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지정문화재

보경사성보박물관 전시 유물

참땅 2017. 5. 23. 12:47


보경사성보박물관 - 20170514일 현재

보경사성보박물관- 2017년 사월초파일에 개관하였습니다.

 

   


야외 전시 종

단기 4303(1970)에 성종사 원국진이라는 사람이 주조한 종이다.

종신에는 지장보살 아래로 옴마니반메훔 육자진언이 새겨져 있다.


 

구시

구시라는 나라 제사 때 또는 행사 시 쌀 7가마(4천명분)의 밥을 퍼 넣는

밥통의 개념보다는, 조선시대 남부지방의 사찰들이 집중적으로 종이를 만들어

국가에 바치는 공납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이것을 종이 만들 때 사용하던

지통紙桶이라고 하는 학설이 더 근거가 있다고 본다.


사명대사가 썼다는 데... 


內迎山寶鏡金堂塔記(내연산보경금당탑기)

602(진평왕 25)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라 지명智明법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지명은 왕에게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진나라에서 유학하

고 있을 때 어떤 도인으로부터 받은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그 위에 불당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그와 함께 동해안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해아현海阿縣 내연산 아래 있는 큰 못 속에 팔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金堂건립한 뒤 보경사라 하였다.

723(성덕왕 22)에는 각인覺仁문원文遠이  절이 있으니 탑이 없을 수 없다.”

하고 시주를 얻어 금당 앞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다.


 

大方廣佛華嚴經疏(대방광불화엄경소)

대방광불화엄경은 화엄경華嚴經이라 줄여 부른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

하나라는 것이 중심 사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엄종의 근본 경전으로 여겨져,

법화경法華經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으로 이해

고 있다.

대방광불화엄경소는 대승 경전의 하나인 실차난타 번역의 80권 화엄경 주본

저본으로 하여, 당나라 징관(澄觀, 738839)이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하고 송나라

정원(淨源, 10111088)이 해석을 덧붙인 교장敎藏의 하나이다.



妙法蓮華經(묘법연화경)

묘법연화경은 예로부터 모든 경전들 중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초기 대승경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불경이다.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여러 민족에게 애호되었던

이 경은 기원 전후에 신앙심이 강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에 의해 서북 인도에서 최초

로 소부小部의 것이 만들어졌고, 2차에 걸쳐 증보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종류의 한역본 중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묘법연화경

8권이 가장 널리 보급, 유통되었다.


범천권청 부분이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보살행(菩薩行)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수보살의 유마힐 병문안 장면.


728. ‘법화경이라 약칭하기도 한다. 천태종의 근본 경전으로, 불교전문

강원의 수의과隨意科 과목으로 채택되고 있다. 화엄경과 함께 한국불교사상

을 확립하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법화경은 우리나라에서 유통된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간행된 경전이다.

법화경이 언제부터 유통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 권3 대산오만진

신조臺山五萬眞身條에 이 경의 이름이 보이고 있고,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

新編諸宗敎藏總錄에 이에 대한 경흥憬興의 소, 태현의 고적기古迹記,

도륜道倫의 소, 원효元曉의 종요宗要와 방편품요간方便品料簡, 의적義寂

강목綱目, 순경順憬의 요간料簡 등 신라인의 연구주석서가 보이고 있다.

이로써 삼국시대부터 법화경이 널리 유통되어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음

알 수 있다.



金鼓(쇠북)

금고는 쇠나 청동으로 만든 북이다. 불교에서 종처럼 사람을 불러 모을 때 이용하기

도 했고,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는 군졸에 명령을 내리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금고를 일컫는 다른 이름으로는 반자飯子나 금구金口 또는 정고鉦鼓가 있다

(양쪽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쇠북이라는 뜻에서 금고라 부르고, 한 쪽 면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반자라고 하였는데, 후대에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사용).

명문이 새겨진 경우 그 제작시기와 제작위치를 알 수 있으며, 금속 공예연구 자료가

된다. 일반적으로 당좌가 중앙에 있고 그 주위를 보상화문 또는 당초문, 범어 등

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바라

바라는 사찰에서 법회 때나 불교 의식 무용인 바라춤을 출 때 사용하는 법구로서

발자鉢子, 동반銅盤이라고도 한다. 바라의 전체적인 형태는 심벌즈나 갓과 같으며

구리로 만든 평평한 접시 모양을 지닌 원반의 중앙에 움푹 들어간 부분에 구멍을

내고 끈을 달아서 좌우 손에 한 깨씩 들고 서로 비벼치면서 소리를 낸다.

백장청규에 의하면 바라는 불전에 향을 올릴 때라든지, 설법을 하거나 큰 집회를

행할 때나, 장례의식을 하거나 주지를 새로 맞아들일 때 수행자가 울렸다고 한다.

법당 앞 불전에서 재를 올릴 때 추는 바라춤은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도량을

청정하게 정화하는 춤으로서 그 종류에는 천수바라명바라사다라니바라관욕게바

막바라내림게바라 등 6종류가 있다.

그리고 바라춤을 추는 순서는 막바라, 명바라, 천수바라, 내림게바라, 사다라니바라

의 순인데 이중 명바라는 규모가 큰 재가 아니면 잘 추지 않는다.


 

神衆圖

한 화폭에 상단에는 녹색 원형 두광을 구비한 제석천과 아래로는 동진보살

화면 가운데 전후로 배치하였다. 동진보살은 백면에 봉익투구와 갑옷을 착용하고

금강저를 지니고 있다. 명확하지는 않으나 오른손에 두 송이 백련화가 활짝 핀

연화가지를 쥐고 정면을 향한 제석천은 동진보살상보다 다소 크게 표현되어 있다.

주존의 좌우 앞쪽에는 신장 중 천왕龍王 2위와 팔부중 2위를 배열하였으며

뒤쪽에는 일월상관과 장몌의(長袂衣: 소매가 긴 옷)를 착용하고 홀을 쥔 명왕 4위와

번을 든 쌍상투의 천동과 천개를 든 천녀는 머리를 화려하게 치장하고 시립한 채

서있다. 화기에 따르면 가경오년 경신嘉慶五年 庚申 1800(정조 24)에 조선된

신중도로 화공은 , 采彦이며, 부부가 다음 생에는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시주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제석천


동진보살- 위태천이라고도 한다 


소규모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채색이 많이 박락되기도 하고 화면의 상당부분이

오염되기도 하였으나 안정된 구도와 도상의 표현마다 섬세한 필치가 돋보인다


 

肅宗大王 御筆 刻版

숙종대왕 어필이라는 각자가 모서리에 새겨져 있어 조선 숙종이 쓴 글씨로

추정해 볼 수 있으며 당나라 맹호연孟浩然의 시 춘효春曉의 내용이다.


   

春眠(앞면) 不覺(뒷면)    曉處(앞면) 處聞(뒷면)    (앞면) 鳥夜(뒷면)


   

來風(앞면) 雨聲(뒷면)   花落(앞면) 知多(뒷면)     (앞면) 甲子季夏(뒷면)

1684년 6월, 24세의 조선 숙종이 정갈호쾌한 행초서체의 유창한 글씨로 썼다.


春眠不覺曉(춘면불각효) 노곤한 봄잠에 날 새는 줄 몰랐더니

處處聞啼鳥(처처문제조) 곳곳에서 새 소리 들려오네.

夜來風雨聲(야래풍우성) 간밤에 비바람 소리 들리더니,

花落知多少(화락지다소) 꽃잎은 또 얼마나 떨어졌을꼬.


  

각판은 글자를 반대로 새겼기 때문에 읽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거기에다 초서로 씌여있어 전문가가 아니면 쉽게 판독하기 힘들다.

두인 형식의 숙종대왕어필 주칠각이 春眠(춘면) 각판 상부에 위치해 있다.


 

八相圖

비단바탕으로 이루어진 8개의 화폭으로 화면 상단 좌측에 화제가 기술되어 있다.

8폭 모두 이야기 전개에 따라 복수의 장면과 각 장면들마다 주지묵서의 방기를

두어 설화그림의 묘미를 살리고 있으며, 구름수목전각 등으로 장면을

구획하였다. 현재 전시하고 있는 것은 8폭 중 1~4푹까지 이다.



兜率來儀相

석가의 전신인 호명보살이 육아백상을 타고 마야부인의 태중으로 들어가는

탁태몽 관련 내용이다. 우측 상단에 구담귀성이 배치되어 있고, 좌측 상단에

日輪 속에 길상의 상징인 白象을 탄 호명보살이 천인들과 함께 도솔천에

내려오고 있다. 도솔천에서 강림하는 瑞雲(서기어린 상스러운 구름)하단

우측에 배치된 摩耶宮 전각 쪽으로 뻗어있고, 하단 오른쪽의 炎明殿서는

정반왕과 아시타선인이 태몽을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설정되었다.



毘藍降生相

태자가 룸비니동산에서 탄생하여 獅子吼하는 내용이다. 이야기의 시작 장면

왼쪽 하단에는 장막이 쳐져있고, 그 안에 마야부인의 우협(오른쪽 옆구)으로

부터 태자가 탄생하는 장면이 있어 다른 장면들과 구분된다.

상단 왼쪽에는 구룡토수로 태자를 목욕시키는 장면, 구름을 경계로 바로 옆

아래 쪽에는 태자가 연꽃 위에 서서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치는 장면, 상단 오른쪽에는 정반왕이 선인에게 태자의 미래를 점치는 장면,

하단 오른쪽에는 태자가 가마를 타고 궁전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도해되어 있다.   



四門遊觀相

태자가 동서남북 사문에서 유관하여 출가를 결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단 왼쪽부터 동문에서 어린아이와 노인生老을 만나고, 남문에서 헐벗고

앙상한 병자를 만나고, 서문에서 장례를 치르는 죽은사람을 보게 되고,

북문에서 출가사문을 만나는 장면 등이 시계방향으로 차례대로 전개된다.

상단 꼭대기 부분에서는 하늘나라 도솔천의 마야부인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태자를 지켜보고 있다



踰城出家相

태자가 야반에 성을 넘어 출가하는 내용이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 하단 오른쪽의

태자궁 전각에는 태자비와 여러 시종들이 잠들어 있는 모습과 함께 태자의 자리를

비워 놓음으로써 태자가 야반에 출가했음을 암시한다.

성문 입구를 지키는 군졸들도 모두 잠에 취해 있다. 상단 왼쪽에는 전각을 중심으로

마부 차익이 태자의 출가사실을 알리고 태자의 보관을 바치는 장면이다.

상단 오른쪽에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사천왕이 태자가 탄 말 칸타카의 발굽을

들고 성을 뛰어 넘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서운암동종- 1667년(현종 8)

보물 제11-1. 총 높이 54.1cm, 종신 높이 42.6cm, 종입 지름 41.4cm,

종입 두께 4.5cm. 2000215일 보물로 지정.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이자 장인인 사인비구

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

기법에 독창성을 더하여 종을 제작했다. 이 종은 사인이 만든 종 가운데 조

성연대가 가장 앞선 것으로, 1667(현종 8)에 제작되었으며 크기는 작지만

사인비구의 초기 제작기법을 볼 수 있다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꼭대기에는 종을 매다는 데 사용하는 둥근 고리가 있으며, 견대 어깨 부분에

40개의 연꽃잎을 세워 넓은 띠를 이루었으며, 각 잎마다 인물(?)상을 안

치했다. 이 견대 아래로는 줄기가 위아래로 뻗어나가며 둥그런 구획을 짓고

그 내부에 길상을 상징하는 보상화 무늬를 자잘하게 새겨 넣었다.


 

                                           


 



그 아래 종 표면 상부에 5개의 연봉을 가지고 있는 사각형 모양의 연곽이 4

곳에 있는데, 일반적으로 연곽 내의 돌기[連峰]9개인 것에 반해 여기서는

5개이다. 연곽 사이사이에는 육자대명주(옴마니반메훔) 진언을 2자씩 새겨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 4번째 구역에는 두 개의 원안에 六字大明呪眞言 글자

를 넣었다.


  

七星如來圖

북극성은 그 빛이 밤하늘의 별 중 가장 밝아 치성광熾盛光이라는 명칭이

었으며, 천재지변을 관장하고 난리와 질병을 다스리며 재앙을 물리치고,

특히 자식 낳기를 원하는 사람이 열심히 기도를 하면 그 원을 살펴 들어준

다고 한다. 치성광여래의 특징적인 모습은 손바닥에 금륜金輪이나 약합을

고 있는 모습이다.

화면은 크게 상중하단부로 구성되었으며, 상단 중앙부 주존은 왼손으로

금륜을 받든 치성광여래가 유희좌로 앉아 있는데 등 뒤로 오색무지개 같은

신광을 방광하고 있다. 머리 좌우로는 칠성여래 중 각각 3위 그리고 중단부에

1위 하여 모두 7위의 여래를 표현하였다. 주존 좌우 협시로는 머리에 붉은 해

지닌 좌보처 日光遍照 消災菩薩과 머리에 하얀 달을 지닌 우보처 月光遍照 息災菩

이 각각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일광보살 뒤편으로 허연수염을 기른 머리가

뾰족하게 솟은 노인이 수성노인이다.

수성노인성의 머리는 왜 길쭉하게 되었을까? 노인성은 원시천존元始天尊

제자로 알려져 있다. 원시천존의 원형은 반고盤古이며, 전설에 따르면 천지

아직 나눠지지 않았을 때, 반고는 그 속에서 탄생 했다고 하는 원시천존의 제자

가운데 수제자가 바로 수명장수의 별, 노인성이다. 노인성의 머리모양이 얼굴보다

커지게 된 데에는 스승인 원시천존 때문이다. 본래 원시천존에게는 여러 제자가

있었는데, 노인성·수성壽星이라 부르는 남극선옹南極仙翁은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수행이 뛰어났다. 하루는 원시천존이 스승이신 홍균노조에게 남극선옹이라는

제자를 자랑하고 싶어서 노인성을 데리고 스승을 찾아뵈니, 스승은 이미 둘이

올 줄 알고 미리 선경에 들어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이에 제자 원시천존이 스승에게 제자를 데리고 왔음을 알리고, 스승께 인사를

드리고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고 몇 번을 말씀 드려도 스승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내가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수행이 잘되었음을 알았으니 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였다. 그래도 원시천존은 스승께 한번만 봐달라고 계속 치근대자,

균노조는 내가 너의 제자를 보고 싶지 아니하여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보게 되면

너의 자가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런다. 그런데 네가 하도 부탁을 하니 그럼 내가

한번 살펴보겠다.’라고 하면서 두 분을 번쩍 뜨자, 노인성이 그 자리에서 그만

정수리가 녹아 핏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상황이 이렇게 돌변되자 홍균노조는 제자

원시천존에게 아니 내가 그렇게 눈을 뜨지 아니한다고 하였는데도 그렇게 봐달라

고만 더니 어쩔 것이냐라며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제자 원시천존을

나무라, 홍균노조가 다시 주문을 외우면서 어떤 물건을 잡아들자,

곧바로 노인성의 정수리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멈추면서 지금까지 흘러내렸던 피가

다시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가 머리 모습은 되찾았지만, 그러나 노인성의 머리는

음 모습과는 다르게 머리가 얼굴보다도 길쭉하게 위로 솟아나 있고, 대머리

되어 버렸음은 물론, 몸 전체가 늙은이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천진스럽게 웃는 모습을 하고 있어, 남극노인성은 인간의 수명장수를

당하는 별이 되었다고 한다.



월광여래 뒤에는 천녀가 고개를 돌린 채 쟁반에 백련화를 받쳐 들고 있다.

그 아래 좌우로 칠원성군을 배치하였고, 화면의 중앙 치성광여래 아래 하단

중앙에 둥근 원을 형성한 내부에 자미대제와 두 동자를 조성하였다.

녹색두광의 검은 수염이 멋진 근엄한 표정의 위엄 있는 노인은 자미대제를

그린 것이다. 자미대제는 도교에서 북극성을 의미하는 천신으로 일본에 남아

있는 안택(安宅을 기원하는 부적에는 북극성신인 현무대제가 그려지고 있어

북극성은 새해 첫 달인 정월 한 가정의 안녕과 번영을 비는 성신이라는 것

을 알 수 있다. 좌우로 흰 부채를 든 동자와 쟁반에 복숭아와 석류를 받쳐

든 동자는 시중을 드는 동자가 아니라 좌보성과 우필성의 두 분인 것으로

보인다. 칠성을 보좌하는 보좌별로써 이 좌보와 우필에서 보필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고승진영

 

1. 兩宗正事鰲巖堂大禪師/오암집경판

얼굴과 등을 곧게 세우고, 얼굴은 약간 향우측으로 향한 우안7분면右顔七分

의 바닥가부좌상을 하고 있으나 상반신이 매우 길게 처리되어 부자연스럽.

왼손에 목리문(나무의 제재면에 나타난 나이테 등 나무조직무늬, ,

나뭇결무늬 형상이 나타난 것)의 주장자를 쥐었고, 오른손에는 바닥까지

흘러내린 장염주를 쥐고 있다. 양감 있는 둥근 얼굴은 눈 코 입이 가운데로

몰렸으나, 뺨은 넓고 턱선은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오암당의 안면 특징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청색 장삼과 주색 가사를 착용한 착의 표현은 색면을

강조하였지만 의습선이 형식적이고 획일적으로 처리되었다


 

오암당대선사는 숙종 36(1710) 102일에 청하 오두촌에서 태어나 오암이라는

당호를 가지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여 20세전에 사서오경과 제자배백

가의 모든 전적을 통달했으며 특히 시와 글짓는 재주가 뛰어났다.

23세에 모친상을 치른 후 세상의 무상함을 깨닫고 보경사에 출가하였.

평소 시 짓는 것을 좋아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제자 회관誨寬 등이 오암대

사가 남긴 시 수백수를 모아 오암집을 편찬하였다.

오암대사는 평생 동안 보경사를 떠나지 않았고 보경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화장하여 서운암 좌편 부도를 세우고 이듬해 회관이 비문을 찬하여 비를

세웠다.

오암집 경판은 총 30판으로 이루어져있으며 행장, 서문, 오암문집, 발문 등

30(60)으로 이루어져있다. 오암문집은 오암대사가 지은 시 265수가

주를 이루며 진영찬眞影贊, 임종게臨終偈 등 시서 10여편이 수록되어 있다



2. 神坡堂大禪師眞影

우안칠분면의 바닥가부좌상으로, 왼손에 장염주를 들고 오른손에 금속고리가

달린 주장자를 쥐고 있다. 약간 갸름한 얼굴은 살색으로 나타내고 담먹선으로

윤곽을 잡은 뒤, 원정상의 두부와 코 턱수염부분에는 담먹으로 음영처리를

하였다. 착의는 청색 장삼과 주색 가사를 걸쳤는데, 장삼의 주름진 결을 따라

굵기가 균일한 먹선을 긋되 색의 농담 표현은 억제하였으며, 장삼과 가사 이면은

선을 따라 붉은색으로 음용처리를 하였다. 인물의 뒷배경 상단에는 여백으로 비워

두었으나 맨 위 녹색바탕에는 화문을 장식한 녹색 띠를 둘렀다


 

3. 摩屹祖師圓覺大師

1847(헌종 13)에 금어 法俊順彦비구가 개체하여 淸河內延山 成道寺

봉안한 작품이다. 화면을 상하로 이분하여 하단에는 화문석 자리를 그리고,

상단에는 5곡병풍을 둘러 배경으로 삼았다. 인물은 정면을 향해 앉은 전신의

자상으로 그 왼쪽 하단부에 과일쟁반에 선과를 받쳐 든 동자가 배치되었다

머리에는 보주장식의 관을 쓰고 소매가 넓고 깃이 둥근 자색 법복을 착용하였다.

무릎 위에 얹은 오른손에는 불진의 자루를 쥐고 왼손으로는 술을 가볍게 만지고

있다. 벡색 얼굴에 표현된 이목구비가 불화에 등장하는 각종 대왕이나 성군상을

연상케 한다. 자색 옷깃과 소매깃 가장자리의 화문,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는

녹색 법피 가장자리의 화문 등은 조선후기 불화의 법의 장식문양에서 볼 수 있으며

의자에 깔린 법피는 19세기 영탱이나 민화에서 볼 수 있는 모티브이다.

이 작품은 불교도상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상상으로 표현한 섬세한 작품이다


 

출가 수행승이 아니고 재가 수행자였던 원각조사 김마흘의 진영은 관모나 수염,

불자를 쥐고 있는 것은 신륵사 지공화상의 진영과 닮았지만, 옷은 어의나 관복과

비슷하다. 성도암의 비구승 천흡天洽이 화주가 되어 세운 원각조사비(1648)

의하면, 송라면 조사리 풀신의 재가수행자였던 김마흘(摩訖, 1379~1459: 마흘은

유마힐을 줄인 말)1459615일 입적하여 송라역의 설치와 관원배치,

임진왜란의 발발과 피해, 성도암 도량의 퇴락을 예견하며 자신의 영당影堂

성도암에 짓고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신앙하면 청하고을에 재앙이 없을 것

이라고 하였다. 불교식으로 스님들이 다비하여 사리탑을 상태사에 세웠다.

이 진영은 원각조사의 입적 뒤에 성도암의 영당에 봉안하여 왔던 진영을 개체한

것으로 보인다


  

4. 創寺主圓眞國師眞影

화면 중앙에 원진대사가 정면을 향해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가부좌한 모습으로

신발은 족대 위에 놓여있다. 왼손에는 주장자처럼 긴 불진(불자: 짐승털이나

() 등을 묶어서 자루 끝에 맨 것으로 원래는 벌레를 쫓는 데 쓰이는 생활용구.

수행자가 마음의 번뇌를 털어내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법구)을 비스듬히 들었는데, 꼭대기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용두장식을 넣었고, 아래에는 보주형장식과 술을

매달아 장식을 한껏 치장하였다. 오른손으로는 바닥까지 늘어진 긴 술을 가볍게

쥐고 있다. 육신부는 백색을 바른 후 가는 담먹선으로 윤곽을 잡고, 윤곽선을 따라

바림 흔적이 부분적으로 보인다. 원정상의 두부와 코 턱 부분의 모근 표현은 담먹을

엷게 펴 바르고 짧은 먹선과 백선을 겹쳐 나타내었으며, 붉은 입술은 가장자리를

몰골법 (동양화에서 윤곽선을 사용하지 않고 바로 색채나 수묵으로 그리는 화법)

으로 처리하여 마치 꽃잎을 연상케 한다.

이 같은 특징은 19세기 이후 고승진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표현기법이다.

착의는 장삼은 군청색, 가사는 짙은 주색을 발랐는데, 장삼의 겹친 의습 부분

청색으로 밝고 어둡게 대비시켜 형식적인 음영효과를 내었으며, 의자는 전후

원근법을 살리고 있으나 다소 과장된 표현이.

조성시기는 19세기 말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 중엽 보경사의 중창조로서 높은 선풍을 드날리고 그 도덕이 당시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모범이 되신 원진국사는 속성이 씨이다. 출가 사찰은 운문사이지만

봉암사 동순스님으로부터 육조단경을 배웠고, 오대산과 청평산에 가서 깨달음을

얻었다. 원진국사는 능엄경 사상 중 돈오점수와 교선쌍홍의 깨달음을 얻었으며

실천적 행동을 중요시 하였다. 고려 무신정권이었던 최충헌의 후원을 받아

무신집권기에 은둔하고 있던 재야 지식인을 정계로 끌어내기 위해 실천하였고

타락한 불교계를 과거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거사불교를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고려 명종 23(1193)에 일어난 김사미 난의 잔여세력을 원진국사가 보경사의

주지를 지내면서 귀농과 사면의 경제, 신앙적 방법으로 안주시켰다.

보경사 일대가 이의민의 기반세력 중 하나란 점에서 원진국사의 활동은 그 역사적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고려 고종 8(1221) 7월 팔공산 염불암으로 옮겨가서 마지막 법문을 하고

내 주장자로 법상을 세 번 치고 조용히 입적하였다


수막새

1. 卍字紋 수막새                        2. 蓮花唐草紋 수막새               3. 蓮花紋 수막새

 

막새

   

乾隆七年 銘 암막새         雍正月八年 盈德回암키와    萬曆十五年 銘 암막새

1742년(영조 18)              1730년(영조 6)                            1587년(선조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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