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짜장면(차오장멘: 炸醬麵)
짜장면은 본래 중국에서 유래된 음식으로 산둥반도에서 토속 면장(麵醬)을
볶아서 만든 국수인 중국어 차오장멘(작장면: 炸醬麵)이 그 시조라 합니다.
원래 작장면(炸醬麵)의 작장(炸醬)은 ‘장을 볶는다’ 라는 뜻이며,
이때의 장은 밀가루로 만든 까만색의 춘장(椿丈)을 말합니다.
따라서 작장면은 (춘)장을 볶아서 만든 국수를 뜻하며,
그 뒤 작장면이 자장면으로 변화되었고 다시 지금의 짜장면으로 변신했답니다.
실제로 짜장면은 우리나라에서 화교들이 새롭게 만든 것이기에 현재 중국에서는
우리와 같은 자장면은 없답니다. 한국식 짜장면은 1883년에 인천항이 개항된 후
인천에 건너온 청나라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위해 새롭게 만든 음식이랍니다.
본래 짜장면은 중국 북경과 천진지방에서 하류층들에 유행하던 음식인데,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산둥반도 지방의 노동자들이 우리나라로 흘러 들어와
고국에서처럼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 야식으로 즐겨먹었답니다.
그 당시에는 중국인들이 짠 맛의 춘장을 많이 넣지 않았기에 짜장면 색깔은 거의
하얳다고 합니다.
그러더 중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조성되면서 한국에 정착한 화교들은 이 음식에 야채와
고기를 넣어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자장면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달콤한 카라멜을 춘장에 섞었기에(이름하여 사자표 춘장) 달면서 고소하고
색깔도 까만 지금의 자장면이 완성되었다 합니다.
아무튼 지금의 짜장면 출생지는 인천입니다.
1883년에 개항한 인천에는 곧 청국지계가 설정되고 청인이 거주하게 되었는데 1920년
부터 항구를 통한 무역이 성행하면서 중국 무역상을 대상으로 한 중국음식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중국의 대중음식을 처음으로 접했던 우리 서민들은 신기한 맛과 싼 가격에
놀랐고 청인들은 청요리가 인기를 끌자 부두 근로자들을 상대로 싸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때 손쉽게 만들어진 것이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먹
는 짜장면이었던 것입니다.
짜장면이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 만들어 졌는지를 밝혀줄 만한 자료는 거의 없지만
정식으로 자장면이란 이름으로 음식을 팔기 시작한 곳은 1905년 인천에 개업한 공화춘(共和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당시 화려했던 옛 건물의 자취만 남아있지만 일제 때 부터 청요리로 크게 이름을 날렸던 고급 요릿집이었습니다.
이렇게 공화춘이 성업을 이루자 화교 유지들은 인근의 대불호텔을 사들여 북경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중화루'의 문을 열었는데, 이곳에는 북경에서 건너온 周사부라고 불리던
일급 주방장이 있어 전통 북경요리를 맛보려고 서울을 비롯 각지의 미식가들이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1차 세계대전에 따른 호황으로 청관 거리에 ‘동흥루’가 연이어 문을 열면
서 인천은 청요리의 본산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향토짜장면을 만들어낸 ‘자금성’의 손덕준씨는 그의 할아버지가 중화루의
마지막 요리사였을 만큼 대를 이은 솜씨가 가히 국보급이라 할 수 있었답니다.
그가 만든 자장면이 독특한 이유는 손수 만든 춘장에 있었는데 그것을 1년간 숙성시킨 뒤 일반 시판용 춘장과 섞어서 그만의 춘장을 만들었는데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맛이었답니다.
또한 일반 짜장소스는 재료를 거의 다지듯 토막 내 면을 다 먹으면 소스가 남았지만 향토짜장면은 채를 썰기 때문에 젓가락질이 쉬워 그릇이 깨끗했다고 합니다.
중국어 차오장멘 즉 짜장면은 음사이기 때문에 중국어와 가까운 자장면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하여 짜장면으로 발음을 해도 자장면으로 쓰고는 했습니다.
2011년 8월 31일 짜장면이 복수표준어가 되면서 우리는 다분히 의도해야만 가능했던 자장면이라는 발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됩니다. 차오장멘이라는 말이 짜장면보다는 자장면과 더 비슷한 것 같기도 하지만, 어차피 한국발음으로 변형된 것이라면 우리식의 발음이 존중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2. 짬뽕(ちゃんぽん: 炒馬麵)
짬뽕이란 음식의 이름 ‘짬뽕’은 중국어에는 없는 단어이며, 짬뽕이란 음식도 물론 중국에는 없다. 그렇다면 중식당의 대표요리인 짬뽕은 도대체 어디서 온 음식일까. 뜻밖에도 짬뽕이란 음식의 이름은 일본으로부터 왔다. 그런데도 어떻게 짬뽕이 일식당이 아닌 중식당의 대표 메뉴가 된 것일까.
짬뽕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데 일단 중국 본토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아니고 19세기 말 한국이나 일본에 나와 있던 중국인, 즉 화교들이 만든 음식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답니다.
우리나라 짬뽕이 인천에서 자생적으로 생겼다고 하는 의견은 짬뽕의 기원을 중국 산동성 초마면에 두고 있습니다. 초마면은 주요리를 만들고 남은 육류와 채소 부스러기를 모아 볶다가 육수를 부어 만든 국물에 면을 말아 먹는 음식으로,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가 청나라 군대를 끌고 조선 땅에 들어올 때 따라온 중국 산동성의 상인들이 인천의 중국 조계지에서 고향의 음식 초마면을 만든 것이 오늘날 짬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처음부터 짬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음식은 19세기 말 일본에서 나타났다.
우리가 오늘날 일식주점 등에서 종종 접하는 ‘나가사키 짬뽕’이 그것인데 이 음식은 그 출발이 매우 자세하게 알려져 있다. 나가사키 짬뽕은 메이지 시대 당시 나가사키에서
사해루(四海樓)란 중국음식점을 경영하던 중국 복건성 출신 진헤이준(진평순: 陳平順)이란 화교가 만든 음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가사키에 돈 벌러 온 중국 노동자들과 가난한 중국인 유학생들이 제대로 배불리 먹지 못하는 것을 본 진평순이 중국 식당에서 쓰다 남은 야채와 고기 토막, 어패류 등을 볶아 중화면을 넣고 끓여 만든, 싸지만 양이 많고 영양가도 넉넉한 요리를 고안해냈는데 이것이 짬뽕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짬뽕은 중국 유학생은 물론 일본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일본의 천황까지도 즐겨 먹었다고 한다. 지금은 진헤이준의 증손자가 그 자리에 ‘시카이로’라는 중식당을 운영하고 있으며, 2층에 짬뽕박물관이 있답니다.
이 짬뽕도 초마면처럼 쓰다 남은 채소와 부스러기 고기에다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나는 싸고 풍부한 해산물 등을 볶아 중화면을 넣고 끓여 만든 음식이었습니다.
이 음식은 복건성 요리인 탕육사면(湯肉絲麵)을 변형한 것이라고 합니다. 짬뽕이란 음식명은 ‘밥 먹었어?’라는 중국어 ‘치 판(chi fan 吃飯)’의 복건성 사투리 ‘샤번’, ‘챠본’에서 유래했다는 의견도 있고 원래 일본어에서 악기의 음이 이리저리 뒤섞인다는 어원과 이미 서로 성질이 다른 물건이나 재료 등이 뒤섞이는 것을 가리키는 어원 또는 후퇴를 알리는 징소리와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가 뒤섞인다는 어원을 둔 찬폰(ちゃんぽん)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화교의 대부분은 중국의 북부지역인 산동성 출신이 많았고 일본의 나가사키는 17세기부터 개항지였던 만큼 배로 드나드는 중국인들이 많았는데 주로 중국 남쪽지역인 복건성이나 광주성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분명 레시피 상으로는 유사성이 많지만 엄연히 다른 요리였던 산동성의 초마면과 복건성의 탕육사면이 한국에서 짬뽕으로 정리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아마도 비록 고향은 다르지만 타향살이를 하는 화교들 간의 교류와 커뮤니티 형성을 통한 음식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법률상으로는 하나의 기준으로 관리되었을 한국과 일본의 화교들 간의 교류가 짬뽕이란 요리로 나타난 것입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짬뽕도 오늘날 짬뽕처럼 매운 국물이 아니라 나가사키 짬뽕처럼 하얀 국물이었답니다.
우리나라 짬뽕에 고춧가루가 본격적으로 첨가된 것은 1970년대 이후 고춧가루가 보편화 되면서 부터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고춧가루는 상당히 고가였기 때문에 서민식당에서 마음대로 쓰기 어려운 식자재였으며, 또 1970년대 화교의 경제활동 제한으로 중식당의 주인이 화교에서 한국 사람들로 넘어가면서 짬뽕에 본격적으로 고춧가루가 들어갔다고도 합니다.
동아시아 화교문화에 한국인의 매운 문화가 또 한번 뒤섞인 것입니다.
3. 닥꽝(たくあん): 沢庵)
천하일미 단무지 발명한 다꾸앙澤庵 선사
중국요리 집에서 흔히 먹는 단무지. "왜무지"라고도 하는 "다꾸앙"이 그것을 처음 만든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다꾸앙"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선승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더욱 호기심이 생길 법할 겝니다.
다꾸앙 소오호오(澤庵宗彭, 1573~1645) 선사는 중국 선종의 정맥인 임제종의 승려로서 우리나라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에 살았던 스님이며, 또한 일본 동경 시나가와 부근에 동해사(東海寺)라는 절을 개창한 고승이기도 합니다. 10세 때 출가하여 수행승으로 참선에 몰두하였으며 32세 때 스승으로부터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하였다"는 인가를 받고 "다꾸앙(澤庵)"이라는 법호를 받았답니다.
천하일미 단무지의 유래
어느 날, 다꾸앙 선사가 있는 동해사(東海寺)로 장군 도꾸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찾아왔으며,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식사 도중, 무 절인 것을 먹어 보고 도꾸가와 장군이 말했습니다.
"아, 이것은 천하일미(天下一味) 군요!"
매일같이 산해진미에만 익숙해진 장군인지라 오히려 담백한 것에서 맛을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다꾸앙 선사가 웃으며 말했답니다.
"무로 만든 것인데……."
도꾸가와 장군은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아니 무를 어떻게 해서 만들었습니까?"
"쌀겨와 소금에 절였을 뿐입니다."
"아! 참 별미요. 대사께서 고안하신 모양이니 앞으로 이 무를 "다꾸앙"이라 부르기로 합시다."
이렇게 해서 단무지의 이름이 생겨났답니다. 덕이 높고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능통할 뿐 아니라 교양을 두루 갖춘 다꾸앙 선사는 일왕과 막부의 장군을 비롯해 당대의 권력자는 물론 문화인사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가졌고 단무지 역시 도꾸가와의 식사에서 유래하게 되었던 것이랍니다.
위의 글에서 이러한 점들을 놓고 본다면 닥꽝을 단무지로 번역한 것은 우리의 지나친 피해의식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이는 자장면이 차오장멘의 음사이기 때문에 짜장면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하는 측면과 연계해서 생각해 본다면, 문제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파악해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 발견되거나 발견된 물건 등에 발명자나 발견자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리 드문 경우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꾸앙스님을 단무지로 번역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지 아니하고 드문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한 끼의 손쉬운 외식으로 중국집에서 짬뽕과 짜장면을 시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짬뽕과 짜장면이 담긴 그 철가방 속에는 어김없이 닥꽝이 있습니다. 그 철가방 속에 담긴 것은 일본말인 잠퐁과 중국어인 차오장멘, 그리고 불교승려인 다꾸앙으로 구성된 어쭙잖은 세계화이며 다문화가 녹아 있습니다.
(참고: 다음카페. 불교 문화로 읽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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