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원불
사명대사 원불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9호
사명대사 원불은 1800년 남공철이 찬한 ‘사명대사기적비(四溟大師記積碑)’에서
처음 알려지고, 1912년 조선총독부가 건봉사 낙서암 전송운대사에게서 불상을
촬영함으로써 대성사 불상이 사명대사 원불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자료를 남겼으며,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1932년) ‘보물조’에서 사명대사 원불의 존재가 다시금
확인된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대대적인 폭격으로 건봉사는 물론이고 사명대사
관련 유물이 대부분 소실되었고, 이 불상도 우리 기억에서 사라지는 듯 했으나
2006년 조사를 통해 다시금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금동여래좌상은 높이 9.4㎝ 크기로 고려 말, 조선 초 왕실발원으로 금강산 일대에서
많이 조성된 불상 중 하나로 추정되며, 6 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거의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당시에 유행했던 라마계의 불상양식을 취하고 있는데 원만상일 뿐만 아니라
완형이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대좌는 2중의 연화대좌 위에 편단우견의 대의를 입고
결가부좌를 한 모습이다.
나발로 된 머리 중앙에는 육계가 높이 솟아 있고, 육계의 정상에는 연꽃봉오리 모양의
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또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의 법의를 입고 있으며, 법의의 주름은 굵고
비교적 고르게 표현하였다.
수인을 살펴보면 왼손은 선정인 모양을 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촉지인을 결하고 있다.
대좌는 꽃잎이 위로 향한 앙련과 아래로 향한 복련이 연접한 2중 연화좌인데 꽃잎
가장자리는 선각하여 사실감을 강조하고 있고 꽃잎 사이에 다시 둥근 꽃잎무늬를
양출하여 입체감 있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2중의 연화좌는 고려 말에 유입된
라마교 불상양식의 영향이다.
비록 높이 9.5㎝의 소규모 불상이나 안정적인 비례감을 지니고 있고 세부표현도
매우 치밀하게 이루어져 있다. 고려말 라마계 양식을 잘 소화시켜 크기는 작지만
당당하고 품격 높은 예술성과 종교적 이상성이 잘 어우러진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현 사명대사 원불 1912년 조선총독부 촬영사진
포항 대성사에서 발견된 이 금동여래좌상은 주지 운봉스님이 은사 해봉스님에게 받아
보관해 오던 것으로 2007년 ‘불교문화재 일제조사 사업’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대성사 주소: 포항시 북구 용흥동 540-4)
불상 복장에서 나온 원장(願狀)은 1584년 12월 16일 40세에 쓴 것으로서,
승려로서 자신의 염원하는 바를 묵서명으로 한지에 자필로 써내려갔다.
원장의 크기는 21(가로)×20.1(세로)㎝로서 이것을 꼼꼼하게 접어 불상 안에
보관해 왔다.
사명대사 원장(願狀: 부처에게 소원을 써서 기도할 때 부처 앞에 바치는 글장)
釋迦如來遺敎 弟子四溟沙門維政歸依 석가여래유교 제자사명사문유정귀의
三界師生父天中天聖中聖 삼계사생부천중천성중성
大雄猛大威德慧日破有大慈悲父以此歸 대웅맹대위덕혜일파유대자비부이차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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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生七趣諸有漏趣成就正身拨(?)濟群 사생칠취제유누취성취정신발(?)제군
有聞我名見我形廳我言者成就慧 유문아명견아형청아언자성취혜
身者 신자
萬曆甲申12月16日弟子維政願狀 만력갑신12월16일제자유정원장
(다음카페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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