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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경흥사 수미단

참땅 2014. 7. 1. 14:34

경산 경흥사 수미단

     - 룡과 기린의 한 판 대결 그리고 꼽사리 낀 깨고락지 

 

토요일에는 집사람과 함께 한터라 별반 그렇게 솔솔한 재미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홀로인 지금도 매반 그렇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역시나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할까.

 

울컥, 아리게 찾아오는 배고픔도 잠시, 괜시리 내가 처량해 보일 무렵

경흥사 안내판이 그래도 나마 위안을 주며 오늘 요까이~ 다짐하며

돌계단 옆짝 편으로 바싹 차량을 주차 후 오르막 계단을 올랐다.

오후 4시의 한가로운 게으름에 경종을 울리듯 건너편 산비탈에서 우루루 뭔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에 발을 헛디딘 멧돼지라도 떨어지려나 목을 빼 봐도 역시나다.

언감생심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란다.

 

다른 절집과는 달리 대웅전 건물은 숨은 듯 앞쪽 전각에 가려 대웅전 현판만

오롯이 보일 뿐 전체 윤곽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동학산 자락 깊숙이 자리한 절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외부와 단절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거기에 대웅전 또한 한 몫을

거들고 있는 것 같다.

 

 

해발 300m의 뒤편 동학산 산봉우리는 풍수적으로 볼 때 학의 머리에 해당하고,

그 학의 부리 부분에 현재 절집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다시 그 좌우에 날개에 해당하는 산봉우리가 하나씩 있고 건너편에도 계곡이 있어

절 앞쪽으로 흘러 나가고 있는데, 맥반석이 풍부한 지역에다 수량이 많은 산이라

사찰 내의 수조에는 사시사철 물이 철철 넘쳐흐른다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신라의 혜공스님이 659년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시대의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 최초의 승병들이

이 곳에서 훈련을 하고 전쟁에 나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명당이 머무를 때까지만 해도 사찰의 규모가 컸으나 결국 왜군에 의해 불태워지

고 조일전쟁이 끝난 후 중건되었으나 옛적 규모만큼 회복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새로이 건축한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삼존불상은 1644년에 은행나무로 조성한 것인데,

이는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목숨을 바친 영규대사와 이름이 같은 영규스님

이 전국을 돌며 탁발한 돈으로 중국 흑룡강에서 은행나무를 구해 삼존불을 모셨다

는 기록이 주존불의 복장에서 나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은행나무 불상 - 하니 울진 불영사에서 얼마 전 조성한 목불이 퍼뜩 떠오른다.

 

조선시대 후기에 건축된 법당인 명부전은 경흥사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원래 이 삼존불상을 모셨는데, 지금은 어찌된 일인지 석가모니불과 함께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양쪽에 앉아 협시하고 계신다.

 

지장보살을 가운데 모시고 협시로는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모셔야 마땅한

이 명부전에는 대웅전으로 사용될 당시의 수미단이 일부 남아있는데 그 구성과

조각솜씨가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에 뒤지지 않는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수미단은 그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조각물도 겨우 한 단만 남기고 있어 진한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경흥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본거지 였다고 하여 일제시대에도 수난을 당했고

또한 명부전 뒷벽에다 일본의 국가 문장을 그려 넣어 일본을 경배하라는 아픈

역사의 쓰라린 경험도 겪어 봤다.

이러한 이유로 이리저리 절 모습이 틀어지고 바뀌면서 어느 순간 수미단도

훼손되고 절단되어 지금의 모양새가 된듯하다.

이 수미단 조각은 찬란했던 불교의 나라 고려시대 작품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을 만큼 섬세하고 치밀 화려해서 보면 볼수록 경탄하지 않을 수 없을뿐더러,

색감도 고색이 완연하여 옛 모습 그대로 이다.

그러나 일부 근래에 덧칠한 흔적과 보수한 부분이 있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수미단을 살펴보자.

우선 정면에서 수미단을 바라보면 원래 모습을 잃어버렸음을 알 수 있는데,

것은 수미단 조각물이 칸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고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면 향 왼쪽 끝에는 검은색 게가 풀꽃무늬 사이에 새겨져 있는데 앞면과 뒷면이

서로 뚫린 투각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장인의 솜씨가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뒷면에서도 칼질을 해서 투각자체가 이중으로 보이게 하는 이중투각기법을

썼으니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이중투각기법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고도의 기술임과 동시에 부처님을

향한 공덕이 그만큼 깊지 않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임에랴.

다리 마디마디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앞발 집게도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오똑 선 눈알마저 새겨 지금 막 먹이를 잡으려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검은 게 오른편으로 황룡이 영기의 불꽃을 휘날리며 나아가는데 몸의 비례가 적당하고

힘센 앞발과 뒷발의 근육이 긴장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 긴장감이란 황룡이 몸을 쭉 펴고 편안하게 승천하지 못하는 순간임을 포착하는데

몸체를 최대한 구부리고 힘겹게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물속에서 하늘로 승천하기 위한 힘찬 도약의 단계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어쩌랴, 이미 여의주는 앞서가는 기린이 차지할 것만 같은데...

 

 

황룡 오른쪽으로 기린 한 마리가 여의주를 향하여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닫고 있다.

달리는 뒤쪽으로 여의주와 천마에서 나온 불꽃무늬가 날리고 있고, 수염과 갈기도

바람에 흩날리는 듯이 뒤로 향하였다.

여의주 뒤쪽으로 보이는 풀줄기들은 이중 삼중으로 보일정도로 그 조각솜씨가

치밀해서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된다.

풀줄기 한 가닥은 불꽃무늬 밑으로 해서 천마의 허리에 걸쳐있어 힘차게 달려

나가는 기린의 모습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다 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이 풀줄기들은 혹 황룡을 편파적으로 응원하는 팬들일까?

 

훅 하고 달려 나가는 기린의 허리를 풀줄기가 한번 휘감은 데다 왼쪽 뒷 발목을

움키고 이제 막 오른 발목을 채는 순간이다.

어쩌면 앞발이 들려 뒤로 나자빠질 순간인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코앞에 여의주가 있는데, 이런 이런 우야모 좋노...

 

여기까지가 하나의 나무판이나 세로로 세운 칸막이 동자기둥이 없어 이것 역시

원래 보습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다음 칸에는 왼쪽으로 머리를 향한 청룡의 기다란 몸이 역시 불꽃을 휘날리며 날아가고

다시 청룡의 오른쪽으로 천마가 청룡과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그런데 이 청룡 좀 보소.

뒤에 있는 여의주를 잡을 생각 않고 수달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날아가고 있다.

불쌍한 수달은 꼼짝 못하고 이제 죽었구나 싶은데 다행히 잠시 숨 고를 수 있는 여유를

풀줄기들이 마련해주고 있다. 뒷발과 허리 몸통을 움켜 쥔 풀줄기 때문에

청룡은 풀줄기를 빠져 나오기 힘겨운 듯 상체가 꼬여 있다.

그러나 이 수달은 이제 죽은 목숨이다.

상체 부분을 움츠린 것은 머리를 앞으로 쭉 내밀기 위한 전 단계이기 때문에 바로

한치 앞에서 여유를 부리는 수달을 잡아먹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다.

불상한 수달!

 

 

이 수달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시대 혜통스님이 불교에 입문하시기전 수달을

잡아먹고 버린 뼈가 수달자식들을 찾아가 어린 수달을 품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던 그 수달이 아닐까. 그럼 또 죽어야 하나.

불교의 윤회설은 밑도 끝도 없구먼...

 

 

청룡의 꼬리 부분은 비스듬히 하늘로 향했는데 붉은 색으로 외곽선을 칠하여 달려

나가는 생동감을 더욱 고조시켰다청룡 오른쪽에는 개구리가 꽃이 핀 풀꽃 사이에

앉아 있다. 개구리의 섬세한 발모양이 사실적으로 조각되고 몸을 구부린 개구리와

이제 막 도듬발 뛰려는 자세까지도 나타난 것으로 보아 장인의 관찰력과 순간

포착이 뛰어 났음을 알 수 있다.

 

 

봄을 상징하는 개구리는 불가에서도 수행을 상징하는 독특한 존재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코와 입을 꿰어 물에 담가 놓았다가 이듬해에

아직도 버들가지에 꿰인 채 살아있는 개구리를 발견하고 출가를 결심한 진표율사의

경우와 신비로운 자장율사의 수행공덕을 상징하고 있는 통도사 자장암의 금와보살이

좋은 예라고 하겠다.

 

 

개구리는 총 4마리를 새겼는데, 청룡 몸통 위로 2마리, 그리고 오른 쪽 기린 뒤편

2마리를 표현하였다. 특히 청룡 머리 위에 새긴 개구리는 발가락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우측 기린 뒤편 뒷발 언저리에 새긴 개구리는 이제 막 도움닫기를

하는 순간을 포착했음에 장인의 눈썰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청룡이 방향을 바꿔 수달을 향하는 순간 기린은 옳다구나 이제 막 여의주를

낚아채는가 싶었는데, 온통 풀줄기로 인해 몸을 맘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든다.

앞 오른 발이 수풀에 얽혀 버려 뒷발만 허둥거려 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애타는 마음에 눈을 부릅뜨고 입을 앙 다물며 빠져 나오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한 것은 뒤 꼬리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음이다.

 

 

세 번째 칸에는 큰 게 한 마리가 몸을 반쯤 숨기고 있는데 왼쪽 눈이 오뚝 서

있어, 마치 살아있는 게가 이 긴박한 상황에 어찌 할 바를 몰라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묘사한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다음에는 연꽃 한 송이를 큼직하게 새겼는데 풀줄기 하나가 정면을 덮고 있어

꽃이 마치 반으로 나누어진 것처럼 보인다. 연꽃 오른쪽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몸을 반쯤 풀숲에 가리운 채 조각되어 있다.

이 물고기는 게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 온전히 드러난 집게발을

더 숨기라고 조언하는 듯하다.

 

 

네 번째 칸에는 연꽃과 모란이 나란히 조각되어 있다. 그 주위를 풀줄기들이

감싼 채 섬세하게 조각돼 있고, 방형의 귀퉁이 부분에는 수리한 흔적도 보인다.

곧 네모난 부분을 잘라서 억지로 맞춰놓은 것이어서 풀잎 줄기들이 서로 연결 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수미단 좌측면에는 꽃들만 새겨져 있는데, 향 왼쪽 끝에는 모란꽃 한 송이만을

정사각 형태로 잘라내 이어붙인 것을 볼 수 있다.

원래의 제 모습을 잃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 칸에는 하나의 판자에 연꽃 세 송이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배치 되어있다.

활짝 핀 연꽃을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으로 새겼는데 가운데 있는 연꽃은

그 양쪽에 있는 연꽃보다 훨씬 복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점은 연꽃 사이사이에 기둥줄기가 있음을 살필 수 있는데,

그 풀줄기들도 대충대충 그냥 새긴 것이 아니라 섬세한 구성과 능숙한 솜씨로

조각을 해서 어디 한군데 어수룩한 곳이 없음을 볼 수 있다.

 

오른쪽 끝에는 길이가 맞지 않는 작은 동자기둥을 어색하게 붙여놓아 조각의

앞면이 노출되는 것을 가리고 있으며 이 역시 제짝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른쪽 측면도 왼쪽 측면과 같은 구조이다. 오른쪽 끝으로 구름 문양이 새겨진

네모난 조각판을 이어 붙여 보수한 흔적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다음 칸은 하나의 기다란 나무판에 연꽃 한 송이와 모란꽃 두 송이를 새겨

넣었다. 복잡하게 얽힌 풀줄기 위에 피어난 연꽃은 옆에서 본 모습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미 연밥이 들어가 자리 잡은 심방이 가운데 봉곳이 솟아올라 와서 누가

보아도 연꽃임을 확인시켜 준다. 가운데 새겨진 보상화는 특이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꽃 속에 병이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 모란꽃이지 싶다.

그 왼쪽 꽃은 모란꽃을 위에서 본 모양으로 새겨져 있다.

세 송이 꽃 사이에도 복잡하면서도 치밀하고 섬세한 풀줄기들이 빈틈없이 꽃들을

감싸고 있고 줄기 기둥도 그 사이사이에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경흥사 수미단은 지금 비록 한 단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동식물의

큼직한 배치와 풀줄기들의 구성 및 뛰어난 조각 솜씨와 섬세함으로 인해 훌륭한

목공예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덧칠을 하지 않고 옛 단청의 색깔을 그대로

두어 옛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우리에게 좋은 눈호강 꺼리를 제공해 있다.

 

다시 한번 더 경흥사 수미단을 제대로 찬찬히 살펴보고 싶음은

비단 나만의 바램일까?                                                              (경산시청, 다음카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