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한문 배우기

민화가 : 천용자

참땅 2020. 12. 13. 19:15

天慵子歌

 

天慵子字天慵。            천용자의 가 천용인데

千人競指爲癡憃。        뭇 사람들 어리석다 손가락질하기 바쁘다네.

生來不用巾網首。        평생 머리에 갓 망건 써본 일 없고

對面蓬髮愁髼鬆。        마주 대해서 보면 헝클어진 쑥대머리 모양 짠하다네.

酒不經脣直入肚。        술이라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입술에 닿자마자 바로 마시는데

不省甛酸與醨醲。        달건 시건, 묽건 진하건 아예 상관치 않고

稻沈麥仰斯無擇。        쌀 술, 보리술 가리지 않고 다 마시며

淸如猫睛濁如膿。        고양이 눈 같은 청주도 고름 같은 탁주도 다 좋다고 하네.

肩荷伽倻琴一尾。        어깨에는 가야금 하나 꼬리처럼 둘러메고

左手一笛右一筇。        왼손에 피리 들고 바른손엔 지팡이라.

春風妙香三十六洞府。  봄바람이 불면 묘향산 서른여섯 골짝 찾고

秋月金剛一萬二千峰。  가을 달밤이면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라.

彈絲吹竹劃長嘯。        가야금 뜯다가 피리도 불다가 휙 긴 휘파람도 불다가

雲游霞宿無停蹤。        구름 떠돌듯 노을 잠들듯 정처 없는 발걸음

山行朴朔搜林覓睡虎。  산길 가다 새벽녘 회초리로 숲 뒤져 잠든 범 찾아내고

水行砰訇碾石駭湫龍。  물길 가다 우르릉 꽝 넙적 바위 굴려 못 속 용 놀라게 한다네.

去時綿裘施行丐。        돌아갈 때 입고 있던 무명옷 벗어 걸인에게 주고

換着敗衣襤褸無完縫。  바꿔 입은 낡은 옷 성한 곳 하나 없이 남루하니

歸來入室妻苦詈。        돌아와 방에 들 땐 여지없이 아내의 싫은 소리.

嚗嚗叩地叫天摽其胸。  박박 역정 내길, 땅 치며 하늘에 대고 하소연하고 제 가슴을 치지만

天慵子默不答。           천용자는 묵묵부답이라.

俛首摧眉順且恭。        고개 숙이고 미간만 찌푸린 채 공손한 자세로세.

道拾一拳怪石至。        길에서 주먹만 한 괴석 하나 주워 와서

方且解橐摩弄如璜琮。  자루를 막 끌러 옥돌인 양 비비며 가지고 놀다가

飢來走鄰屋。             배고프면 이웃집으로 달려가

乞飮新醅一二三四鍾。  새로 빚은 술 한 잔, 두 잔, 석 잔, 넉 잔 얻어 마시고

酒酣發高唱。             얼큰하면 목청 높여 노래 부르니

激者中夷則徐者中林鍾높은 음은 이칙[동양음악에서 9번째 음]이요, 느린 곡은 임종 [동양음악에서

                                8번째 음]이라네.

歌竟索紙蘸筆爲墨畫。   노래가 끝나면 종이 찾아 묵화를 치는데

畫出峭峰怒石急泉與古松가파른 봉우리 성난 바위 경사 급한 여울목 그리고 늙은 소나무를 그리는데

震霆霹靂黑陰慘。           뇌성벽력에 암울하며 처참한 풍경에

氷雪淞凘皎巃嵸。          얼음과 눈 그리고 성에 낀 상고대, 달빛으로 하얗게 빛나니 깎 아지른 듯 높은

                                  산 더욱 뚜렷한 그림도 그리는도다.

或畫壽藤怪蔓相紏綰。    때로는 고목이 된 등나무와 괴상한 덩굴이 얽히고 얽힌 모양도 그리고

或畫快鶻俊鷹相撞摐。    간혹 날쌘 송골매와 수려한 보라매가 맞부딪쳐 어지러운 광경도 그리며

或畫游仙躡空放雲氣。    또 신선이 유유자적 구름 따라 하늘을 밟고 노니는 그림도 그리는데

須眉葩髿森欲衝。          (그 신선) 수염과 눈썹 꽃 같고 머리카락은 삼림처럼 엉켰도다.

或畫窮僧兀坐搔背癢。     혹은 초라한 중 오뚝 앉아 등 가려워 긁는 모습 그리는데

鯊腮玃肩喎脣盍睫酸態濃(그 중의) 상어 뺨, 원숭이 어깨, 비뚤어진 입, 눈 덮은 속 눈썹 () 궁상스러운

                                   몰골이 확 눈에 들게 하도다.

或畫龍鬼噴火鬪蛇怪。     어쩌다 용귀가 불 뿜으며 뱀과 괴이하게 싸우는 것도 그리고

或畫妖蟇蝕月侵兔舂。     간혹 요사한 두꺼비가 달을 집어먹어, 토끼 방아 찧는 광경을 방해하는 것도

                                  그리지만

斷捥不肯畫婦女與畫。     팔이 잘린대도 부녀자가 들어간 그림은 그리지 않고

牧丹勺藥紅芙蓉。          모란꽃 작약 꽃 붉은 부용꽃도 그리지 않는다네.

亦肯賣畫當酒債。          또 그림 팔아 술값으로 쓰지마는

一日但酬一日傭。          그날 벌어 그날 마실 만큼만 번다네.

常恐姓名到官府。          자기 이름 관가에 알려질까 두려워서

有欲告者怒氣勃勃如劍鋒알리려고 하는 자 있으면 노기발발 서슬 시퍼렇다네.

我來象山越二歲。          상산에 내가 온 지 이 년이 넘었는데

建閣穿池民物雍。         누각 짓고 못도 파고 백성들도 조용한데

天慵子來叩闑。            천용자가 찾아와 문지방을 두드리며

大聲叫我與官逢。         사또 좀 만나자고 큰 소리로 외치더니

直躡曾階入重閤。         곧바로 뜰을 지나 동헌 여러 채 지나 (섬돌) 계단 올라서는데

赤脚不襪如野農。          버선 벗은 맨발에 들녘 농부 같은 행색으로

不拜不揖箕踞笑。          절도 않고 읍도 없이 걸터앉아 웃더니만

但道乞酒語重重。          단도직입으로 거듭거듭 하는 말이 술 달라는 소리였다네.

淸風洒然吹四座。         (그의 품새 범상치 않아) 사방 툭 터진 자리 위 시원한 바람 부 는 듯하여

一見斂膝知非庸。         보통사람 아님을 금방 알고 (사또가) 무릎 여몄지.

握手開襟寫碨磊。          손잡고 흉금 터놓고 속엣 말 다 하면서

雨朝月夕常相從。        비 오는 아침, 달뜨는 저녁 늘 만났었네.

不學彌明枉韓愈。        배우지 않은 미명이 한유를 꺾었으며

頗似支公訪戴顒。        어쩌면 대옹 찾은 지공과 같기도 하였으니

天慵子張其姓。           천용자의 성은 장씨라는데

試問鄕里其口封。        슬쩍 사는 곳을 물었더니 입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네.

                                              《茶山詩文集3. . 丁若鏞.

 

[]

*이칙(夷則) : 임종(林鐘)과 함께 각각 십이율(十二律) 중의 한 가지 명칭임.

*배우지 않은 …… 꺾었으며 : 형산 도사(衡山道士)인 헌원미명(軒轅彌明)이 한유(韓愈)의 제자들과

  석정(石鼎)이란 제목으로 연구(聯句) 짓기를 해 한유 제자들을 압도했다고 함. 昌黎集 石鼎聯句詩序

*대옹(戴顒) : 대규(戴逵)의 아들. 자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벼슬하지 않고 음율(音律)에 능했으며 국가에서

  누차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음. 南史 卷75

*지공(支公) : ()의 고승(高僧)인 지둔(支遁). 사안(謝安), 왕희지(王羲之) 등과 함께 가까이 지냈으며,

  애제(哀帝)명을 받고 금중(禁中)에 와 설법을 했는데, 그 명성이 당대를 풍미하였음. 梁高僧傳 四

 

張天慵傳

   장천용(張天慵)이라는 이는 해서(海西) 사람으로 옛 이름은 천용(天用)이었다. 관찰사 이공의준(李公義駿)

순찰을 하다가 곡산(谷山)에 와서 그와 함께 노닐면서 그 이름을 고쳐 천용(天慵)’이라고 한 것이 마침내 천용

(天慵)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내가 곡산에 부사(府使)로 부임한 이듬해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웠다. 일찍이 달 밝은 밤에 조용히 앉아

퉁소 소리 듣던 일을 생각하면서 홀로 중얼거리며 탄식하고 있는데, 어떤 이가 앞에 나와서 말하기를,

읍내(邑內)에 장생(張生)이라는 사람이 있어 퉁소를 잘 불고 거문고를 잘 타는데, 다만 관부에 들어오지 않으

려고 합니다. 지금 이졸(吏卒)을 급히 보내어 그 집에 가서 그를 붙들어 오게 하면 만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나는 말하기를, “안 된다 그 사람을 붙들어 이곳에 데려올 수는 있겠지만, 어찌 강제로 퉁소를 불게 할 수

있겠는가. 너는 가서 나의 뜻을 전하기만 하고, 오려고 하지 않거든 강제로 데려오지 말라.” 했다.

얼마 있다가 심부름 갔던 자가 장생이 이미 문에 와 있다고 아뢰었다. 온 것을 보니 망건은 벗어버리고 맨발

옷에는 띠도 두르지 않았으며, 매우 심하게 취해 눈빛이 거슴츠레했다. 손에는 퉁소를 들었으나 불려고

하지 않고 계속 소주만 찾았다. 그와 더불어 서너 잔 마시니 더욱 취하여 인사불성이 되었으므로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부축하여 데리고 가서 밖에다 재웠다.

   다음날 다시 불러 연못의 정자로 오게 하여 술을 한 잔만 주니, 이에 천용이 자세를 가다듬고 말하기를,

퉁소는 저의 장기가 아니고, 저는 그림에 장기가 있습니다.” 했다. 그림 그릴 비단을 가져오게 하여, 산수

(山水)신선(神仙)ㆍ호승(胡僧)ㆍ괴조(怪鳥)ㆍ수등(壽藤)ㆍ고목(古木) 등 수십 폭을 그리게 했더니 수목

(水墨)을 쓰는 솜씨가 능란하여 그린 흔적이 보이지 않고 모두 창경(蒼勁)ㆍ괴기(怪奇)하여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으며, 물태(物態)를 묘사함에 이르러서는 붓끝이 섬세하고 정교하게 그 신정(神精)을 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이윽고 붓을 던지고 술을 찾더니 또 크게 취하여 부축을 받고 갔다. 이튿날 또 그를 불렀으나 이미 거문고

메고 퉁소를 하나 차고, 동으로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다고 했다.

   이듬해 봄에 중국 사신이 오게 되자, 일찍이 천용에게 덕을 베풀었던 사람이 평산부(平山府)의 관해(館廨)

보수하는 일을 맡게 되어, 천용을 맞아다가 단청(丹靑)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같이 일하는 사람 가운데

아비 ()입은 자가 있었는데, 천용이 그 상장(喪杖)이 기이한 대나무이고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그것을 훔쳐다가 구멍을 뚫어 퉁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태백산성(太白山城)가운데 봉우리의 꼭대기에

올라가 밤새도록 퉁소를 불다가 돌아왔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성을 내어 심하게 꾸짖자 천용은 마침내 떠나가 버렸다. 그 후 몇 개월 뒤에 나는 해임

되어 돌아왔는데, 몇 개월 후에 천용이 가람(岢嵐)의 산수를 특별히 그려서 나에게 보내주면서, 금년에는

영동(嶺東)으로 이사 가서 살 것이라는 말도 전했다. 천용의 아내는 용모가 매우 못생긴 데다 일찍부터 중풍

[癱瘓]을 앓아 길쌈도 바느질도 못하고, 밥도 못 짓고 자식도 낳지 못했다. 게다가 성품조차 불량하여 늘

누워서 천용을 욕했지만 천용은 조금도 변함없이 사랑했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모두 특이하게 여겼다.”

                                                                                                                   - (정약용 글)

 

두 기록을 통해 정리하자면, 그는 해서(海西) 사람으로 장씨이고 원 이름은 천용(天用)이며, 후대에 천용(天慵)이라고 불렸다. 가장 게으른 사람이란 뜻의 천용(天慵)이란 이름은 황해도 곡산부사 이의준(李義駿, 1738~1798)이 곡산에서 그와 함께 노닐면서 붙여주었다. 그는 그림과 음악에 능했다.

그렇지만 퉁소는 저의 장기가 아니고, 저는 그림에 장기가 있습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의 본업은 그림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는 문학과 음악 분야에서 약간씩 다룬 적은 있지만, 미술계에서는 전혀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미천한 출신인데다 지방에서 활동했던 무명화가인 탓도 있다. 현대 용어로 부른다면, 민화가인 셈이다.

정약용이 황해도 곡산부사로 부임하고 2년이 넘은 1799, 장천용이 정약용을 만나려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관아에 들어왔다. 버선 벗은 맨다리에 농부같은 행색으로 걸터앉아 웃더니만 술을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정약용은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그의 손을 잡고 흉금을 터놓고 아침부터 밤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은 배짱은 화폭 속에서 대담하고 개성이 강한 그림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의 거리낌 없는 성격처럼 자유분방한 그림을 창출했던 것이다.

그는 그림 못지않게 퉁소의 명수로 알려졌다. 황해도 평산부(平山府)의 관아를 보수할 때 단청 일을 했다. 같이 일한 사람 가운데 아비 상을 당해 상복을 입고 대나무로 만든 상장을 갖고 왔는데, 그것을 훔쳐 퉁소를 만들어 태백산성 꼭대기에 올라가 그것을 밤새도록 불었다. 퉁소에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 일로 그는 꾸지람을 듣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이 사건이 마음의 상처가 된 탓인지, 사는 곳을 물어도 답하지 않았고, 자기 이름이 관가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여 알리려고 하면 서슬이 시퍼렇게 노발대발했다. 자신을 철저히 숨기며 살았다.

뿐만아니라 그의 평소 행동거지에서도 대담하고 자유로움이 돋보인다. 어깨에 가야금 하나 둘러매고 왼손에 피리를 들고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은 행색으로, 봄이면 묘향산 골짜기를 다니고 가을이면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를 거닐었다. 가야금을 뜯고 피리를 불며 휘파람을 불다가, 숲을 뒤져 잠자는 범을 찾아내고 물길에서 꽝하고 바위를 굴려 못에 있는 용을 놀라게 했다.

장천용은 평생 갓이나 망건을 써 본 일이 없고 헝클어진 쑥대머리를 하고 다녔다. 본인이 입은 무명옷은 거지에게 벗어주고 남루한 옷을 바꿔 입고 오곤 했다. 당연히 부인은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장천용은 묵묵부답으로 대했다. 그의 부인은 못 생긴데다 일찍부터 중풍을 앓아 집안일을 제대로 못 한데다 성품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늘 누워서 남편을 욕하지만, 그는 그녀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휴머니스트인 것이다.

그의 거침없는 삶과 행동이 작품 속에서도 그대로 표출되었다. 그는 길에서 주운 돌에서 작품의 영감을 받았다. 막돌이지만 옥돌처럼 만지작거리다 배고프면 이웃집에 가서 술을 얻어 마셨다. 술기운이 얼큰해지면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는데, 음이 정확하게 맞는다. 이렇게 흥취를 돋은 뒤 붓을 들어 수묵화를 그렸다.

이러한 창작과정을 거쳐 그린 작품을 보면, 평범치 않고 특이하다. 산수화를 보면, 뇌성벽력의 소리가 나는 음산한 풍경이며, 다래 덩굴 괴상한 덩굴이 얽혀 있는 모양도 그렸고, 눈 녹은 높은 산의 조촐한 모습도 화폭에 담았다. 새를 그리면, 송골매와 보라매가 맞부딪치는 광경을 연출했다.

신선도는 경우는 구름을 내쫓는 신선의 모습을 표현했다. 스님을 그릴 때에는 초라한 모습에 오뚝이 앉아서 가려운 등을 긁는 모습을 그렸다. 조영석의 <이 잡는 스님>을 연상케 하는 풍속화다. 그런데 그는 초라한 스님의 모습을 상어 뺨에 원숭이 어깨, 삐뚤어진 입, 속눈썹이 눈을 덮은 궁상스런 몰골로 나타냈다. 용을 그릴 때에는 용과 귀신이 불을 뿜으며 뱀과 싸우는 모습을 그렸으며, 토끼가 방아 찧는 장면에서는 두꺼비가 달을 잡아먹고 방아를 찧지 못하게 방해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자의식이 강해서 팔이 잘린다고 해도 부녀자는 그리지 않았고, 모란, 작약, 붉은 연꽃과 같은 얌전한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괴팍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로테스크 하다고 해야 하나? 어느 하나 범상하게 그린 그림이 없다. 그만큼 그는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고 예술혼을 불태운 진정한 자유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