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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碑)에 관하여- 두번째

참땅 2012. 8. 16. 10:46

()에 관하여- 두번째

 

5. 비문의 격식과 내용

  비문의 문체는 산문으로 된 서()와 운문으로 된 명()으로 대별된다. 서와 명으로 된 비문을 대게 비명병서(碑銘荓序)또는 비명이라 부른다. 서가 없이 명으로만 된 비문은 비송(碑頌), 명이 없이 서로만 된 비문은 비기(碑記)라 하여 따로 구별하기도 한다.

  비서(碑序)는 비문을 쓰는 경위를 설명하는 부분으로 본문에 의의를 부여하는 곳이다. 비명은 4·5·7언 등의 운문으로 이루어진다. 명에서는 짧고 화려한 수식을 동원하여 공덕을 찬양하고자 <시경(詩經)>의 송()이나 아()같은 전아한 시가에 그 근원을 둔다.

  명()이 없는 비기는 원래 한문 문체의 기()에서 온 것으로 기사(記事)를 뜻하는데, 사적비 따위 사실을 기록하는 비문의 많은 부분이 이런 비기의 형식을 취한다.

비문을 서술하는 형식과 그 순서는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내용에 따라 순수비문·기공비문·능묘비문·신도비문·탑비문·사적비문·사묘비문·정려비문·송덕비문 등으로 나누어진다.

 

  ① 순수비문: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를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신라시대 영토확장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② 기공비문: 군장(軍將)의 전공을 기리고, 그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것으로 관구검 기공비·유인원 기공비 등이 있다.

  ③ 능묘비: 통일신라시대부터 그 실물이 전해오고 있는데 대개 주인공의 생몰연대 및 그의 행적을 적는다.

  ④ 신도비문: 조선시대에 당상관 이상의 고관을 지낸 사람에게만 세워주던 비인데, 뒤  에 문중의 건비가 성행하면서 이런 제약이 흐려졌다. 신도비문은 비명, 주인공의 가계(家系행적 외에 글을 지은이와 글씨를 쓴 이, 그리고 건립 연월일 등을 기록한다.

  ⑤ 탑비문: 통일신라시대부터 그 예가 보이고 있으나, 특히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쇠퇴하고 유학이 성행하면서 탑비는 줄고 신도비가 성행하였다.

  ⑥ 사적비: 삼국시대에 경주 남산의 신성비(新城碑)에서 비롯되어 전시기에 걸쳐 건

립되었다. 사적비문의 내용은 공사의 동기·진행과정·동원인력 등 일

반적 사항과 때로는 관직명이 적히기도 하여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⑦ 사묘비: 사당·묘정·서원 등에 건립되는 비인데, 그 비문에는 사묘의 설치된 유래

와 관련된 인물의 공훈이나 사적을 적는다.

  ⑧ 정려비: 효자비·효부비·열녀비로 나누어 대개 문중에서 건립하는데 조선시대에서

는 유교사상 아래서 크게 유행하였다. 정려비문은 사적과 찬송이 그 주

요 내용이 된다.

  ⑨ 송덕비문: 대개 선정비문과 시혜비문으로 갈라지는데, 운문으로 그 공적을 미화 해서 표현하고, 글 지은이는 밝히지 않고 세운 사람이나 동리를 밝힌다.

 

 

  비문의 서체에는 예서·해서·행서 등이 있는데, 전서는 조선 숙종 때 허목(許穆)이 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있을 뿐이다. 서체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어, 점제현신사비는 고예(古隸), 관구검기공비·광개토왕릉비는 한예(漢隸)에 속하며, 해서가 가장 많고 다음이 행서이다. 비의 제액은 대부분 전서로 썻으므로 전액이라고도 한다.

  문체는 운문·고문이 있으나 당대(唐代)부터 별도로 사륙변려체(四六骿儷體)가 유행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이후의 금석문은 대부분 이 문체를 정식(正式)으로 삼았다. 진흥왕순수비는 한국식 산문이고, 특히 창녕의 척경비에는 한국 고유의 명칭과 이두(吏讀)도 적혀있다.

 

  비문 글씨 중에서 왕희지(王羲之)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신라는 경주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비와 양양의 사림사홍각선사(沙林寺弘覺禪師)의 탑비가 있다. 고려 때 것으로는 군위의 인각사보각국존정조(麟角寺普覺國尊靜照)의 탑비가 있는데, 이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의 비이다.

  행서로 쓰인 대표적인 것은 원주의 흥법사진공대사탑비이고,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를 집자한 비는 지금 경복궁에 옮겨진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의 탑비인데, 이는 신라 때의 김생(金生)의 필적을 집자한 유일한 것으로 동양서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비는 사적비와 고승의 탑비가 주를 이룬다. 이런 비는 모두 왕명으로 국가에서 세우는 것이어서 문장이나 글씨를 당대 일류 명인을 선정하므로 찬자(撰者)나 서가(書家)모두 정성을 기울여서 만든 문화의 한 정수라 할 수 있다.

 

  고려 초기에는 당초(當初)의 여러 대가의 서법을 따랐는데 그 중에서 구양순의

글씨가 가장 중요시되었다. 구양순체의 대가로는 구족달(具足達한윤(韓允민상제(閔賞濟안민후(安民厚임호(林顥오언후(吳彦侯)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작품

은 당·송대의 비첩(碑帖)에 비해 손색이 없다. 또 이원부(李元苻장단열(張端說)은 우세남(虞世南)의 필법에 정통하였으니, 반야사원경왕사비는 이원부가 우세남체로 쓴 것이고,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는 안양(安養)이 구양순체로 쓴 비이다.

  구양순체를 쓰지 않은 예로는 청주 용두사지당간지주(龍頭寺址幢竿支柱)의 철당기(鐵幢記)가 유공권체(柳公權體)이며, 채충순(蔡忠順)이 쓴 개성의 현화사비(玄化寺碑)는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한 행서이다. 고려 중기에 이르면, 구양순체의 유행이 사라지고 왕희지의 서법에 중국 남북조 이래 흘러내려온 사경(寫經)의 서법을 융화시켜, 부드럽고 우아한 서풍을 이룩한 탄연(坦然)의 뒤를 이은 중 기준(機俊)이 대감국사비(大鑑國師碑)의 기명(記銘)을 썻다.

 

  무신란 이후에는 유공권체의 서봉사현오국사탑비와 김효인(金孝仁)의 서체인 보경사원진국사비가 뛰어나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영향을 받았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신도비건립의 성행, 문중 중심의 건비의 성행으로 발전하면서 비문에 새긴 서체도 고려시대와 같은 일정한 틀을 벗어나 훨씬 다양화하고 대중화되었다.

 

6. 비의 건립 기준

  비의 건립기준은 품계에 따라 비의 크기와 종류를 구별하며 5품 이상은

귀부이수의 비로, 5품 이하는 비좌원수의 갈()의 형태로 구별 하였고 이는

당나라의 제도를 도입해서 우리나라의 국가 사회의 제도로 정착된 것이다.
가례원류(家禮源流: 1711)에 의하면 형태와 크기를 아래와 같이 구분하였다

                                             

                                                                                                                                 단위: cm 

NO

지위

비석형태

이수높이

비신높이

너비

귀부높이

1

귀부이수

97

273

109

115

2

1

귀부이수

91

257

103

109

3

2

귀부인봉

85

242

97

103

4

3

귀부천록

79

227

91

97

5

4

비좌원수

73

212

85

91

6

5

비좌원수

67

197

79

85

7

6

비좌원수

61

182

73

79

8

7

비좌원수

55

167

67

73

 

 

7. 비에 대한 과제

  비의 발생이 장의와 관련되어 있는 만큼 장례의 변천에 따라 비의 양식이나 내용도 변화해간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무덤의 위치나 표지하는 정도이던 것이 점차 사자를 추모하고 생전의 공적을 찬양하는 성격으로 바뀌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징표로 변질되었다.

  조선시대의 지배계층인 양반들은 자신의 신분적 우월감을 항상 의식하고 조상의 사적을 비에 새김으로써 가문의 빛남을 자랑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재물을 써서 당대의 저명한 문장가에 청하여 비문을 짓고 이름난 서예가의 글씨를 받아서 화려한 비를 세웠다. 비문의 내용도 다분히 형식에 흘러서, 사자의 공덕을 과장 찬송하기 위해 과분한 미사여구를 나열하고, 혁혁한 가계를 열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신분 과시나 문중의 우월표시라는 부정적 측면만을 보고 한국의 비를 평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충··열 등 유교적 덕행을 실천한 인물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후인의 귀감을 삼으려는 것이 건비의 본래 의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8. 수령비(守令碑) 종류

  수령이란 조선 때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으로 원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광의적으로는 고려, 조선시대에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써, 절도사, 관찰사, 부윤, 목사, 부사, 군수, 현령, 현감 따위를 이른다. 수령비는 수령이 그 고을을 떠난 후 그의 업적을 기리어 세운 비이다.

 

1. 선정비(善政碑):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수령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2. 불망비(不忘碑):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세운 비

3. 청덕비(淸德碑): 밝은 덕행을 베푼 수령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4. 거사비(去思碑):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을 그리워하며 세운 비

5.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백성을 사랑하며 어질게 다스린 수령을 기리기 위해 세

                                     운 비

6.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고결한 덕행으로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수령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7. 청백선정비(淸白善政碑):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수령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8. 휼민선정비(恤民善政碑): 백성을 구휼하고 훌륭한 정치를 베분 수령을 기리기 위

                                      해 세운 비

9. 활민선정비(活民善政碑): 백성을 구제하고 훌륭한 정치를 베푼 수령을 기리기 위

                                      해 세운 비

10.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영원히 잊지 못함을 기리며 세운 비

11. 청덕불망비(淸德不忘碑):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을 가진 수령을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기 위해 세운 비

12. 거폐불망비(祛弊不忘碑): 폐해를 없앤 공적을 남긴 수령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운

                                        비

13. 선정영세불망비(善政永世不忘碑):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수령을 영원히 잊지 않

                                                    기 위해 세운 비

14. 청덕선정영세불망비(淸德永世不忘碑): 맑은 덕행과 훌륭한 정치를 영원히 잊지

                                                         못하여 세운 비

15. 선정거사비(善政去思碑): 좋은 정치를 베풀고 떠나간 수령을 생각하며 세운 비

16. 청덕거사비(淸德去思碑): 청렴한 덕행을 가지고 백성을 다스린 수령을 그리워하

                                       며 세운 비

17. 휼민선정거사비(恤民善政去思碑): 불쌍한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수령을 그리워

                                                   하며 세운 비

18. 청덕애민비(淸德愛民碑): 청렴한 덕행으로 백성을 사랑한 수령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의성의 수령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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