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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碑)에 관하여- 첫번째

참땅 2012. 8. 16. 10:25

()에 관하여- 첫번째

 

1. 개설

  비란 어떤 사적(事跡)을 후세에 오래도록 전하기 위해 나무··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 세워 놓는 것을 이른다.

  비를 재질에 따라 분류하면 목비·석비·철비로 분류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목비와

철비가 간혹 있을 뿐 석비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비문에 새겨진 내용에 따라 탑비(塔碑묘비(墓碑신도비(神道碑사적비(事跡碑송덕비(頌德碑시비(詩碑) 등이 있다.

  비는 처음 묘문(廟門)에 세워졌던 것인데, 그 뒤 무덤가에 세워졌고, 후한(後漢)시대에 문자가 새겨지고 비신(碑身비두(碑頭부좌(趺坐) 등 형식이 갖추어졌다.

  대부분의 비는 세울 당시 또는 그와 가까운 시기에 기록되기 때문에 역사학·문자학·

서예 등 여러 분야에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된다. 또 비의 구조와 양식 등은 술사의 자료

가 되고, 비에 새겨진 입비 연월일은 정확한 연대를 밝혀주므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비로 가장 오래된 것은 서기 85년에 세워진 낙랑(樂浪)의 점제현 신사비(秥磾縣神祠碑: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성현리)이고, 그 다음은 집안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好太王碑), 신라 진흥왕의 척경(拓境) 및 순수비(巡狩碑) 등이다.

  고려시대에는 고승의 탑비가 많이 세워졌고, 조선시대에는 신도비와 묘비가 많이 세워진바, 시대에 따라 비의 양식과 내용이 변화하였다. 비에 새겨진 내용은 가장 확실한 역사서와 같이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2. 유래와 발달과정

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략 다음 네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다.

  ① 옛날 장의(葬儀)에서 세우던 풍비(豐碑) 유래 설

풍비란 큰 나무를 석비 모양으로 깎아 시신을 묻을 광()의 위·아래에 세우고, 그 끝에 뚫은 구멍에 밧줄을 연결하여 서서히 하관하는 장구(葬具)였다. 이 풍비가 장례 뒤까지 남게 되자 거기에 망인의 공덕을 기록한데서 비가 비롯되었다고 추정하는 설.

  ② 일영비(日影碑)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일영비란 고대의 궁실 뜰에 세운 돌기둥인데, 그 해 그림자를 보고 시각을 아는 일종의 해시계이다. 나중에 여기에다 글자를 기록함으로써 비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일영비는 희생물을 메어두는 기둥으로 쓰이기도 하였는데, 일영비가 햇빛 곧 양기를 흡인하므로 음양을 구별하는 영력이 있어 사후의 세계와 통한다고 인식하였던 것 같다.

  ③ 봉선(封禪)의 의식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봉선이란 역성입국(易姓立國)한 제왕이 천지의 제신(諸臣)에게 고공(告功)하는 의식이다. 봉선은 다시 봉과 선으로 구별되는데, 봉은 높은 산에 올라가 천신에게 제사하는 의식이고, 선은 작은 산에 올라가 산천신에게 제사하는 의식이다. 봉선이 비의 유래가 되었다함은 봉의 경우로서 산상에 글자를 새긴 돌을 세움으로써 산의 높이를 더 하여 준다는 뜻이 있었다. 이러한 봉선의 흔적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니,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塹城壇)은 제천의 제단으로, 제주도 삼성혈(三姓穴)은 땅에 제사한 터로 보인다.

  ④ 시신을 매장한곳에 표시물로 세운 갈() 유래 설

갈은 나무로 깎은 말뚝인데, 그 한쪽을 깎아 망인의 성명 따위를 적은 것이 나중에 돌에 새기는 갈로 발전하여 비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상 여러 가지 설을 종합하여 보면 비의 기원이 장의(葬儀) 또는 제의(祭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중에서도 풍비 유래설이 가장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어떻든 비는 신()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묘비가 장의의 유제(遺制)로서 매장된 사자(死者)를 나타내는 것과 같이 묘정비(廟庭碑)는 그 묘정에 향배된 인물이나 그곳의 신성을 나타낸다. 사묘(祠廟)에 안치된 신주(神主) 또한 비와 비슷한 모양으로 제작되기도 하고, 비가 세워진 장소는 신성시되어 제단으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념은 비 자체가 신이 다니는 길이라는 인식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무덤의 동남쪽에 세우는 신도비는 그러한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묘혈의 입구에 세우는 묘비는 지하인 명계(冥界)에서 지상으로 통하는 통로가 되며, 묘정비는 천상의 음계(陰界)로부터 신이 강림하여 음양을 초월한 힘이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비의 유래를 고대중국의 풍비로 볼 때, 시신의 하관을 위해 세운 기둥에 망인의

행적과 연대를 알리기 위한 약력 따위를 기록하면서부터 비의 신격화가 비롯되었

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쓰이던 비는 점차 그 용도를 달리하게 되었는데 진()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고 태산에 올라가 자기의 공적을 새겨 석비를 세우고 각석

(刻石)이라고 하였는데 이때 까지도 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후한(後漢)에 이르러서는 유교 이념에 따라 후장(厚葬: 생존 시에 사용하던 물품 또

는 귀중품을 묻어 주는 것)과 더불어 크게 유행하면서 수량과 양식면에서 큰 발전

을 하게 되고 그 뒤 당대(唐代)에 와서 묘제가 제정되고, 5품 이상 고관의 묘에는 이수와 귀부를 갖춘 비를 세우게 하였고, 6품 이하 관원의 묘에는 원두비신(圓頭碑身)에 방형대좌(方形臺座)만을 사용한 갈()을 세우게 함으로써 신분에 따라 형식을 달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당의 풍습이 그대로 들어와 능묘비(陵墓碑)나 통일신 라 말에서 고려에 걸쳐 유행된 승려들의 탑비에만 격식이 적용되었을 뿐 귀족들에 대한 규정은 없었으므로 주로 묘지석(墓誌石)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정3품 이상은 신도비를 세우고 그 이하는 <경국대전>에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비갈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비의 종류

  비와 갈()은 형태와 사용에 있어 구분이 있다. 그 모양이 편편한 사각(四角柱)이면 비라 하고 둥근 것은 갈()이다. 비는 가첨석이 있는 것으로서 비갈과 구분하며, 가첨석인 개석의 모양과 대좌의 모양으로 신분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비와 갈()은 묘주(墓主)의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형상·높이·문장의 내용에 큰 차이가 있었으며, 벼슬이 없을 때는 학생으로 제액(題額)을 새긴다.

 

  묘비는 중국의 진한(秦漢)시대 이래 사자(死者)의 이름·가계·행적 등을 돌에 새겨 묘역에 세운 것이다. 묘비에 쓰인 석문은 비··(() 등으로 분류되고 불승의 것은 승탑, 제왕의 것은 능비라 하며 묘갈·신도비와 같이 묘소 입구에 세워지는 것이 있다.

  신도비와 묘갈은 묘비의 일종으로 조선시대 유학을 숭상하면서 입석이 조상에 대한 효의 한 표현으로 인식되어 크게 성행하였다. 갈은 둥그런 자연석의 한쪽면만 깎은 것이므로, 비는 비신의 윗부분이 네모지고, 갈은 석물의 위쪽이 둥그스름하다.

신도비는 조선시대의 제도에서 3품 이상의 고관만 세울 수 있었으나, 때로는 공신·석유 등의 신도비를 왕명으로 세우게 한 적도 있었다. 왕릉의 신도비는 문종 때 금지되어 왕릉 신도비로는 세종대왕의 것이 마지막이었다. 죽은 자의 신주나 신격이 모셔진 사묘의 비도 사비·묘정비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었다.지지(地池궁실(宮室교도(橋道) 등을 창설 또는 수축하고 그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사적비·기념비 따위로 불리는데 사찰이나 묘사의 증·개축 사적을 적은 비도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고적에 세운 비는 대게 유허비(遺墟碑)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은데, 더러는 유허지에 단을 설치하여 고인을 제사하게 만든 것도 있어서 어떤 것은 사묘비(祠廟碑)에 가깝고 어떤 것은 사적비(事蹟碑)에 가까운 것도 있다.

  궁실이나 관사에 세워진 비는 그곳과 관련이 있는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경우가 있어 이런 것을 송덕비 또는 덕정비(德政碑)라 한다. 관아의 입구나 도로변에 세워진 이런 비는 흔히 불망비·선정비·시혜비(施惠碑추모비 등의 이름을 갖는 게 보통이다. 지방 수령이나 세도가를 칭송하는 이런 종류의 비는 한때 크게 유행되어, 지탄 받은 탐관오리들의 비가 세워진 예도 있었다. 그리하여 한때 국법으로 금지한 것도 있었으나 조선시대 말기에는 수없이 세워졌다. 이러한 비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았으므로 더욱 성행하였다. 기공비에는 충신·열사의 공덕을 기념하는 것이 있는데, 대게 그 공훈과 관련이 있는 곳에 세워지는 경우가 많다.

  국가의 교화정책에 관련된 비로는 효자비·열부비(烈婦碑열녀비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충신·열사와 관련된 비는 사당이나 단소(壇所)에 부속되는 경우가 있다. 특수한 비로는 개인의 일대기, 역사적 사건, 법령이나 포고문 따위를 새긴 것도 있는데 이 가운데 공지사항을 새긴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비문이라 하기는 어렵다.

또 하마비나 제석(題石석표(石標) 등도 비문이 없으므로 역시 비라 하기 어렵다. 돌에다가 개인의 시가나 산문을 새긴 것은 어떤 면으로 보면 기념비라 할 수도 있겠으나 비문의 통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따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① 묘표(墓標): 비문의 내용 중 명()이 없는 것을 묘표라 하며 봉분 앞이나 옆에

세우며 비의 앞면에 관직·본관·이름()등을 기록하고 뒷면에 음기를

기록한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② 묘갈(墓碣): 봉분 앞이나 옆에 세우며 가첨석을 얹지 않고 위가 둥그스럼하게

만든 작은 비를 말하며 이를 원수(圓首)라 하고 비신에 제액을 하지

않은 경우도 있고 음기가 있어 판단하기가 쉽다.
 ()과 묘갈명, 묘갈병서가 있는 경우도 있다.
  ③ 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행적·묘소의 방향 등을 적어 봉분 앞에 묻는데 보통 돌이나 자기(磁器)가 있고 봉분의 형태가 없어져도 누 구의 묘소 인지를 알 수 있도록 매장할 때 묻어 준다.

묘지(墓誌)에 글자를 새기는 것을 묘지명이라 한다.
  ④ 신도비(神道碑): 2품 이상을 지낸 관원의 무덤이 있는 근처의 길가 100보 이 내 동남쪽 길옆에 세우던 비석으로 제액(題額)과 음기를 새긴다. 유허비(遺墟碑): 선현들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알리거나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 유허비·유지비·구기비·기적비· 사적비 등이 있다.

  ⑥ 송덕비(頌德碑):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비를 말하며 선정비·영세불망비·

기공비·순절비·충열비·관개비·정충단비·대첩비·순교비·전승기적비

등이 있다.

  ⑦ 묘정비(廟庭碑): 서원 앞에 세우는 비로 건립취지와 주벽(主壁)으로 모시는 인물 에 대한 추앙의 문장 등을 새긴다.
  ⑧ 순수비(巡狩碑): 왕의 순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로 신라 진흥왕이 세운 창녕비·

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적성비·척경비 등이 있다.
  ⑨ 하마비(下馬碑): 종묘·궁궐·향교·서원 등의 앞에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사람은 말에서 내려야한다(大小人下馬)라는 글이 적혀있다.
   왕이나 고관 성현의 출생지나 묘 앞에 세우기도 하였으며 이들 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이다.
  ⑩ 척화비(斥和碑): 고종8(1871)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경계하기 위하여

전국에 세운 비이다.

 

  이외에도 공적비·열녀비·효자비·기념비·문학비·묘비(墓碑묘비(廟碑능비(陵碑

탑비·타루비 등 여러 종류가 있다.

 

4. 비의 형태

  석비의 형태를 살펴보면, 비석을 받치는 대좌(臺座), 비문을 새기는 비신(碑身), 그리고 비신을 덮는 개석(蓋石) 또는 관석(冠石)의 세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대좌는 비신받침으로 거북모양을 조각한 귀부(龜趺)오 네모로 깎은 방부(方趺)의 두 가지가 있다. 어느 것이나 위에 직사각형의 홈을 파서 비신을 끼우게 되어 있다. 대좌로 귀부를 많이 쓰게 된 것은 거북이 수명장존(壽命長存)을 상징하는 신령스런 동물로 인식되어왔으므로, 비문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하여 가장 적절한 상징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귀부의 귀두(龜頭)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장 오래된 형태는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에서 볼 수 있다.

  방부는 네모의 대석에 아무 수식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나 어떤 비에서는 돌려가며

꽃잎을 새기거나 2, 3단의 농대(壟臺) 위에 올려놓기도 하였다.

 

  비신은 대게 긴 직육면체(直六面體)로 깎아 세우는데, 앞면을 비양(碑陽), 좌우 양면을 비측, 뒷면을 비음(碑陰)이라 하며, 비문은 주로 비의 음·양면에 새긴다.

비음의 글을 음기(陰記)라 한다.
음기에는 찬((전자(篆字)와 생졸(生卒행적·가계·건립연대 등을 기록 하였으며 문장이 길면 비측으로 돌아가면서 새기게 된다.

돌이나 쇠붙이에 새기는 글을 금석문 (金石文)이라한다.

 

  비신의 상단부 또는 이수에 비의 명칭을 새기는데, 이것을 제액(題額)이라 한다. 전서로 쓴 것을 전액(篆額), 예서로 쓴 것을 종액(慫額)이라 한다. 횡액을 쓰는 경우, 비문은 대게 비음에서 시작하여 끝나지만 짧은 명문(銘文)은 종액의 좌우에 나누어 새기기도 한다.

비신에 새기는 비문에는 그 비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글을 새긴 각수(刻手), 또는 그 비의 건립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열기(列記)하기도 하였다. 비신의 가장자리에 봉선(封線)을 넣거나 문양을 새겨 장식하기도 한다. 천태시조대각국사비(天台始祖大覺國師碑)의 비신에는 사방으로 당초문을 새기고 상부에 용을 새겨 장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자연석에 비신의 윤곽을 선각하여 비문을 새기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대개 대석(臺石)과 개석이 생략된다.

 

  개석(蓋石)은 관석(冠石)이라고도 한다. 개석도 그 형상에 따라 용이나 이무기 모양이 있으면 이수, 연꽃문양과 보주(寶珠)가 있으면 하엽(荷葉), 구름과 꽃잎 해와 달 등이 있는 것은 관석(冠石)이라 하며 팔작지붕의 가첨석이 대표적인 개석(蓋石)이다.

개석이 없는 것도 있으며 비신의 상부가 둥글게 생긴 모양이면 원수(圓首) 모서리

에 각()을 접었으면 규수(圭首), 모서리에 각이 있으면 직수(直首)로 분류한다.

  원래는 개석이 없어 비신의 상부를 둥글게 처리한 것을 따로 갈()이라 하기도 하

, 이수가 없는 것도 비라 하여 구별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수()란 이무기를 새긴 개석이다. 이무기는 용의 형상과 같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용은 뿔이 있는데 비하여 이무기는 뿔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 한대(漢代)에는 용과 이무기가 공용되었다가 당대에 이(: 이무기)로 통일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성이나 돌다리 또는 일반 건축물의 장식물에도 이수가 사용되었다. 비에 새겨진 우리나라 이수는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한 쌍의 이무기가 마주 대하는 중국 것과는 달리, 세 쌍이 서로 뒤엉킨 농주(弄珠)형태로 중하부에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난 규형(圭形) 또는 네모꼴의 전액주위에 빽빽하게 새겨졌다.

  이수가 변형되어 단순히 이수의 윤곽만을 나타내거나 꽃잎의 문양만을 새긴 것을

관석(冠石)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개석은 대개 개화(開花)의 형상을 취하여 그 꼭대

기에 화심형(花心形)의 꼭지를 두는 것이 보통으로 이것이 화관석(花冠石)이다.

또 이수나 화관석 외에 지붕모양의 옥개석을 가첨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하여 매우 단순한 것부터 정교한 것까지 있는데 조선시대에 주로 성행하

였다.

 

   

수형(귀접이)       월두형(둥근 개석)        화관형(고사리 개석) 가첨형(옥개석형)

 

  비신과 이수가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대석과 비신, 이수 등이 하나의 돌로 된 것을 통비(桶碑)라고 한다.
비의 형태를 나타내는 말로 규수방부(圭首方趺)와 이수귀부 라는 말이 있는데

규수방부는 비수(碑首)의 각이 지고 방형의 기석(基石)을 이룬 것으로 이수귀부의

비에 비하여 신분이 낮음을 나타낸 것이다.

   비수(碑首비신(碑身비좌(碑座)는 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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