兵馬元帥姜公以式遺墟碑(병마원수 강공이식 유허비)
2016년도 마지막 남은 한 주 전에 기냥 보내기에는 섭하고 하여 진주로
답사를 떠났다. 용암사지가 보고 싶고 자웅석이 궁금하기도 하여...
우선 진주 강씨 시조 강이식장군의 비석을 살펴보기로 했다.
어느 도승이 강씨가 대대로 살아왔던 진주의 봉곡촌을 지나다가 봉암이 부서진
이야기를 듣고 비방을 내려준다.
'날아간 봉황새는 알자리가 있으면 다시 돌아오는 법이니 알자리를 만들어라'
이 말을 들은 강씨 문중은 봉곡촌 중안 동산에 봉황새의 알자리인 ‘봉란대’를
만들고 훨씬 후에 진주강씨의 시조인 강이식 장군의 유허비를 세웠다.
강공의 비가 보이고 앞쪽에 둥그런 형태의 봉 알이 있으며,
둘레는 움푹 파여 봉황의 둥지처럼 형성하였다.
비 전체의 모습은 우선 넓적한 사각의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높직한 방형의
기단을 두었는데, 기단석 네모진 구획 내부에는 뭉게뭉게 구름 속을 헤집고 다니는 룡을
그렸으며 꿈틀꿈틀 거리는 룡의 몸통 비늘이 마치 숨박꼭질 하듯이 언뜻언뜻 보인다.
기단부 위에는 하늘을 날아가는지 바다를 헤엄치는지 목을 쑥 내민 거북이가
헤벌쭉 웃고 있다. 보통 귀부의 앞 다리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세로 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건만 이 거북이는 앞다리를 뒤쪽으로 내밀고 있어 흡사 앞다리를 무언가에
지탱하며 막 일어서려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뒷다리가 곧추 서 있질 못하니
즉 뉘어져 있어 마치 헤엄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거북의 머리 귀부는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주둥이가 툭 튀어나온 용두형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둥그런 형태의 거북이 머리로 보인다.
앞으로 헤엄치며 나아가려는 모습이 역력하지만 등에 진 무거운 비로 말미암아
무척 힘겨워하지만 서도 입가에는 웃음을 잃지 않고 있어 그나마 보는 이로 하여금
안심이 좀 된다. 이러한 거북의 형태는 조선시대에도 없는 양식이다.
귀갑등에는 육각문의 귀갑문을 새겼으며 두 줄기의 음각으로 대칭되게 등줄기를
길게 표현하였으며, 목과 다리에는 굵직한 마름모꼴 비늘을 넣었다.
귀신龜身 등에는 호형 돌기대로 귀갑대를 동그랗게 돌렸는데, 다리를 조각한
부분에서는 돌기대를 살짝 위로 들려져 다리가 온전히 드러나도록 하였다.
귀갑등에다 네모난 방형의 비좌를 마련하고 있으나 아무런 장식을 더 하지 않았다.
귀부 등을 짓누르고 있는 비신에는 전서체의 글씨를 그리듯 강이식공의
유허비임을 알려주고 있다.
강씨 시조 강이식공 유허비는 전면에 ‘兵馬元帥姜公以式遺墟碑(병마원수 강공이식
유허비)’라는 글자를 전서로 표기했으며 윗부분에는‘飛鳳抱卵(비봉포란)’이란
글자를 전서로 표기해 놓았는데 뜻은 ‘날아간 봉황의 알을 품고 있다’라는 뜻이다.
兵馬元帥姜公以式遺墟碑
진산화주(晉山華胄) 진주 땅 빛나는 씨족이요
청천영원(菁川靈源) 남강 물 영험스런 근원이다.
천파일본(千派一本) 파는 갈렸어도 근원은 하나이며
만지동근(萬枝同根) 만가지 가지 뿌리는 하나이다.
충효지가(忠孝之家) 충효로서 이름난 집안이요
도의지문(道義之門) 도덕과 의리의 문중이다.
세수돈목(世守敦睦) 대대로 돈독한 친목을 지켜오며
영수후곤(永垂後昆) 길이 후손에게 전하리.
비머리 양식 또한 특이한데, 비머리 하부는 비신과 같은 재질의 석재로 한단의
비머리 굄대를 마련하고 비신이 삽입 될 수 있도록 홈을 파고 앞쪽에 사각의
틀 안에다 飛鳳抱卵을 새겨 넣었다.
조각조각 덩굴무늬 같은 운문을 장식하였는데 여기까지는 비신과 같은 재질의
석재이다.
바로 위에는 바다를 표현하는 물결 모양의 장식을 하고 위로 두 마리 룡이 짙은
구름 속에서 이빨이 드러나도록 입을 크게 벌리고 공굴린 수염을 뻗어 서로
여의주를 다투는 룡을 새기고, 그 위에는 큰 연꽃 하나가 엎어져 있고,
둘레둘레에 둥그런 모양의 구슬을 돌아가며 장식하였다.
길쭉한 꽃잎의 앙련이 커다란 보주를 받치고 있는 비머리 상륜부는 우리가 흔히 보는
이수의 형태와는 조금 거리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처음에는 강이식공의 유허비라기에 지난한 세월의 무게를 읽을 수 있는 오래 묵은
비인가 했는데, 어벌싸 그기 아니란다.
진주 강씨의 성지인 봉란대(봉 알자리)는 강씨들이 마음속으로 봉황을 기다리는
염원으로 자리 잡아 왔을 뿐만 아니라 봉황의 먹이인 대나무 열매를 마련하기 위해
진주 남강가에 대나무를 심기도 하였으며, 봉황이 다시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을 지명도 봉곡동‧상봉동 등으로 지었다고 한다.
봉란대에 강이식 장군의 유허비가 세워진 것은 1920년 산청의 강문수, 진주 판문동
강영진, 진주 봉곡동 강치섭 등이 발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봉란대를 비정하기 전에는 가야시대의 무덤이었다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조선시대를 보내고 일제시대에는 한때 방공호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진주여고 깊숙이에는 강이식 장군의 사당인 봉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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