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지역/경상도

지곡사진관선사비

참땅 2016. 12. 20. 10:41

智谷寺眞觀禪師碑

 

대광(大匡) 내의령(內議令) 판총한림(判摠翰林) () 병부령(兵部令) () 왕융(王融)이 교칙(敎勅)을 받들어 짓다.

 

우리 영주(英主)께서 조상의 적선(積善)으로 경사스러운 가문(家門)을 이어받아 경종(景宗) 임금께서 영광스럽게 종묘사직을 계승하여 보위(寶位)에 오른지 7년째인 세재(歲在) 대황락(大荒落)에 얻기 어려운 재물을 많이 구하는 것은 별로 귀중한 일이 못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군자(君子)와 유인(儒人)들은 호월지심(胡越之心)은 없고 모두가 하나로 뭉쳐 태평한 시대였다. 마치 노위(魯衛)의 선정시대(善政時代)와 같았다. 따뜻한 3월 봄맞이를 위해 왕과 신하들이 사슴이 평화롭게 우는 대상(臺上)에서 사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산(江山)은 수경(水鏡)처럼 맑았는데 허공에서 갑자기 불길(不吉)한 운기(雲氣)가 일어났다. 왕이 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겨 좌우(左右)에 시종(侍從)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태사(太史)를 불러 길조(吉兆)인지 흉조(凶兆)인지를 점쳐보게 하였더니 태사(太史)가 보고하기를, “여기로부터 천리(千里) 이내에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어 중천(重泉)에 엄비(掩秘)되어 있으므로 폐하(陛下)의 성덕(盛德)을 골몰(汨沒)시켜 운세(運勢)가 부색(否塞)하겠사오니 만약 그의 행적을 정석(貞石)에 새겨 현창하면 반드시 나라가 크게 태평성세(太平盛世)를 이룩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그 비상(非常)한 사람을 찾도록 명하였다. 명을 받은 공덕사(功德使)가 그 곳을 살펴보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 진관선사(眞觀禪師)의 탑묘(塔墓)에서 상서로운 방광(放光)이 층한(層漢)에 높이 솟아 공중에 퍼져 있었다.”고 주문(奏聞)하였다. 왕이 이에 크게 감동하고 즉시 묵림(墨林)인 와금지도(臥錦之徒)에게 명하여 가섭존자가 계족산(雞足山)에서 의발(衣鉢) 전한 것을 노래지어 나의 휘유(徽猷)를 나타내게 하라.”하고, “정광(政匡) 한림학사(翰林學士) 최승로(崔承老)는 여러 왕조(王朝) 동안 사륜(絲綸)을 맡아 훌륭한 교서(敎書)를 작문하는 솜씨를 가졌으니, 나의 명령에 대하여 그 뜻을 민중을 향해 선양토록 하라. 대저 공적이 없는 사람은 강급(降級)시키고 공로가 있는 이는 승급시키되, 왕의 심중을 잘 헤아려 올바로 그 뜻을 담아 조서(詔書)를 잘 만들어 바치도록 하라. 자네가 지은 글이 만약 과인(寡人)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또한 수용(受用)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치황(緇黃)들만의 분()이라고 하겠는가. 이에 위대(遠大)한 스님의 명예를 후세에 더욱 완전하게 전하기 위하여 돈독하게 왕의 자총(慈寵)을 베풀어 깊이 아름다운 도덕을 나타내고자 한다. 이미 이러한 목적을 세웠으니 반드시 이를 감당할 사람을 만나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최승로(崔承老)가 절을 하고 대답하기를, “민천(閩川)에서 불의(拂衣)하고 있는 왕융(王融)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거년(去年)에 연곡사(鷰谷寺) 현각선사비송(玄覺禪師碑頌) 1(一斫)을 초작(草作)하였사오니, 비록 문학(文學)이 뛰어나지는 못하지만 그에게 명하시면 심력을 다할 것이오니 바라건대 시험삼아 시켜 보시면 반드시 훌륭한 비문을 지어 올릴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최자(崔子)에게 이르시기를, “()은 소찬후(蕭酇侯)와 같이 사람을 적재 적소에 잘 추천하는 지견(知見)이 있으며 또한 혜중산(嵆中散)과 같이 소용(疏慵)하는 예리한 비판력도 있으므로 혹권(酷勸)하고 또한 양선(揚善)하니 반드시 훌륭한 인재라고 여겨진다.”하시고, 태광(太匡) 내의령(內儀令) 판총한림(判摠翰林) () 병부령(兵部令) 왕융(王融)을 불러 옥안(玉案) 앞에서 말씀하시기를, “어제의 징조를 관찰해 보고 자세히 그 단예(端倪)를 알았다. 황금(黃金)의 소골(銷骨)은 토목(土木)에서는 능히 나타내지 못하는 백옥의 호광(毫光)이니 어찌 봉만중(峯巒中) 아무데서나 봉안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영감(靈感)을 나타내며 멀리까지 신통(神通)을 보였으니, 하필 현수산(峴首山) 꼭대기에 타루비(墮淚碑) 만이 고상하며 조아강(曹娥江) 강변에서만 절묘호수신(絶妙好受辛) 임을 자랑하겠는가. 만약 남자(男子)가 세계를 도울 수 있는 패기가 없으면 한 소녀(少女)가 이와 같이 천하를 놀라게 함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선왕(先王)을 도우며 충인(冲人)을 보좌하여 나의 계서(契書)를 맡아서 항상 과인(寡人)의 좌우에 있으라. 이제 그 우로(雨露)와 같은 은혜를 어찌하겠는가. 나의 곁에 있으면서 이것 저것을 보살펴 저 용상(龍象)의 덕행을 기록하되, 자네 스스로도 조심(操心) 지행(持行)하여 비문의 상()과 질()이 빈빈(彬彬)하고 또한 문장을 펼쳐 보면 미미(亹亹)하여 마치 거울을 높이 달아 놓으면 더럽고 아름다움이 함께 나타나는 것과 같이하여 진실대로 기록하되 더 이상 능력이 부족하다고 겸손해하지 말라.” 하셨다.

() ()은 어찌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하면서 계속 사양할 수 없어 절하고 물러났다. “무릇 종()에 명()하고 돌에 새겨서 천자(天子)의 맹세를 표하고, 짐승의 피를 서로 마시고 봉반(捧盤)하여 제후(諸侯)의 신의를 나타내었습니다. 이치가 대서(大筮)의 일에 부합하는 것이니, 어찌 범용(凡庸)하다 하겠습니까! 만약 몽필(夢筆)이 아니면 어찌 임금의 뜻을 대신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듣건대 천균(千均)이나 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교칙(敎勅) 중에 비록 한 글자의 잘잘못이 있으면 그에 따르는 포상과 엄벌(嚴罰)은 매우 커서 면할 수 없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박릉(博陵)에 이미 범안(犯顔)의 충간(忠諫)이 있었으며, 낭사(琅邪)에는 괴색(愧色)의 송덕비(頌德碑)가 있었음을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러 온 몸을 적시며 걱정은 폐장(肺膓)을 막는 것과 같이 답답하였다. 어느날 밤 소상(瀟湘)강가에서 무상시(無常詩)를 읊었다. 세상은 빠르고 빨라 어느덧 10년이 지났는데, 고경(古鏡) 속 그 사람은 지속(遲速)을 초월했네! 나는 그 어느 한 쪽도 분()이 없음을 개탄한다.”고 하였다. 울면서 왕명을 받아 솔이(率爾)하게 찬술하였다.

법문을 듣고도 주()하는 바가 없거니 육신이 어찌 상주(常住)할 수 있겠는가. 밝은 달이 만월(滿月)도 되고 또한 편월(片月)도 되지만, 항상 원명(圓明)한 본체(本體)는 여의치 않으나, 범부(凡夫)는 전도망상으로 스스로 분별심을 내고 있다. 이 심체(心體)는 소리로 불러서 찾을 수 없으며 색상(色相) 위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2천 년 후에 법통을 계승할 자 누구인가. 곧 지곡사(智谷寺) 진관선사(眞觀禪師)일 것이다.

스님의 휘()는 석초(釋超)이고, 속성은 안씨(安氏)이니 중원부(中原府)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조(尼藻)로서 사마(司馬) 벼슬을 역임하였으니, 선행을 많이 쌓은 가문이며 깊이 예악(禮樂)을 닦았다. 항상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 관용(寬容)함을 넓혔으며,잘못하는 일은 두 번 다시 범하지 아니하고, 그 인자함을 쌓았다. 주리(州里) 사람들이 누구도 업신여기는 이가 없었으니 늙어서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머니는 유씨(劉氏)이니, 칠성(七星)의 상서가 날아 입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잉태하여 10개월 만인 건화(乾化) 2년 후량(後梁) 태조(太祖) 임신(壬申) 1015일 옆구리에서 탄생하였다. 부모는 상봉(桑蓬)의 경사스러움을 얻고 마음이 건상(乾象)의 징조를 기울여 어머니를 위로하였으니, 귀동자(貴童子)를 낳았기 때문이다. 건화(乾化) 2년인 후량(後梁) 태조(太祖) 임신(壬申) 1015일 스님이 태어났으니, 날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귀는 길어서 어깨에 이르고 손을 아래로 드리우면 무릎을 지나갔다. 네 살 때 이르러 오신채(五辛菜)는 냄새도 맡지 아니하였다. 비록 화택(火宅) 중에 있었으나 마음은 언제나 진롱(塵籠)의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의용(儀容)이 점점 기이(奇異)하며 거주(去住)하는 것이 다른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였으니, 마치 푸른 산이 초봄에 옥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쇄락(灑落)하고, 맑은 강물에 달이 비치듯 진실로 구슬을 간직한 것과 같이 청아(淸雅)하였다. 점점 자라서 동서(東西)를 인식하는 나이에 이르러서 자신이 품고 있는 포부를 북당(北堂)에게 고백하기를, “마침 이웃에 놀러 갔다가 어떤 상인(上人)이 법화경(法華經) 중 묘장엄왕품(妙莊嚴王品)을 외우는데 묘장엄왕(妙莊嚴王)이 정장(淨藏)과 정안(淨眼) 두 왕자(王子)가 출가 수도하는 것을 허락하는 대목이었습니다. 법화경(法華經)을 일념(一念)으로 신종(信從)하는 복도 다생(多生)에 수용한다 하였으니, 어찌 양거(羊車)인 소승(小乘)과 녹거(鹿車)인 중승(中乘)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대승법(大乘法)인 마(우차(牛車)와 나란히 하고자 발원합니다.”하니, 아버님이 이미 허락하였고, 국왕도 또한 윤허(允許)하였다.

그 후 무인세(戊寅歲)에 영암산 여흥선원(麗興禪院)에 가서 법원대사(法圓大師)를 친견하였다. 대사가 묻기를, “동자(童子)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니, “온 곳으로부터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대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한 점의 별 만한 불덩어리가 넓은 광야를 태운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온 목적이 무엇인가?”하니, 대답하기를, “원컨대 스님의 건병(巾缾)을 섬기려고 합니다.”하였다. 대사가 이르기를, “좋다. 그렇다면 여기에 있도록 하라.”하시고, 대중을 모아놓고 삭발하여 주었으므로 바야흐로 총림(叢林)에 있게 되었고 군목(群木) 중에서 멀리 뛰어났다. 담복화(薝蔔花)에서 풍기는 아름다운 향기를 어찌 지란(芝蘭)의 향기와 비교할 수 있으며, 우담발화(優曇鉢花)가 토하는 아름다움을 어찌 도리(桃李)꽃과 견줄 수 있겠는가. 의발(衣鉢)을 전해받는 것은 타인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니며, 건당(建幢)하여 입실(入室)하는 일 또한 오로지 자신만이 알 뿐이므로 이심전심인 것이다. 무자년(戊子年) 2월에 법천사(法泉寺)의 현권율사(賢眷律師)를 계사(戒師)로 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강경하는 소리에 귀를 막고 글상자를 덮어 마음을 깨달았다.

점석(點石)한 인연(因緣)은 몇 년 쯤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중생을 제도한 포주(抛籌)공덕(功德)은 여러 생임을 알고 있다. 문도들은 모두 간절히 지도해 준 데 대하여 앙모(仰慕)하고, 사중(寺衆)은 다같이 더욱 탁마(琢磨)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경자년(庚子年) 봄 일역(日域)을 떠나 전당(錢塘)을 목적지로 하여 배를 타고 바야흐로 청소(淸霄)에 들어서니 갑자기 강한 파도가 벽창(碧漲)에서 일어나므로 선중(船中) 사람들이 모두 실색(失色)하였으나, 스님만이 파안미소(破顔微笑)하며 손가락 한 번 튕기니 산 등같은 큰 파도가 문득 고요해졌다. 절강성(浙江省) 서쪽에 도달하고는 육환장과 발우를 가지고 제일 먼저 용책사(龍冊寺)의 도부(道怤)스님을 찾아가 예배하고 곁에 섰다. 용책스님이 그의 안목(眼目)을 보고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아니하고 대중에게 이르기를, 잘 안배(安排)하여 날이 가고 달이 다가옴에 마치 별이 총총 모이고 안개가 피어오르듯 뭉게뭉게 모일 것이다. 둥우리를 떠난 악작(鸑鷟)과 같으니 상서가 구포(九苞)에 응하고, 물위로 빼어난 부용(芙蓉)의 향기가 천엽(千葉)으로 풍기는 것과 같았다. 그로부터 발길 가는대로 순례하였으니, 용화(龍華)의 일면(一面)은 마치 종사(宗師)가 불을 물에 던지는 것과 같았다.

이로부터 명성이 널리 사중(四衆)에 들었으며 항상 대승법(大乘法)을 천양하였다. 서리가 내리는 야반(夜半)에 차갑게 보이는 별은 갑중(匣中)의 칼을 호령하고, 하늘에 가득히 덮힌 먹구름은 벽상(壁上)에 걸려 있는 북을 효후(哮吼)함과 같았다. ‘사비(師比)는 망념(妄念)을 여의고 무심(無心)해지기를 위하는 것이니, 어찌 참선하는 곳을 고정(固定)할 수 있겠는가!’하고는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에 문득 백월(百越)을 떠나 삼한(三韓)으로 돌아왔다. 파도가 심하여 물러가는 익조(鷁鳥)가 질풍(疾風)을 만나 그 강풍(强風)을 거슬러 날아가려고 하는 것과 같았으니 준응(俊鷹)이 하늘 끝에서 별다른 길을 얻어 귀국 후 새롭게 선법(禪法)을 중흥할 좋은 기회를 얻었다. 돌아온 후 곧 바로 단궐(丹闕)에 나아가 임금께 귀국인사를 하였다. 때에 정종(定宗) 문명대왕(文明大王)이 흥주(興州) 숙수선원(宿水禪院)에 주지(住持)하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선사는 사생(四生)들에게 약석(藥石)을 베풀어 모두에게 치료하기 어려운 침아병(沉痾病)을 낫게 하였으며 육로(六路)에 다리를 놓아 모두 정도(正道)로 돌아가게 하였다.

기유년(己酉年)에 이르러 광종(光宗) 대성왕(大成王)이 금륜(金輪)의 위()에 올라 전국(全國) 산하(山河)를 통괄하며 십방삼세(十方三世)의 세존(世尊)을 신봉(信奉)하되, 위로는 향화(香火)를 올리고 부처님의 부촉(付囑)하심을 계승하여 우리 스님의 단나(檀那)가 되었다. 임금이 특조(特詔)로 진관선사로 하여금 지곡사에 가서 대중을 도광(導匡)하도록 하였다. 스님이 그곳으로 떠나는 날 밤 산 오른쪽에 삼장원(三藏院)이 있는데, 주수(主首)가 신이(神異)한 꿈을 꾸고 이른 새벽에 대중을 동원하여 멀리까지 나가서 환영하였다. 스님께서 상당(上堂)하여 설법(說法)하니 산중에 있는 새와 짐승들이 모두 남남(喃喃)하며 효후(哮吼)하였다. 위대하신지라! 스님께서는 목욕하지 아니하여도 몸에 때가 묻지 않았으니 소천자(蕭天子)인들 어찌 스님의 신통변화(神通變化)를 알 수 있을 것이며, 발우(鉢盂)가 석상(石上)에 붙어 떨어지지 않음을 보고서야 도명상좌(道明尙座)도 비로소 육조(六祖)인 노행자(盧行者)의 신통력에 놀라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스님의 신이(神異)한 위릉(威稜)을 내 어찌 일일이 채집하여 기록할 수 있겠는가! 가까운 수년(數年) 동안 영험을 나타낸 것이 자못 많았으니, 이것 또한 어찌 그를 모두 기록할 수 있겠는가! 예컨대 담수(淡水)로 염수(塩水)를 만든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도 오히려 소득(小得)에 구애되었으니, 언우(齴齲)에 비교한 것이요, 족히 크다고는 할 수 없다. 목목(穆穆)하여 도덕(道德)이 궁중에까지 알려졌고, 황황(皇皇)하여 명성이 방방곡곡에까지 들렸다.

현덕(顯德) 6년 기미년(己未年)에 이르러 왕이 금성(金城) 북쪽에 있는 귀산선사(龜山禪寺)를 헌납하므로 명을 받들어 그곳으로 이석(移錫)하였다. 기이한 조각달이 바다에서 떠오르고 특이한 오색구름이 산을 떠났다. 용과 범의 특호(護持)함이 있었으니 이는 도덕(道德)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진애의 오염이 야기됨이 없어서 초연하고 청량(淸凉)하여 과거(過去)의 마음을 갖추고 미래의 법을 얻었도다. 임금께서 스님의 초절(勦絶)한 경지를 가상히 여기고 종횡무애(縱橫無礙)한 법력(法力)을 존경하여 취의(毳衣) 1(一襲)과 아울러 각종 도구(道具)를 하사하였으니, 황유(皇猷)입음을 경축하여 그 영광이 상대(像代)에 널리 펼쳐졌다. 보좌(寶座)에 단정(端正)히 앉아 크게 진풍(眞風)을 천양하면서 6(六銖)의 향을 태우니 그 향기 구름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옷은 백납(百衲)을 입었으니 산천(山川)과 같이 길이 한가로움을 머금었으며, 명성이 크게 떨치니 학도(學徒)들이 책을 펴고 엎드렸다. 여래(如來)께서 인행(因行)할 때에 비록 뼈를 갈아 먹물로 하여 사경(寫經)한 공덕으로 불은(佛恩)에 보답하고 몸을 베어낸 살점으로 배고픈 비둘기를 구제하였다 하나 이는 직접 보지 못하였다.

다시 성남(城南)에 있는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로 이주(移住)하니, 그곳 대중들이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만남과 같이 여기며, 목마른 사람이 물을 얻음과 같이 여겨서 물의 차고 더움을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으니, ()와 무()에 대하여 무엇을 더 물을 것이 있겠는가. 그로부터 한 해가 되지 않았으나 운집한 대중이 일천 명에 이르렀다. 흉흉혜(洶洶兮)여 물결치면서 항아리를 흔들었고, 낙낙혜(落落兮)여 이남박으로 모래를 버리고 쌀을 골라냈으니, 이는 이른바 한 등()이 여러 등()에 나누어 비추니 만상(萬象)이 함께 비추어짐과 같았다. 나에게는 법이 있어 전해주지 않았지만 저는 또한 무심(無心)으로 얻었으니, 초월하여 선후를 선양하고 가리워서 고금을 비추었다. 오색(五色)이 찬란한 거북의 털은 마침내 만나기 어렵고, 일지(一枝)의 토끼뿔 또한 쉽게 얻을 수 없다. 진여(眞如)는 상()이 없으나 다만 무지(無知)하여 반야(般若)를 알지 못할 뿐이다. 내면은 충만(充滿)하면서 밖으로 순응하고 후념(後念)을 끊고 전념(前念)에 비추니 마치 물위에 일어나는 거품과 같고 특히 공중에서 일어나는 번갯불과도 같았다. 뜻하지 아니하였으나 혜일(慧日)이 바야흐로 법계(法界)에 떠오르고 자주(慈舟)가 홀연히 선하(禪河)로 돌아왔도다.

건덕(乾德) 2년 세재(歲在) 갑자(甲子)에 세수 53, 하랍(夏臘) 38세를 일기로 그 망철(妄轍)의 길을 싫어하여 본원(本源)의 길로 되돌아간다 하시고, 92일 상당(上堂)하여 대중에게 이르기를, “생겨남이 없는 자가 참다운 근본이요, 떠나감이 없는 것이 바로 법신(法身)이다. 멀리 고금(古今)을 살펴보니 스스로 표탕(漂蕩)하였다. 섶이 다 타면 불이 꺼지고 거울이 경갑(鏡匣) 속에 감추어지면 따라서 영상(影像)도 사라지니 누가 거래(去來)할 것인가. 자체는 조금도 손익(損益)이 없는 것이다. 고인(古人)이 일러준 말씀을 내가 떠난 후에 부처님의 유칙(遺勅)과 같이 지키고 망녕되게 식종(飾終)의 의식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하시고 단정히 앉아 입적(入寂)하였다. 기특하도다! 높기는 수미산(須彌山)과 같고 굳기는 금강(金剛)과 같이 견고하였다. 대지(大地)는 진동하고 군중들의 마음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으며, 큰 바람이 나무를 뽑고 폭풍우가 언덕을 무너뜨렸다. 노생(勞生)이 비록 흥망을 탄식하나 대법(大法)은 원돈(圓頓)을 여의지 아니하였다.

그의 제자 징경대사(澄鏡大師) 언충(彦忠)은 원주(原州) 문정원(文正院)의 주지이고, 언흠(彦欽)은 지곡사(智谷寺) 주지, 언연(彦緣)은 광주(廣州) 흑석원(黑石院) 주지, 언국(彦國)은 태백산(太白山) 각돈원(覺頓院) 주지, 현광(玄光)은 복암원(福巖院)의 주지로 각각 있었고, 그 외에는 남북으로 다니면서 선지식을 참심(叅尋)하거나 임천(林泉)에 은둔하여 인연이 있어도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이미 가고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그 달에 탑을 지곡산(智谷山) 남쪽에 세우고 그 예()를 표하였다. 조정(朝廷)에서 사신을 보내어 시호를 진관선사(眞觀禪師) 오공지탑(悟空之塔)이라 하였으나, 아직 정석(貞石)을 다듬어 세우지는 못하였다. 우리 스님의 진신(眞身)을 비장한 탑의 주변은 사방으로 연하(煙霞)가 첩첩히 덮혔고 일봉(一峰)은 의발(衣鉢)처럼 옹위(擁衛)하였다. 오호라! 봄이 돌아와 꾀꼬리가 말을 하니 다만 훌륭한 도제(徒弟)가 있음을 말미암은 것이고, 해가 지고 원숭이 우니 무심(無心)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우리 성상(聖上)께서 대업(大業)을 계승함으로부터 능히 중흥(重興)을 열었으니 태평(太平)하고 무위(無爲)함이 어찌 훈화(勛華)만 못할 것이며, 유도(有道)하고 평화로움이 어찌 창발(昌發)보다 낮으랴! 추수(秋水)는 삼척검(三尺劒)을 추발(抽發)시키지 못하나 훈풍(薰風)은 오직 오현금(五絃琴)을 보내도다.

이르는 곳마다 시키지 아니하나 스스로 행하고 때를 응해서는 아무리 멀어도 오지 않는 이가 없었다. 널리 알려진 스님의 덕행은 모두 공명록(功名錄)에 기록되었다. 스님의 한 짝 신발은 비록 남겼두었으나, 편문(片文)의 행적이라도 엮어놓지 아니하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성진(聲塵)이 사라질까 염려되어 풍비(豊碑)를 세우도록 명하여 멀리 후대에까지 유전(流傳)토록 하였다. 비록 연민(燕珉)은 새겨졌으나 아직 포서(鋪舒)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해죽(嶰竹)은 애잔()하나 능히 탄쇄(殫灑)를 제공하지 못하였다. ()이 다행히 편류(編柳)는 아니었으나 일찍이 몽화(夢花)는 못되었다. 혹시 비석이 능히 말을 한다면 마땅히 조잡하고 조차(造次)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없고, 귀부(龜趺)가 말을 알아 듣는다면 반드시 황당(荒唐)하다고 비방할 것이다. 그러나 감히 획린(獲麟)과 같이 명문(名文)이 되기를 바라며 또 절필(絶筆), 즉 절묘(絶妙)한 문장이 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명을 지어 찬양하노라.

 

머물지 않는 것은 법신(法身)이요,

항상(恒常)치 않는 것은 색신(色身)이다.

십방(十方)에 두루하신 부처님이여!

삼계(三界)의 사생(四生)인 일체중생(一切衆生)

제법(諸法)이 허망한 줄 알 것 같으면

지묘(至妙)한 진리(眞理)에 도달하리라.

범부(凡夫)가 성경(聖境)에 이르러가면

대법륜(大法輪) 굴려서 제도하리라.

()함은 본래 허공이 아니고

()함도 색()이나 장벽(墻壁)아닐세.

그 까닭 왠지를 묻지 말아라.

허황된 망상(妄想)으로 분별(分別)일 뿐.

애당초 분별심 내지를 말고

담적(湛寂)한 세계로 돌아갈지라.

성자(聖者)는 본래 확연(廓然)하거니,

또다시 어디서 찾을 것인가.

문밖엔 북방(北方)의 신수(神秀)이시고,

문안엔 남방(南方)의 혜능(惠能)이로다.

모든 법 훤출히 통달하고서

일심(一心)의 등불을 밝힐지어다.

세세(細細)한 율행(律行)에 구애치 말며,

홍심(弘深)한 대승(大乘)도 저()하지 말고,

묵묵(黙黙)히 최상승(最上乘) 터득한다면

그 도리(道理) 비할 자 아무도 없다.

제제(濟濟)한 그 위의(威儀) 마승(馬勝)과 같고,

낙락(落落)한 그 모습 당당(堂堂)도 하다.

허공에 날으는 새들과 같고,

구름위 소요(逍遙)한 새매와 같네.

편벽한 소절(小節)에 구애(拘礙)치 않고

()처럼 요곽(遼廓)에 머물고 있네.

지자(智者)는 이 도리(道理) 능히 알건만

도저히 분별(分別)로는 알지 못하리.

고운(孤雲)은 무심(無心)히 정처(定處)가 없고

편월(片月)은 고상(高尙)히 비추고 있네.

밝은 달 그림자 밤을 밝히고,

적막한 심야(深夜)에 산을 비추네.

마음은 둥글어 우주(宇宙)를 싸나,

마침내 방촌(方寸)에도 들어가도다.

한 생각 돌이키면 부처인 것을

일체를 초월하여 상관치 않네.

옛적엔 삼한(三韓)을 이별하고서

멀고 먼 백월(百越)서 유학하고는

마침내 하직인사 하지 않았고,

귀국 후 왕에게 알현(謁見)치 않았네.

전단향(栴檀香) 숲속을 떠나왔으며,

금사자(金獅子) 굴에서 벗어나왔다.

스님의 경지(境地)를 살펴보건대

복혜(福慧)를 구족(具足)해 궐()함이 없네.

법상(法床)에 오르면 태양과 같고

대중(大衆)의 모임은 구름과 같다.

산중의 새짐승 모두 모여서

법문(法門)을 듣고자 꿇어앉았네.

이 광경 불청자(不聽者) 전혀 없건만

나만은 호올로 듣지 못했네.

()이란 본래 성색(聲色)을 초월하니

분별(分別)로는 그 도리(道理) 알지 못한다.

여생(餘生)은 상유(桑楡)에 임박하였고,

사방(四方)에 난야(蘭若)가 둘러싸였네.

사람은 모두가 높고자 하나,

나 자신 언제나 부끄러울 뿐.

두발(頭髮)을 밟게 한 인욕선인(忍辱仙人)

땅에다 포금(鋪金)한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

이 어찌 아무나 할 수 있으랴!

그러나 스님은 능히 하였네.

크도다! 우리의 부처님 법문(法門)!

뭇사람 마음을 열어주도다.

본래 생멸(生滅)은 없는 것인데,

어떻게 세월이 무상(無常)타 하랴!

미간(眉間)의 백호(百毫)는 옥과 같으며

찬란한 얼굴빛 황금색이요,

()따라 나타남 수중월(水中月) 같고,

험난한 구법(求法)길 바다를 건너네.

구름은 흩어져 자취가 없고

수중(水中)에 비친 달 온 곳이 없네.

원명(圓明)한 진성(眞性)에 비교한다면

금석(今昔)의 대비(對比)로 견줄 수 없다.

법신(法身)은 온 세상 두루하건만

육신(肉身)은 무상(無常)해 생멸(生滅)하도다.

성상(聖上)이 신()에게 조칙(詔勅)하셔서

비문을 짓도록 당부하시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2(1995)]

 

지곡사 진관선사 오공탑비문은 朝鮮金石總覽海東金石苑에는 전하지 않고, 韓國金石全文에는 서울대학교 소장 탁본과 釋苑辭林을 전재(轉載)하였고, 허흥식(許興植)高麗佛敎史硏究, p.598에도 서울대도서관 소장(청구번호 4016~11)을 전재하고 있다. 그리고 大東金石苑, p.48에는 일면(一面)만 남아 있는데, 홍협(洪恊) 국자박사(國子博士)가 서병전(書幷篆)하였다 하였고, 장충식(張忠植)韓國金石總目에는 金石淸玩2에도 실려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은 문맥(文脈)이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나, 상고할 전거(典據)가 없어 문장대로만 번역하였다.

 

※※ 이 비석은 없어졌고 서울대 소장 탁본과 釋苑辭林에만 전하며, 건립연대는 韓國金石全文에는 981(경종 6)이라 하였고, 장충식(張忠植)韓國金石總目에는 962(광종 13)으로 전하고 있으나, 진관선사(眞觀禪師)의 적년(寂年)964(건덕 2)이므로 總目962년설은 아직 진관이 입적하기 2년 전이고, 또한 韓國金石全文981년설도 아무런 전거가 없으므로 이 비의 확실한 입비연대(立碑年代)는 알 수 없다.

 

眞觀禪師: 속명 안석초(安釋超, 912~964), 아버지는 안이조(安尼藻)

경남 산청군 지곡사(智谷寺)에 있던 진관선사(眞觀禪師, 912~964)의 비. 현재 비는 남아 있지 않고 탁본만 전하며 비문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이 편찬한 석원사림(釋苑詞林)에 실려 있는지곡사 진관선사비(智谷寺眞觀禪師碑): 스님의 속명은 안석초(安釋超, 912~964), 중원부(中原府) 출신, 스님의 아버지 안이조(安尼藻)는 사마(司馬) 벼슬을 역임했고, 어머니는 유씨(劉氏)이다.

신라말-고려초에 속명을 석초(釋超)라 하고, 속성을 안씨(安氏)를 쓰는 진관선사(眞觀禪師)라는 스님이 살고 있었고, 중원부(中原府)가 명확하게 어딘지 모르지만 중원부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가 안이조(安尼藻)라 한 것으로 보아, 신라말에도 안씨가 있었는지, 또는 고려초 사성을 받은 것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분명히 안씨(安氏) 성을 쓰는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마(司馬)라는 벼슬은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꽤 고위직으로 생각된다.

 

왕융(王融,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학자. 광종부터 성종 때까지 12회에 걸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955(광종 6)에 후주(後周) 세종(世宗)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하여 대상(大相)의 관직을 가지고 광평시랑(廣評侍郞) 서봉(徐逢)에 이어 두번째 고려 사절로 후주에 다녀왔다. 966년 지공거가 되어 최거업(崔居業) 등 진사 2인을 뽑고, 972년 김니(金柅)와 함께 지공거가 되어 양연(楊演유방헌(柳邦憲) 등 진사 4인을 뽑았으며, 이듬해 다시 지공거가 되어 백사유(白思柔) 2인을 뽑고, 974년에는 한인경(韓藺卿) 2인을 진사로 뽑았다. 975(경종 즉위) 대광내의령겸 총한림(大匡內議令兼摠翰林)으로 있을 때 신라 왕 김부(金傅: 경순왕)를 상보(尙父)로 책봉하고 도성령(都省令)의 관호(官號)를 내리는 조서를 찬()하였다. 977년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고응(高凝) 6인을 진사로 뽑았으며, 979년 다시 지공거가 되어 원징연(元徵衍) 등을 진사로 뽑았다. 983(성종 2)에는 최행언(崔行言) 등 진사 5인을 뽑고, 이듬해 이종(李琮) 등 진사 3인을 뽑았으며, 985년에도 진량(秦亮) 3인을 진사로 뽑았다. 988년 이위(李緯) 등 진사 4인과 의업(醫業) 2인을 뽑았으며, 989년 최득중(崔得中) 등 진사 18인과 명경(明經) 1, 복업(卜業) 2인을 뽑았다. 994년 최원신(崔元信) 등 진사 8인과 명경 9인을 뽑았다. 997년 성종이 죽기 직전 평장사(平章事)로서 사면령(赦免令)을 반포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981년에 찬한 강주(康州) 지곡사(智谷寺) 진관선사비(眞觀禪師碑)비문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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