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경사 삼장탱
보경사 삼장탱과 통도사 삼장탱의 비교
1792년(정조 16년)의 통도사 삼장탱은 표현 생략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화원은 지연, 치심, 우심, 영종 등 22명이고 이들은 괘불도 같이 그렸다.
수화원 지연은 1775년 통도사 명부전 시왕탱, 1798년 통도사 명부전 지장탱,
1801년 통도사 백운암 지장탱, 1803년 언양 가지산 석남사 명부전 지장탱을 그렸다.
그렇다면 지연은 통도사를 중심으로 지장탱을 주로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심과 영종은 6년 전인 1786년에 통도사 감로탱에 참여했었다.
지연은 1792년의 통도사 삼장탱을 1778년 보경사 삼장탱 초본을 이용하였다.
영조대 대둔사와 남장사 삼장탱이 1년 사이에 새로 수정된 초로 작업한 것과는
비교한다면 통도사 삼장탱의 경우 새로운 초를 창안해 낼 의지가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지연이 통도사 작품에서 변형을 준 부분은 대좌 높이이다.
보경사 작품에서 천장보살 대좌 높이는 다른 두 보살과 같고 대신 대좌를
뒤로 물러나게 해서 앞의 공간을 만들었는데 통도사 작품은 천장보살 대좌를
한 단 더 쌓아서 천장보살을 높였다.
이런 두 방식은 이미 경남지역에서 나타났던 것으로 보경사본은 관룡사본
방식과 같고 통도사본은 운흥사본과 같다.
지지보살(좌우협시는 용수/다라니이다)
천장보살 대좌 앞 성중가운데 천장보살 쪽으로 몸을 향하고 있는 왕은
시왕 중 두 명이라고 보아야한다.
왜냐하면 이들을 셈해야 시왕의 숫자가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선중은 선인이 하나, 성군이 셋이어서 이전 경남,
전남지역의 성대한 구성과 비교하면 너무 단촐하다.
천장보살 좌우 성중들은 변화 없이 경직되었고 이는 지지보살과
지장보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같은 얼굴의 시왕이 모두 홀을 든 것은 단조로운데 붉은 털이 올라간
마지막 왕이 유일하게 다른 보습이지만 변화를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대좌 앞 바닥을 기존처럼 황색으로 하지 않고 천장보살의 신광바탕색과
같게 흰색으로 하고 격자선 무늬를 넣은 것은 장식화 현상이다.
그 결과 그림 아랫부분이 가벼워 보여서 그랬는지 녹색과 주황색 구름을
첨가했지만 군더더기로 복잡하기만 하다.
천장보살(좌우협시는 진주와 대진주이다)
지기 중에서 주목할 만한 도상은 승려 얼굴로 보경사본에서는 흰 수염으로
둥근 얼굴이 통도사본에서는 회색빛 수염의 약간 네모난 얼굴로 변하였다.
삼장탱에 승려 얼굴이 들어갔다는 사실은 삼장탱 구성이 다른 어느
탱화보다도 자유로웠다는 것을 말해준다.
승려의 얼굴만큼은 실재 피부색을 넣어 하얀 얼굴의 다른 왕들과 구분시켰다.
고운 얼굴선, 하얀 얼굴색, 깔끔한 수염, 온화한 성중 표정 등은 좋지만
얼굴색이 흰색 일색인 것은 단조롭다.
1770년대 이후 영국사, 마곡사, 용주사 삼장탱이 성중 피부색을 달리하며
음영까지 시도한 시대 유행과는 많이 다른 방식이다.
지지보살, 천장보살, 좌우협시 의복을 한결같이 녹색과 붉은색만 번갈아
입혀 놓아 지루하다.
이런 점은 통도사 삼장탱이 이전의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이 사라진 양식화
된 작품이라는 것을 잘 말해준다.
지장보살(좌우협시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다)
* 보경사 삼장탱은 1997년 10월 10일 도난당하여 현재는 대웅전 좌벽에
모사본이 걸려있다. 보경사 삼장탱 도판은 [불교문화재도난백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1999)에 실려 있다.
크기는 세로 208cm, 가로 260cm이다. (조선시대 지장시왕도 연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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