 왕세자나
빈궁 아니면 왕대비의 안녕을 기원하던 일종의 원당인 셈이다.
그런 전각이 있으니 충성심 강한 조선의 관리들이나 선비들이 감히 말을 탄 채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 이를 어기지 못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관음전 계단 소맷돌- 룡의 모습을 조각한 것 같은데... 해학스럽기만 하다.
조선 왕조에서는 궁에 내불당을 짓고 예불을 하던 세종대를 지나면 차츰 궁내의
불당이 사라지게 되나, 왕이나 왕비, 왕세자 또는 세자빈이나 원자가 아프거나 하면
치성을 드려 부처님의 원력에 의지하려 하였다.
그 방편이 명산대찰에 원당 한 채씩을 지어 기도처로 삼았다 한다.
왕비나 왕실 사람들은 유림들의 눈을 피해 드나들기가 거북하므로 숭유억불의
국시를 어기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상궁을 파견하여 대신 기도하게 하였다.
그런 원당이 선암사에서는 원통전이고 송광사에서는 성수각 이었다.
향우측에 붉은 해가, 향좌측에 하얀 달이 반쯤 보인다. 좌우도 모두 벽으로 꾸몄다.
송광사의 성수각은 후에 변화가 있었지만 지금의 관음전이 그 자취인 것이라 한다.
관음전 중앙칸 뒷벽에 불단이 있다. 보통의 불단인 수미단은 좌우에 벽이 없이
노출되어 있고 뒷면에만 후불벽을 만든다. 그에 비하여 이 불단은 좌우로 벽을
쳐서 마치 아늑한 방처럼 꾸몄는데 이를 감실이라 하고 그 안에 다시 신주를
구성하였다. 신주 좌우벽에 색색의 구름과 서기가 서린 중에 붉은 해와 밝은 달이
중천에 떠 있는 그림을 그렸다. 이는 불교적이라기보다는 궁실의 성격이 농후하다.
닫집도 특이하다. 자세히 보면 아랬부분을 잘랐던 흔적을 볼 수 있다.
감실의 벽은 두껍게 종이를 발라 종이벽으로 하고 괴석과 잘 생긴 나무와 꽃을
그렸다. 앞뒤의 네 면씩 여덟 폭의 그림이 있는데, 중방 위로는 화조도 14면을
중방 이하 14면에는 관복 입은 고위관리가 조복을 입고 홀을 손에 쥐고 국궁배례를
하고 있다. 임금님이 입어하신 조회에 나아가 하는 광경과 꼭 같다.
관리들 그림 위에는 정일품, 정이품, 정삼품 등의 품계도 방기하였다
조선조에서는 억불정책으로 지방관원들의 가렴주구가 심하였다. 종이 만들어 내라,
먹 만들어 다오, 비석이라도 깨서 벼루를 만들어야겠다는 등의 무리한 요구에다
서원 세력에 의탁한 사림유생들 횡포도 만만치 않았단다.
수련을 지속해야하는 승려에게는 보통일이 아니었기에 그런 곤욕에서 벗어나길
갈망하던 차에, 절에 원당이 들어서고 내명부와 외명부 직첩의 여인들이 드나들자
그 기회를 이용하려 하였을 것이다. 부처님 공경하는 나라의 재상 모습을 그리고는
지방 관리나 선비들이 포학하려 할 때 슬며시 끌고 와서 이 벽화를 보여주면
‘아코 뜨거라’
하늘처럼 우러러보는 정승 판서들이 다 공경하고 있는 마당에 지가 야료 부리기가
어렵게 되면 자연 그런 심한 요구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해석이다.
몸체 목부분에 룡 머리부분을 따로이 조각하여 끼원 넣었다.
고종황제 51세를 기하여 성수망육(聖壽望六)을 축하하기 위해 [기로소입참례연]을
베풀면서 1902년에 원당으로 지은 건물이나 막상 공사가 시작된 것은 이듬해인
1903년이었다.
송광사에는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위한 원당이 있었으나 1803년에 용흥사로
옮겨 갔으며 성수각이 관음전으로 바뀐 것은 1957년 10월이었다고 한다.
(신영훈의 역사기행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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