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곡서당과 석리 답사
석곡선생 종부님의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좌부터 종부님, 강병우선생님, 신상구교수님, 권혁창선생님, 왕승호선생님
01월 11일 경주시에서 ‘왕의 길’ 홍보책자를 출판하여 배부한다는
김환대님의 얘기를 듣고 신상구교수님과 통화를 하다
올해부터 포항의 ‘열린포항’에 포항의 명소를 연재한다며 명소 추천얘기에
갑작스레 이루어진 석곡선생 답사는 계사년 세 번째 모니터링이 되었습니다.
목판각- 현재는 360장 정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익히 알고 있었던 석곡서숙과 석곡선생의 묘소를 중점으로 잡았기에
별 부담 없이 나선 길이었지만 신교수님과 동행하게 되었음은
얕은 지식으로 무장한 같잖은 상식 수준의 우리에게는 또 한편 조심스런
답사임에는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인문학이라는 좀처럼 다가가기 힘든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넘기 힘든 영역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판각한 목판 중의 하나- 인체 내부를 묘사한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훈구와 사림간의 권력투쟁, 조선시대 그 사림 또한 영남과
기호 양대사림으로 나누어진 배경, 그 와중 속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경주 양동포항의 사림, 그러나 석곡선생은 지금 그 어디에도 학맥을 찾기
힘들지만 의학계에서 만큼은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기에 우리가 더 존경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학문을 이룬 이곳 포항에서 조차 철저히 외면 당하다시피하다가
불과 얼마 전부터 새로이 부각되기 시작한 석곡선생에 대한 관심도는
가히 포항에서 만큼은 포은선생보다 더 우위(?)라고 여겨집니다.
거친 약재를 찧는 절구- 가는 약재용은 따로 있답니다.
당시 사용하던 맷돌
디딜방아용 돌확
청하에 살고 있던 석곡선생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형님(또는 사촌형)댁에
얹혀살다가 이 곳 석동으로 주거를 옮겼지만 여전히 형편이 넉넉지는 않아
주위의 도움으로 근근이 학문의 길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합니다.
현재 석곡선생 종부댁에 보관 중인 목판각은 360여장이며
당시 유물로는 거친 약재를 찧던 돌절구, 맷돌, 디딜방아에 사용하던 돌확 등이
마당에 남아있으며 목판각의 보관에 애로움이 많다고 하십니다.
목판각 3장을 보여주시며 이런저런 얘기 끝에 차 한잔 하고 가라 하셨지만
괜히 번거로운 수고를 끼치는 게 죄송스러워 사양 후 종부님과 헤어졌습니다.
동네 가정집 내 뒤편 채전밭에 모신 바위- 근래까지 할머니가 빌던 장소인데,
지금은 안 한답니다.
그 집 마당에는 바위구멍이 새겨진 넓적돌도 있답니다.
동네 뒤편 야산 밭에 묻힌 바위에도 바위구멍이 새겨져있습니다.
이 동네의 민속신앙 제당으로 할매돌입니다.
아마 할배돌은 좀 더 뾰족하지 않았을까...
석곡서숙이 있는 동네는 돼지산 남쪽 현재 포항-구룡포간 신도로와 구도로 사이에
끼여 있는 마을로서 안돝골과 바깥돝골로 나누어진 바깥돝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돼지산 밑에 있으므로 猪洞이라 하였는데 나중 음이 변하여
독골, 돌골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석동이라 하였으며 예로부터 마을을 감싸고 있는
돼지산 때문에 돼지사육을 금기시 하여 왔다고도 합니다.(포항시사 참고)
그러나 어쩌면 돌이 많아 石里로 불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특히 바깥돝골에는 인면암각이 새겨진 바위, 지금도 동제당으로 모시고 있는
선돌(할매돌), 같이 모시던 할배돌은 안타깝게도 신도로 공사 때 파괴되어
버렸지만, 그리고 석곡서숙과 지척 가정집에 모셔 놓고 근래까지 빌던 바위가
있으며 또한 그 집에 잘생긴 바위구멍이 있는 조그만 바위, 동네 뒤편 경작된
밭에 속살을 묻어버린 바위에 무수히 새겨진 바위구멍 등등 이러한 것들이
동네 이름과도 무관하지 않지 싶습니다.
점심은 약전 사거리 현대횟집에서 횟밥을 먹었는데 이 집은 그나마 단골들이
많아 꽤 유명한 곳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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