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포항문화역사길라잡이 교육강사님이신 김희준 선생님이
청하 보경사 내연계곡 선일대와 계조대 사이에 200m의 현수교와
보경사 앞에서 삼지봉 까지 케이블카를 설치 할 포항시의 개발계획에
안타깝고 분노한 마음으로 잘못된 사업 추진 내용을 대내외에 알리고
내연계곡 개발사업을 백지화하여 자연, 문화유산을 보존하고자 하는 글입니다.
포항지역의 자연유산을 보존하고 문화유산를 발굴, 보호하는 활동을 하는
포항문화역사길라잡이 한 회원으로서 분노하는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내연산 현수교와 케이블카 설치 비보를 접하고
김희준(대동중 역사교사, 전 보리수필문학회장, 동대해연구소 연구위원, 포항KYC문화
역사길라잡이 교육강사)
어떤 부자가 술에 취한 가난한 친구의 옷 속에 보석을 넣어 주었건만 그 사실을 몰랐던
빈자는 평생 궁핍함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법화경의 비유 설법이다.
포항에는 유네스코가 세계 자연과 문화의 유산으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을 보석이
있다. 내연산과 보경사(寶鏡寺)가 그것이다. 내연산의 경관과 보경사와 암자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태백산에서 낙동강의 동쪽으로 흐르다가 울진 백암산
을 거쳐서 영천 보현산으로 이어지고, 보현산에서 이어져 청하 응봉이 솟았고, 응봉에
서 동쪽으로 두 줄기 산이 굽이치며 그 사이에 내연계곡 30리를 열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규장각학사 청성 성대중은 내연산은 겉으로는 범상한 산이지만 그 내면에는 폭
포와 바위와 석대가 어우러진 비경을 간직한 명산이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경북의 명
산으로 봉화 청량산과 청송 주왕산과 포항의 내연산을 꼽았다. 이 셋 중에 바다를 끼고
있는 명산은 내연산 밖에 없어서 18세기 안동의 선비 유도원은 내연산을 단연 으뜸으
로 꼽았다. 내연계곡 30리에는 삼용추(연산, 관음, 잠룡), 사자폭(상생폭), 은폭을 비롯
한 무수한 폭포와 월영(비하), 학소, 선열(선일), 문수, 습득 등의 석대와 삼동석, 승선
교, 서하굴, 청풍문 등의 선경(仙景), 향로, 문수, 삼지 등의 웅혼한 봉우리가 있다.
바다와 산, 해와 달을 모두 가진 명산으로 옛 사람들은 내연산을 작은 금강산이라고
불렀다.
자연이 아름다워 인문학의 공간, 내연산은 역사 속에서 인간의 아낌을 받아왔다.
불교문명이 꽃피었던 신라·고려 시대에는 보경사와 암자들을 짓고 괴로움에서 벗어나
는 중생 구원의 지혜와 행복의 열쇠를 얻기 위하여 수행자들이 머물고, 세상살이에서
상처를 입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신행 도량이 되었다. 유교문명이 국가와 사회의 지
도 이념이 되었던 조선 시대에는 사대부들이 유산(遊山)을 하며 치세의 덕성을 함양하
였다. 주민들은 산이 베푸는 은덕에 감사하며 산을 숭배하며 살아왔다.
의상대사는 중국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 스님 문하에 유학하여 화엄 교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화엄종을 열었다. 신라시기에 창건된 종남산 보경사는 화엄종 사찰로 지금도
9세기의 석탑, 석등, 신방석, 주춧돌이 남아 있으며, 현존하는 4개의 암자와 견성암, 하
문수암, 내원암, 동석암 등 10개의 암자 터들이 확인된다. 선교일치의 새로운 불교운동
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수행과 교학의 체계를 정립한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제자로서
한국불교사에서 능엄경을 천명하였던 원진국사가 6년 동안 보경사에서 주지하였고,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수행기치를 내건 수선사(修禪社)의 2세 지도법사로서 한국불교
최고의 선서인 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편찬한 진각국사 혜심이 보경사 금당인 적광전
에서 설법 하였다. 포항 월포리에서 태어나 보경사로 출가하였던 오암당 의민 스님은
평생 동안 삼용추(삼폭포) 위 대비암에 머물며 후학을 길렀다. 또한, 조선시대 불화를
대표하는 장엄한 종교예술, 비로자나불후불도를 비롯한 많은 보물들을 보경사에서 만
날 수 있다.
청하현감 옹몽진이 퇴계의 문인으로서 사대부 사회에서 명망이 높던 경주부윤 구암 이
정 선생에게 내연산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1563년 구암의 내연산 유산으로 조선의 사
대부들은 앞 다투어 내연산의 진달래꽃과 단풍을 찾아 왔고, 경관에 이름을 부여하며
명소들이 주는 의미와 감흥을 문학으로 표현 하며 몸을 닦았다. 내연산의 눈동자로 산
의 정기가 모두 모인 삼용추에서 시인묵객과 선비들은 그 경관이 사랑스러워 그곳을
떠날 줄 몰라 하였다. 그곳의 바위에 새겨진 300명의 이름들을 보라.
1587년에 황여일은 아들을 잃고 울적해 하던 숙부 황응청을 모시고 울진 해월헌에서
출발하여 청하읍성의 해월루와 월포 조경대에 오르고 임진왜란 진주성 혈전의 영웅,
영해부사 최경회와 성문 앞에서 작별을 하고서 내연산을 이틀 동안 유산하였다.
그의 여행기 유내영산록은 단행본으로도 유통되었을 만큼 기행문학의 백미이다.
뛰어난 문학성과 세밀한 기록성을 지니고 있어서 인문학의 공간인 내연산을 읽는 고전
이 되었다. 내연산이 있어서 이토록 빼어난 글이 탄생하였고, 이렇게도 아름다운 문장
이 있어서 우리는 내연산의 마음을 읽고 감동에 젖을 수 있다. 그는 적멸암과 용추와
월영대와 선열대에서 슬프도록 깊은 아름다움과 장쾌한 감흥을 유감없이 표현하였다.
한강 정구의 문인이었던 서사원, 어우야담으로 유명한 유몽인의 조카로 청하에서 오랫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던 홍문관 부제학 취흘 유숙, 원주의 대학자 우담 정시한, 월영대
의 속칭인 기하대를 비하대로 개명한 영남 퇴계학의 정맥을 잇는 대산 이상정, 당대 최
고의 여항 시인으로 서울에까지 명성을 떨친 흥해 향리 농수 최천익 진사, 영남 불교계
의 어른 스님인 오암 의민 스님, 모두가 내연산에서 노닐며 반야지혜의 눈이 열리고 성
정(性情)을 존양(存養)하였다.
나는 최근에 황여일의 탁월한 기행 문학인 유내영산록 역주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또한 시간과 인식 속에서 잊혀지고, 와전되고, 뒤섞여 있는 내연산과 그 명소들, 보경
사와 그 암자들의 위치와 연혁,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낮에
는 위태로운 암벽을 오르고 밤에는 새벽까지 문헌의 숲을 헤치며 인문학의 공간인 내
연산의 자연과 문화의 유산들을 사람들과 공유하려고 한다. 내연산에 대한 오랜 관심
과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신라∙고려∙조선 3왕조, 1,300
년 동안 운주암과 백운암을 짓고 수행자들이 머물며 경영하여 왔던 지상 최고의 수행
도량, 선비들이 올라 해와 달을 희롱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삶과 우주를 관조하였던
비경 중에 비경인 선열대(禪悅臺) 정상에서 건너편 계조암 곁의 기기묘묘한 암봉 위로
무려 200미터의 현수교를 설치한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보경사 부근에서 삼지
봉까지 작은 금강산이라고 부르던 내연계곡 위로 케이블카를 설치할 것이라 한다.
조선의 땅이야말로 ‘참된 경치(眞景)’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화폭
에 담아내었던 화성(畵聖), 겸재(謙齋) 정선이 저승에서 통곡하실 슬픈 일이다.
중력과 태풍과 등산객의 몸무게가 주는 힘의 파동과 산화 작용으로 오래지 않아 무너
지고 말 현수교와 케이블카 설치는 지구 역사 46억년이 낳은 인류의 보배, 내연산을 돌
이킬 수 없도록 파괴하는 지름길이다. 산을 아끼고 고이 물려준 선조들과 자손만대에
죄짓는 일이고, 내연산 산신과 삼용추의 용신이 노하여 저주할 일이다.
원효 스님과 삼국유사에 연오랑과 세오녀와 오어사 이야기를 채록한 일연스님이 머물
렀던 신라의 명찰, 그윽하고 고요한 아름다움으로 갈 때마다 새록새록 정이 샘솟던 오
어사에 가니, 어느 날 느닷없이 우람한 현수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시민들의 의견 수렴
도 제대로 없었던 것 같다. 오어사의 고결한 운치를 망가뜨린 저 현수교, 내연산 삼용
추에 이미 설치된 그 현수교와 시멘트 다리, 눈 속의 티끌이다. 그야말로 신선경(神仙
境)의 ‘학을 굽어먹는’ 살풍경(殺風景)이다. 하물며 내연산의 눈동자와 얼굴에 ‘전봇
대’를 박아서야. 내연산이 정결한 스님과 고결한 선비와 어진 농부를 만나 깊이를 더하
며 더욱 빛이 났건만, 이제는 야만의 시대를 만나 처참하게 망가질 조짐을 보인다.
애통하고 분통한 일이다. 현수교와 케이블카를 설치한다면, 보경사와 암자의 수행과
신행공간은 깨어지고, 내연산은 인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휴식과 치유의 공간에서 인위
의 놀이공원이 되고 오래지 않아 볼썽사나운 산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손을 적게 될수록 가치가 높아지고 인간에게 무한한 혜택을 베푼다.
돌도 성내고 꽃도 찡그릴 개발 이익 추구보다 사람도 행복하고 나무도 즐거워 할 보존
의 지혜를 내주시기를 포항시 당국에 강력히 촉구한다. 때 묻지 않은 내연산이라야 세
계에서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개발을 할수록 내연산의
가치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살풍경한 내연산에는 오던 사람들도 발길을 돌린다. 내연산
은 시민과 국민의 산이고 우리들 자자손손이 아끼고 사랑해야 할 자연과 문화의 위대
한 유산이지, 오락과 한 때의 개발이익을 추구할 대상이 아니지 않은가. 내연산은 케이
블카를 설치한 중국 청두의 아미산이나 현수교를 설치한 청량산처럼 규모가 크지가 않
은 산이다. 설악산 대청봉에도 뜻있는 시민들의 노력으로 케이블카를 설치하지 않았
다. 현수교는 유격훈련장에 만들고 케이블카는 놀이공원을 만들어 청룡열차를 설치하
면 충분하다. 시민들이 내연산의 자연에 다가갈 수 있도록정비 해놓은 지금의 내연산
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전화위복이라고 하였다. 이번 기회에 삼용추와 서하굴의 고철과 쓰레기를 청소하고,
내연산을 주왕산처럼 국립공원이나 청량산처럼 도립공원으로 지정하도록 추진하고,
겸재 진경산수화의 산실로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산과 바다가 아름다운 포항에는 예
부터 인물도 많았다. 인도의 간디에 비견될 겨레의 큰 스승, 해월 최시형 선생의 동상
과 어록비와 기념관을 해맞이 공원에 건립하자. 18세기 당대 최고의 민중 시인이었고
청백리였으며 바닷가 흥해가 문사(文士)의 고을이 되도록 교육에 매진하였던 농수 최
천익 진사의 문학비를 흥해 임허대에 세우자. 여헌 장현광 선생이 명명하고 노계 박인
로가 노래하며 병와 이형상이 노닐었던 인간과 자연이 화합하여 빚어낸 명승, 입암 28
경을 보존하고 안내하며 교육의 마당으로 삼자. 아촌 이삼우 선생의 제안대로 겸재 진
경산수화 속의 청하읍성과 해월루와 월포의 조경대와 삼용추의 계조암과 선열대 위의
백운암과 운주암과 관음폭 위의 나무 사다리를 복원하여 보존하자. 조선시대 네 개의
고을이 합하여 이루어진 포항의 뿌리를 회복하는 역사지리박물관을 만들어 학생과 시
민들의 교육의 터전으로 삼으면 어떠할까. 그래서 시민들과 국민들이 역사의 향기를
맡으며 교양을 얻고 삶의 의미를 찾으며, 지친 심신을 쉬고 관조와 성찰, 상상력 계발
과 창조의 자산으로 내연산과 포항을 재발견할 수는 없을까.
1626년 여름, 청하현감 이립은 고을에 입하 뒤로 70일 동안 가뭄이 들자 용추에서 기
우제를 지냈다. 그날 밤 그는 자신의 부덕이 가뭄을 불러왔다고 자책하며 용추 가의
바위에서 한데 잠을 자며 용신에게 용서를 빌며 비를 내려주기를 기도하였다.
선인들이 얼마나 자연을 경건하게 생각하고, 애민 의식이 지극하였던가를 보여주는 일
이다. 이익의 개발이 아니라 가치의 계발이어야 한다. 궁핍하게 살아가는 술 취한 사나
이가 한시바삐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옷 속의 보석을 되찾기를 빌고 빈다. 우리도 이제
는 돼지우리에서 진주를 건져낼 수준의 문화의식은 있지 않는가.
내연산이 없으면 포항이 없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한가한 일이 아니다.
우리들이 나서서 내연산을 지켜야 한다.
'포항 > 내연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을미년 유월 둘째주 보경사 잔상 (0) | 2015.06.17 |
---|---|
내연산 할무당 산신님 화장 의식 축문 (0) | 2015.05.04 |
내연산 보경사 가는 길에 만난 뜻밖의 인연 (0) | 2013.03.18 |
파경破鏡의 어원? (0) | 2012.07.26 |
조왕- 청하 보경사(절집) (0) | 2011.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