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지역 비지정 문화재모니터링
추워도 너~무 추운 날
따신 방에 이불 뒤집어쓰고 하루 왼 종일을 TV 리로콘만 붙들고 있으려니
어쩐지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한심해 보이기도 하여
전에부터 짚어 두었던 기계방면으로 나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운루정, 도원정사, 봉계리 치동 고인돌, 진각종 최초 설법지,
삼락정, 효자 손선호비, 학계정, 학고정, 계전리 고인돌을 순서로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홀로 길을 나섰습니다.
도원정사는 일전에 한번 네비로 길을 잡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어
감(?)을 보태기로 하고 우선 운루정을 첫 목표로 삼았습니다.
기계면사무소에서 뒤편 보면 낮은 산 중턱쯤에 자리한 건물이 운루정입니다.
雲棲亭(운루정)은 기계에 세거한 월성이씨의 재실로 정면4칸 측면2칸인
남향으로 팔작지붕에 홑처마이며 가구는 3량가 건물입니다.
좌측 2칸과 우측 1칸이 방이며 나머지는 대청으로 사용하고 있다는데(포항시)
언뜻 봐서는 전부 방처럼 보입니다. 아마 현판이 걸린 곳을 대청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본데, 잠겨져 있어 문을 열어보지 못해 확인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청 안쪽에 崇敬堂(숭경당)이라는 현판도 있다는데 아쉽게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기둥 주초석은 약간의 인공을 가미한 원형초석과 자연석 덤벙주초석을 기초로
사각기둥을 세웠습니다. 대청에 놓여있는 나무 재떨이가 인상적입니다.
운루정을 나서는데 우편으로 고택이 눈에 잡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습니다.
전에 네비로도 찾지 못했던 도원정사였습니다.
桃源精舍는 월성이씨 기계 입향조인 이말동(李末仝)이 조선 성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진사가 되었지만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껴 기계로 내려와
은거하면서 호를 도원이라 하며 후학들을 가르쳤던 곳이라 합니다.
두봉산 끝자락에 위치한 건물의 구조는 정면5칸 측면2칸 남서향으로
팔작지붕에 홑처마이며 가구는 5량가 입니다.
기둥 주초석은 가공한 원형주좌초석과 자연석 덤벙주초석으로 원형 두리기둥이며,
좌우 1칸씩을 방으로 나머지 중앙은 대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건물 좌우와 뒤쪽으로 툇마루를 내었고, 좌측 방의 뒤로는 퇴칸을 내기도 하였으며
정면에 桃源精舍, 향우측방에는 三畏齊, 향좌측방에는 山澤軒 현판이 있습니다.
건물 앞 정원은 연못을 조성하였고 중앙으로 다리를 놓아 솟을삼문에서
다리를 건너갈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어 특이한 방식입니다.
마치 불교에서 마음을 씻는 다리 세심교가 생각납니다.
뒤편으로 돌아보니 관리인이 해놓은 듯 무씨래기는 줄에 걸어 놓고,
배추씨래기는 툇마루에 늘어놓아 한창 말리고 있는 중 입니다.
다음 이동지는 봉계리 치동인데 날씨가 엄청 춥습니다.
손가락이 얼얼하니 얼어 터질 듯 합니다. 돌아갈까 싶기도 합니다.
봉계리에는 마을 당나무와 함께 고인돌이 있어 일석이조의 답사지 입니다.
봉계리 치동은 1637년 경주 김씨가 칡숲을 치고 마을을 일구었기에
벌치동(伐致洞)이라하던 것을 줄여서 치동이라 하였답니다.
고인돌과 당나무는 봉계1리 치동 마을입구 소나무 숲에서 왼쪽으로 자리한
논에 위치하며 향나무와 귀목나무 등 나무 몇 그루와 함께 고인돌군이 있습니다.
이중 가운데 큰 고인돌 앞에 있는 나무가 당나무이며,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에
동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고인돌은 총 5기가 있어 5형제바위라 부르기도 했는데
지금은 4기가 온전하고 1기는 거의 반파상태로 되어 있습니다.
따갑도록 매운바람은 귓불을 때리고 아리도록 매서운 발톱 같은 바람은
손가락 마디마디를 끊어 놓을 듯 합니다. 근데 저 짝 가까운 거리에 또 뭔가
보이는데, 계단과 난간 테크가 보이니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걸어갈까 하기에는 너무 추워 감당하기에 버겁고, 차량으로 움직이자니
또 그런 거리인지라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훅~ 하고 바람을 맞아 차량으로
냅다 뛰어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거기로 향했습니다.
선돌메바위 전설
옛날 치동마을에 와아들과 같이 사는 노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중병을
앓게 되었다. 아들은 약을 구하러 집을 나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늙은 어머니는 마을 어귀에 있는 이곳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빌면서
기다리다 선 채로 굳어 돌이 되어 ‘선돌메’ 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선돌메에서 큰 구렁이를 보았다는 사람이 많은데, ‘약을 구하러 갔던 아들이
돌아와 구렁이로 변하여 선돌메를 지키고 있다‘ 고 전해지고 있다.
전혀 생각지도 않게 뜻밖에 마주친 선돌메바위는 하나의 행운이었습니다.
전설의 알싸한 내용보다 이 선돌메바위를 지키는 관리차원에서 계단과 관람시설
테크와 안내판을 세운 기계인들의 문화적 관심도에 더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렇게 지역의 문화를 지키고 가꾸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파악하고
산재해 있는 문화자원을 적극 경제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에 저도 관심이 많은터라
기계인들에게 새삼 존경의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이제 불교 진각종 대종사의 최초 설법지인 계전리로 네비를 잡으니 기북으로
향하다 산을 넘어가는 길로 가잔다. 이런...
온전히 산 하나를 굽이굽이 돌고 돌아, 가도 가도 인적 없는 비포장길을
4km 정도 가니 산 아래로 마을이 보였다. 아무래도 느낌상 네비가 좋잖은
길을 갈카 준 것 같아 괜히 네비양에게 속은 기분이다.
계전리 마을을 지나는 자전거 하이킹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기계에서
오는 포장된 좋은 길이 있단다. 버스도 다닌단다. 일타카이~
심인진리 초전법륜지
이곳은 대한불교 진각종을 세우신 진각성존 회당대종사께서
심인진리를 처음으로 설하신 초전법륜지이다. 회당대종사
께서는 불기 2446년 5월 10일 울릉도에서 법신불의 화신으
로 몸을 나투시고, 불기 2491년 세수 46세 때 5월 16일 경북
달성군 성서 농림천에서 육자대명왕진언 옴마니반메홈의
수행정진으로 법신비로자나불의 심인진리를 대각 하신 후,
동년 8월 17일 이곳에서 중생교화의 첫 죽비를 드셨다. 이곳
은 진각종 4대성지 중의 하나로서 대중의 마음에 큰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법음의 시원이자 진언행자들에게는 영원한
신앙의 귀의처가 되고 있다.
진각종 사대성지 중 한 곳인 이곳은 대구 달성 농림촌에서 대각을 성취하신
진각성존 회당 대종사(손규상)는 그 해 교화지를 이곳 계전리로 옮겨
문중교화로써 최초로 죽비를 울려 법신불의 진리를 이 땅에 전하셨다.
이곳에서 '마음 공부', '마음 닦는 공부'등의 쉽고 신선한 불법으로 민중들을
깨우쳐 큰 감화를 불러 일으켰다. 종단에서는 진기 41년부터 이곳을 새로이
중수 단장하여 진각종사의 새암으로써 진언행자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했다.
(진각종 홈에서 발췌)
제가 다니고 있는 위덕대학교도 진각종에서 설립한 학교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여기는 오래전부터 오고 싶었던 곳이기도 하기에
오늘 뜻 깊은 답사지가 되었습니다.
위편으로 재실 같은 고택이 보여 사당인가 하였는데 ‘계동서당’입니다.
해묵은 향나무 세 그루가 인상적인데 담장에 바짝 붙은 배롱나무도 나잇살을
꽤나 먹은 득 싶습니다. 잠긴 문 옆으로 오르는데 문득 손에 잡히는 철쭉.
쪼매만한 것들이 서로 붙아 가지고 멀 할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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