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내연산

[스크랩] 이내 삭신 호석이 되게 해주사 - 내연계곡 답사기

참땅 2009. 9. 7. 14:11
 

답사 동선 길에 좀처럼 잘 따라 나서지 않는 애들 엄마가 따라나선다기에

모처럼 일찍 일어나 된장국이며 점심에 먹을 음식을 챙기며 부지런을 떤다.

집사람을 꾸역꾸역 데불고 포항종합운동장 호돌이상 앞으로 출발을 한다.

포항지역에서 산행이나 소풍가는 사람들이 즐겨 애용하는 운동장 주차장이다.

넓기도 하거니와 주차비 걱정이 없어 적어도 포항 사는 사람이라면

대개가 이용하는 곳이다.

정토님, 삿갓님과 만나 명찰 받고 자료집도 챙겨 버스에 올라서니 널찍하다.

좌석 앞에 발받이 받침도 있고 편리하기가 그저 그만이다.

솔직히 이런 관광버스는 처음 타본다.

모처럼 운전에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답사길

나섰던게 언제적 이런가... 기분도 유쾌, 상쾌, 통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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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읍성터 - 현재 청하면사무소를 중심으로 장방형의 성벽이 빙 둘러싼 형태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 없어지고 그나마 면사무소 내에는 공덕비 몇 기가 줄지어 서있고

바로 맞은 편 청하초등학교 북동편 담벼락에 성벽이 조금 남아 있어

그 옛날 읍성의 흔적을 겨우 찾을 수 있다.

그 중 성벽 돌에 새겨진 금석문 두 글자.

어느 서예가님은 ‘지암’ 즉 복돌이라 해석하고

경주박물관장님은 ‘예안’ 즉 안동 근교의 지명으로 해석 하였단다.


청하읍성은 겸재 정선이 2년 남짓 현감으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지만

‘교남명승첩’ 상, 하권의 화첩을 완성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겸재 선생님이 청하현감 시절에 청하를 중심으로 그린 작품은

모두 5점인데, ‘청하읍성도’ ‘내연삼용추도1,2’ ‘내연산폭포도’는 진경산수화이고,

다른 한점은 ‘고사의송관란도’ 로서 관념산수화이다.

그 중 청하읍성도의 그림을 보면 읍성 내 나무들 중 중앙에 위치한 뿌리가 퍼진 나무는

현재 면사무소 마당에 있는 회나무와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청하읍성도 그림속의 나무가 이 나무가 맞다고들 하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어 단지 추정만 할 뿐이란다.


다시 성벽의 금석문 두 글자로 되돌아 가보자.

‘지암’ 이라 해석하면 복돌 즉 성벽을 쌓을 때 축원, 축수하는 형식으로 새겨 넣었으리라.

‘예안’ 즉 안동근교 지명이라면 청하읍성을 쌓을 때 인근 연일, 오천, 안동 지방 사람까지

역부들을 동원하였다는 기록과도 거의 일치하는 셈이지만 정확한 글자를 해석할 수 없어

단지 추정만 할 뿐이다.

이 금석문이 이때껏 드러나지 않다가 작년 포항 KYC 답사 때 한 회원이

발견하였다는데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눈에 바로 띄는 곳에 있기도 하거니와 글자도 뚜렷이 보이는데 말이다.


다시 버스는 내연산 보경사 주차장으로 향한다.

보경사 입구 들목에는 양편 길가로 식당들이 즐비하게 들어 서있다.

집집마다 손칼국수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근 동네 할무이를 알바로 고용하여

식당 입구에 앉혀 놓고 칼국수 미는 시늉을 하고 있다.

말로는 손칼국수집 식당이지만 한두집 빼고는 거의 다가 기계로 빼는 칼국수다.

어쩌면 긍정적으로 노인고용 일자리 창출효과로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 질라나.

   

내연산 - 옛 문헌에는 ‘종남산’이라 하였단다.

지금도 보경사 입구 매표소 입구 못 미쳐 ‘종남산 대련암’ 이라는 개인사찰이 있어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버젓이 큰 절집 보경사 입구에서 시위라도 하듯 문패를 달았으니 말이다.

겸재 선생님의 화첩에 내연산 그림 4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더욱 유명해진

내연계곡은 ‘금강산에도 없는’ 기이한 풍광으로 뭇 옛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온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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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 지나 보경사 입구에서 등산길로 접어들자마자 서운암 가는 길 한쪽 켠에

‘한흑구문학시비’가 있다.

한때 그의 작품 ‘보리’가 교과서에 실리기도 할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지만

선생님의 작품 보리와는 영 딴판인 보경사에서도 외지고 축축한 이곳에

이런 시비는 어울리지 않는다.

호미곶 해맞이 공원이 생기기전이라 달리 세울 장소를 찾지 못하던 차에

다행히 보경사에서 한쪽 터를 마련해주어 겨우겨우 세울 수 있었다하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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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등산로로 진입하여 걸음을 옮긴다.

계곡도 바위투성이고 내리밟는 길바닥도 온통 돌덩이를 깔아 놓아

등산화를 신지 않은 발바닥은 서서히 열이 나기 시작한다.

그즈음 우측으로 큰 바위가 나타나고 바위 아래로 비석 하나가 객들을 맞아 준다.

‘혜릉참봉파평윤공만형씨개보송덕비’

이 비는 보경사 옆 내연계곡의 물길을 바로 잡아 수로를 개보수한 한 관리에게

그 공을 치하한 송덕비이다.

즉 내연계곡의 물을 수로로 끌어 농사짓는데 유용하게 썼으며

관에서 관리를 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이와 똑 같은 비석이 보경사 아랫마을 서정리에도 한기가 더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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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참을 더 가니 내연산신인 할무당 할매의 전설을 간직한 산신제터가 나온다.

왼새끼로 꼬아 만든 금줄이 쳐져있고 새로 봉안한 위패 2기가 모셔져있다.

‘내연산대왕신지위’ ‘고모당신지위’

원래는 할무당 할매만을 모셨으나 얼마 전 새로 위패를 모시면서 할매가 외로울 것 같아

할배 대왕신을 새로 모셨단다.

자고로 신이 외로우면 산 사람들이 괴로울 것 같아 신을 외로움에서 벗어 드리고자

산 사람들이 할배신을 중매한 것이란다.

원래의 할무당 터는 내연산 삼지봉에서 문수봉 올라가는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는데

너무 멀고 험하여 제사지내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단다.

그리하여 지금은 보경사 입구 매표소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면

대전3리 마을이 나오고 거기서도 산계곡으로 더 들어가면 할매를 모시는 할무당이 있단다.

원래 이 할매는 보경사에서 잡일을 맡아하는 보살이었는데 자신이 죽음에 임박했음을

알자 매일 부처님께 ‘내 육신을 호석케 해주사’ 하고 빌었단다.

호석이란 호식(虎食)의 옛말이다. 즉 호랑이에게 자신의 육신을 보시하게 해달라는 말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할매가 사라진 것을 알고 온 천지사방을 돌아 찾아보니 문수봉 아래에서

옷과 신발을 발견하고는 할매가 소원대로 호랑이에게 육신을 바쳤나보다 하고

이 할매가 보통 할매가 아님을 짐작하고는 마을 주민들이 그 자리에 할매당을 짓고

매년 음력 삼월 보름에 인근 14개 마을에서 계를 조직하여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단다.

지금은 겨우 3개 마을에서 매년 사월 초파일 새벽에 제를 지낸단다.

그 옛날 엄청났던 할무당 계는 이제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이니 점점 사라져 가는

우리네의 민속신앙 사료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쩌면 할무당 할매는 옛날을 그리워하며 점점 잊혀져가는 자신이 안쓰럽기도 할 것이리라...

이 전설에 나오는 ‘호식’이라는 말은 보경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금방 어디서

듣던 얘기인데 할 것이다.

보경사 경내에 있는 원진국사비의 주인 원진국사 얘기와도 흡사하니 말이다.

허나 원진국사도 자신의 육신을 호랑이에게 보시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따지지는 말자.

보경사 인근 모든 마을에서 지금도 이 할매를 모시는 할무당에서 제를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산신제터를 뒤로 하고 등산길을 벗어나 외진 곳을 돌아서니 곳곳의 기암괴석들은 가히 장관을 이룬다.

연산폭포까지 몇 번을 다녔어도 지금처럼 웅장한 장관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 길이 원래의 옛날 사람들이 밟고 다니던 길이란다.

바로 저 산길 끝에는 옛 님의 숨결이 스며 나오는 그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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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암 - 큰 바위로 인해 길이 좁아졌음을 말한다.

큰 바위 아래 감실 2개가 있고 한쪽 감실 안에는 비석이 1기 있다.

비석 1기안에 2명의 스님 이름이 각자 되어 있는데 왜 경내에 있지 않고

절집을 한참이나 벗어난 이곳에 세워졌는지 그 사연은 기막히기도 하다.

그 옛날 내연계곡을 유람하려고 많은 선비관리들은 이곳을 다녀갔으리라.

그러나 그 귀하신 양반님네들이 오죽 걸어서 다녔겠나...

높디높은 가마위에 올라타고 풍광을 관람하는 허세를 무척이나 부렸으리라.

허나 길은 바윗길 험하디 험하여 맨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곳인데...

관내 현감은 관찰사 어른의 눈치를 살피느라 절에다 대고 ‘가마가 드나들 수 있는 편안한 길’

닦으라 명했을 터, 그러니 부처님 모시는 절집의 승려인들 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더구나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정부의 눈치 살피기에 급급하였으니 하여

가마가 나다니기에 좋은 길로 넓히고 닦아 보수한 그 스님네의 공덕(?)을 치하한 비석이란다.

비석과 마주한 바위 위에다 ‘나무아미타불’도 새겨 주는 알량한 자비도 베풀고...


바위를 올라타고 물길 거슬러 올라가니 저 앞으로 떠억 병풍바위가 멀리 모습을 드러낸다.

등산로를 벗어나 걸으니 답답함은 사라졌는데 가는 길은 만만치가 않다.

숲길을 바로 벗어나니 쌍폭이라 불리 우는 제1폭포가 앞을 가로 막는다.

사자쌍폭, 사자폭, 쌍생폭 이라 불리 우기도 한다.

폭포수 아래로는 사자담, 폭포 좌측으로 ‘기화대’가 우뚝 솟아 있다.

옛날 한 선비가 사자폭 옆 높은 암벽바위에 올라가 기생과 춤을 추다

실족하여 떨어져 죽었다 하여 ‘기화대’라 한단다.


보현폭, 삼보폭포가 연이어 나타나고 ‘선일대’가 그 자태를 내 보인다.

선일대는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정상부 약간 너른 터에는

암자터며 대나무밭도 있고 기와편도 있어 사람이 거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단다.

거의 수직암벽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라 암벽등반 코스로 애용하며 간혹 등반사고로

숨진 사고도 생겨 정상부에는 숨진 산악인의 비석도 있단다.


조금 더 가니 ‘용담’이 나온다.

여기서 룡이 선일대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단다.

산을 뚫고 올라간 흔적이 지금도 있어 룡의 전설을 뒷받침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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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 하는 폭포소리가 멀리서도 들리는 잠룡폭포.

용이 숨어 지내는 폭포라 -

장쾌하다. 찬바람이 끊임없이 불어불어 쏟아진다.

땀으로 뒤범벅 된 온몸의 열기를 단번에 씻어 준다.

내연계곡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폭포란다.

연산폭포보다 더 우람하다.

겸재 선생님의 그림 중 ‘내연삼용추’라 함은 잠룡폭포, 관음폭포, 연산폭포를 일컫는다.

그 첫 번째 등장하는 것이 이 폭포이다.

한참을 쉬고 나서 폭포 옆 바위를 위태 위태 올라가니 무풍폭포가 나온다.

비록 겸재 선생님 그림에는 생략되었지만 이곳도 엄연히 폭포다.

무풍 즉 바람이 없다는 폭포인 것이다.

내리 떨어지는 폭포수 앞을 둥그런 감실이 막고 있어 바람이 거기서 막혀버린 까닭이다.

폭포수 옆에는 관찰사 누구누구 각자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에 고의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지워진 흔적이 있는 이름이 있다.

길눈이 선생님이 조사를 해보았더니 똑 같은 이름이 두 군데 새겨져 있는데

그나마 한곳에는 희미하게나마 글자의 윤곽을 알아볼 수 있어 ‘최봉환’임을 확인했단다.

최봉환 이 사람은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가로서 꽤 명망이 있었는데 아마 일제시대에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글자가 파내졌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단다.

내연산 계곡에는 전부 340여개의 이름들이 각자 되어 있는데

그 중 청하현감을 지낸 사람의 이름이 20개 정도,

경상 관찰사가 14개 정도이며 약 70여개의 이름만이 신원을 확인할 수 있고

나머지는 그저 그런 이름이란다.

관음폭 입구 다리 우측 바위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부친 ‘순사 김노경’의 각자도 있고

그 뒤로 학소대가 우람하니 버티고 있다.

정상에 ‘계조암’이 있어 '계조대‘라 불리우다 지금은 학소대라 명명하고 있다.

관음폭은 중폭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암벽에 ‘경북팔경’이라는 글자 새겨져 있다.

이는 1933년에 대구일보가 진남교반(문경), 문경새재(문경), 주왕산(청송), 금오산(구미)

청량산(봉화), 희방폭포(영주), 빙계계곡(의상) 등과 함께 내연산 보경사를 경북팔경으로

선정한데 따른 것이다.

관음폭에서 연산폭으로 다닌 옛길에는 사다리를 놓아 오르내렸으며 사다리를 놓았던
바위에는 무수히 많은 이름들이 새겨져있는데 그 중 ‘유숙’이라는 이름도 있다.

이 사람은 귀양 온 관리였으며 꽤나 세도가 있었는지 귀양 온 처지에 내연산 나들이도 하고

더구나 이름을 새기는 여유까지 부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연산에는 총 8개의 수수께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단다.

전서체(맞나?)의 이 글자 중 한 글자는 ‘추’자로 추정했지만 나머지는 전혀 추정이 안 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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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폭 - ‘장쾌하고 아리땁되 어둑하고 검푸르죽죽하여 차마 쳐다볼 수가 없다.

그 남쪽 학소대는 하늘을 찌를듯 바위가 사면으로 깎였는데...‘ - 성해응의 ’동국명산기‘에서

내연산 계곡 폭포 중에 가장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며 감탄해 마지않는 곳이다.

계곡 초입에서 연산폭까지 2.7km - 돌바닥 등산로를 따라 비지땀을 흘려가며 힘들게 올라

온 고생한 만큼의 보상을 단번에 충분히 받고도 남을 만큼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장대한 물줄기는 소름이 돋도록 찬바람이 온 몸을 휘감는다.

찬바람을 쐬며 여유를 즐기는 사람 숲을 헤치고 ‘정선 갑인추’라는 각자를 찾아보니,

다른 글씨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작고 희미하다.

글씨를 커다랗게 새긴 사람들은 그래도 당시 권력이 꽤나 있었던 사람이었는지

아직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지만 정작 우리가 존경 해 마지않는 겸재 선생님의 글씨는

각자를 할 때 일부러 작고 희미하게 새겼는지 아니면 풍화로 인해 퇴색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겨우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하게 남아 있어 애처롭고 안쓰럽기조차 하다.

그러나 그 자리를 빨리 떠날 수밖에 없었으니... 관광객이 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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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폭 아래로 내려와 다리 건너 비하대로 올라가는 산길 초입

우측 큰 바위에 재미있는 각자가 또 있다.

옆으로 길게 ‘동영장 심응준’ 그 옆에 곡강위 누구, 오천위 누구, 관찰사 이광정 각자가 있고

맨 좌측 끝에 좀 작은 글씨체로 ‘경기달섬’이라는 각자가 보인다.

즉 경상도 기생 달섬이라고 해석한다.

곡강위는 곡강현, 오천위는 오천현의 두 관리가 경상도 관찰사를 모시고 유람을 나셨는데

관의 기생이 하나 따라 붙었겠지.

이리저리 유람하다 ‘대감 이름 하나 넣으시죠?’ 하여 곡강, 오천, 관찰사 새기고 나니

옆에 있던 경상도 기생 ‘나으리 지꺼도 하나...’ ‘오냐, 옛다 니도 새기 뿌라’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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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프가 매달린 산길을 힘들게 올라가니 비하대가 나온다.

관음폭 꼭대기이다.

일반 비석 2기가 있고 비석 뒤 바위 위에는 ‘비하대 대산 이상정’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원래의 기록에는 ‘중허대’라 하였는데 1753년에 연일현감을 지낸 ‘대산 이상정’이

‘비하대’라 명명하여 오늘날까지 그렇게 부르고 있다.

비하대 - 신선이 날아 내려온 곳.

위에서 내려다보니 가히 신선이 머물만한 곳이겠다.

옆으로 조금 옮겨 서니 ‘고사의송관란도’ 의 나무와 거의 흡사한 소나무가 비스듬히 서 있다.

진경 산수화는 실제 풍경을 그린 그림이고, 관념 산수화는 상상으로 그린 그림인데,

겸재 선생님이 그린 ‘고사의송관란도’는 상상의 그림이긴 하나 비하대 위의 소나무는

그림속의 소나무와 정말 닮았다.

저 소나무에 기대어 신선을 흉내내보고 싶어도 아래로는 까마득한 절벽이라 무서웁기 그지없다.


내연산 답사라 할 때 보통은 보경사 경내의 절집을 둘러보고 부도만 보고 하던

정해진 답사 길을 다녔었는데 이번 답사 길은 정식 등산로를 벗어난 그 옛적 옛님의 길을 따라

한발 한발 톺아 본 내연계곡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꼴에 답사 다닌다고 큰 소리만 쳤지 정작 포항의 명산인 내연산을 눈꼽만치도 모르면서

허세를 부렸으니 이번 기회에 다시한번 자성을 해본다.

정말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고 많은 깨달음을 일깨워준 답사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기록이랄지 소감이랄지 모르겠으나

이렇게라도 흔적을 남겨 놓지 않으면 절대 후회 할 것 같아 급하게 답사후기로 대신한다.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보일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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