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타암 석조아미타불입상
천성산 미타암 - 진즉부터 벼르고 별렀던 일을 오늘은 기어이 가보고 말리라.
너무도 변해버린 웅상읍에 가이 질리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부터 하고
산길로 접어드니 내 몸을 한껏 달궈 놓던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기가
어느 결에 시원한 바람을 맞아들이면서 기분은 유쾌, 상쾌다.
마을길이 끝날 즈음 산길이 막 시작되는 지점에서 네비를 보니
미타암 까지는 약 2km의 산길 오르막을 치고 올라가야 할 듯하다.
이 무더분 날 요만한 경차로 우둘두둘한 시멘트 오르막 산길을
2km나 치고 오른다는 것에 무리가 아닐까하다가 재구 짬을 낸 시간과
노력 정성이 아까워 당연히 물러서지 못함에 한 치의 아쉬움도
허락지 않음에 어련 다행이려니.
매일매일 쪄대는 한여름 폭염도 천성산 오르막을 오르기에는 지쳤나 싶게
시원스런 나무 그늘이 우둘두둘한 시멘트 오르막길을 온통 덮고 있어
아스팔트길 내내 켜둔 에어컨을 잠시 꺼두고 천성산 바깥바람을 맞아본다.
나무그늘이 길 위를 짙게 드리우고 싸한 바람이 얼굴을 휘감아 돌자
제법 시원한 감을 느끼기에도 충분하다.
그러나,
쬐끄만 경차는 이 오르막 시멘트길을 오르기에는 무척 버겁나 보다.
주위의 산만한 경치에도 불구하고 엔진 소리만 무겁게
가래 끓는 소리만 지치도록 뱉어낸다.
그래 쪼매 미안타
삼국유사 피은편 포천산 5비구 조에 ‘삽량주에서 동북쪽으로 20리쯤
떨어진 곳에 포천산포천산이 있고, 거기에는 완연하게 사람이 쪼아 만든 듯한
기이한 석굴이 있다.
여기에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비구 다섯 사람이 와서 살면서 아미타불을
부르고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을 기도한지 수십 년 만에 갑자기 성중성중이
서방극락으로부터 와서 그들을 맞이하여 갔다.
이에 다섯 비구는 제각기 연화대에 앉아 하늘을 날아가다가
통도사 문 밖에 이르러 머무르게 되었는데, 하늘의 음악이 간간이 들려왔다.
절의 중들이 나와서 보니, 다섯 비구는 무상고공의 이치를 설명하고
유해를 벗어버리고 큰 광명을 쏘면서 서쪽으로 가버렸다.
그들이 유해를 버리고 간 곳에다 절의 중이 정사를 짓고
이름을 ‘치루’라 하였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 답사의 길잡이 경남편
대략 기록에 나타나는 천성산 미타암에 관한 얘기이다.
앞과 옆쪽으로는 바람을 맞아 제법 시원하지만 그러나 어쩌랴
등짝과 방뎅이는 땀범벅이다- 이런 난감 시러울데가
대충 어디쯤에 차를 세우고 등짝의 땀도 식힐 겸 담배 한가치
물고 싶건만 그렇게 하기에는 미타암 가는 길이 내 설레임으로 인하여
그렇게 호락호락 허락치 않을 듯하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88암자 중에 하나인 천성산 미타암은
하늘 끝닿은 곳에서 사바세계를 내려다보며 못난 중생들의
고집멸도 번뇌를 씻어주는 아미타불이 석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경주 감산사 석불과 비슷한 형식의 아미타불입상의 석굴은 길이 30m,
높이 2~3m, 폭3~5m의 부정형으로 되어 있다.
자연동굴에 인공을 가한 것으로 추측되며,
석굴의 입구는 동쪽을 바라보고 뚫려져 있어,
아침 해가 떠오를 때면 아미타불은 밝은 햇살을 듬뿍 받게 되는데
이것이 경주 석굴암 본존불의 앉음새 경우와 비슷하다.
더 이상 차량이 갈 수 없는 곳에 희한하게도 주차장이 나타난다.
앞으로 가는 길은 제법 등산로가 갖추어진 길이지만
웬지 한참을 가야할 것 같은 분위기라 옆쪽 급경사 자드락길로
오르기로 마음을 굳히고 가려니 외벌 체인 레일이 보인다.
하기사 여기서도 700m 산길 오르막을 올라야 하니
사찰에서 필요한 물품 운반도 쉬운 일이 아니리라
딴에는 꾀를 부려 레일을 따라 가기로 작정을 하고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아무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오르막 길 아닌 길을 따라 가려니 되려 혼자서만 바쁘다.
이 구비만 돌면 나타나려나, 저기쯤에서는 보이겠지
허허나
숨이 턱에 까지 찬다. 가슴도 시리다.
까마득하게 높아만 보이는 산 중턱에서 그렇게 비바람을 피하며
중생들을 굽어다보며 있었던 세월이 물경 천년이 훨씬 더 지났는데.
천성상 미타암 석굴 속 아미타 부처님은 하마 여전하려나
아미타 부처님의 그윽하신 미소를 생각하며 안간힘을 실어 본다.
미타암은 경상남도 양산시 소주동 산 171번지 천성산 해발 812M 지점,
기암괴석 아래 위치한 사암으로, 화엄벌에서 설법하여 천인이 함께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산 이름도 천성산이라 한다.
그리고 새벽 차오르는 태양이 눈부신 곳에 위치한
기도 도량인 미타암 석굴법당의 아미타불 입상은
신라 문성왕 17년(846년)에 모셔졌는데,
그 배경은 문성왕의 왕비가 지병으로 고생하자
이곳에 부처님을 모시고 불공을 드리면 병이 나을 수 있다하여
경주 안강에서 화강암을 운반해서 조성하여 모셨다고 한다.
미타암은 신라 선덕왕 15년에 원효대사가 초건,
경명왕 4년 지공대사가 중건하고 고종25년 정진대사가 중수한 절이다.
그 후로도 고려 우왕 2년 서기 1376년 기종선사,
조선 선조 10년 서기 1577년 헌당선사,
1888년 정진선사, 1975년 성수선사,
그리고 현재의 대웅보전은 1998년 당시 주지 혜오 스님이
옛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은 법당이란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석굴법당, 삼성각, 감로당, 종각 등의 건물이 있고,
석굴법당에 모셔진 아미타불 입상은 보물 제998호로 지정 되어 있다.
특히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미타암의
석굴사원 안에 모셔져 있는 아미타불 입상은
머리에 있는 상투모양의 큼직한 욱계와 어깨까지 내려온 긴 귀,
풍만하면서도 우아한 인상,
왼손을 붙여 곧바로 내리고 오른손을 가슴에 댄 모습
그리고 둥근 어깨와 평판적인 가슴,
대좌 위에 곧바로 선 자세 등에서 경덕왕 719년에 만들어진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부드러운 주름을 형성하며 온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은 U자형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려 발목에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끝이 뾰족한 배 모양으로
안에 두 줄의 굵은 선으로 머리광배와 신체광배를 구분하였다.
그 사이에는 좌우대칭으로 꽃무늬를 배치하였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대좌는 얇게 파낸 눈모양의 안상이 새겨져 있는 사각형의 대석 위에
꽃무늬가 새겨진 이중의 연화좌를 올려놓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뛰어난 예술로 평가되고 있는 아미타불상은
석굴의 돌 재질과도 확연히 다른데다 색깔마저
흡사 방금 목욕을 마치신 듯 깨끗하여 희디희다.
미타암 아미타부처님을 뵙고 내려오는 길 또한 만만찮다.
그럭저럭 주차장에 닿아 부리나케 집에서 가져온
캔맥주 1개를 게눈 감추듯 들이키고 나니
내내 괴롭히던 갈증이 다소나마 해갈된다.
이 여름 폭염 속에 전국이 가뭄에 고통 받고 있듯
이 내 몸뚱아리는 목마른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주차장에서 서성거리며 땀을 식힌 후
양산 호계리마애불을 뵐 작정으로 다시금 차에 올랐다.
여기서 호계리마애불까지는 26km.
'그외지역 > 경상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사고 유적지의 유억남격암 (0) | 2012.11.06 |
---|---|
지붕 위의 보살- 북지장사 (0) | 2012.10.18 |
관음과 달마상 (0) | 2012.06.19 |
오천 정씨 묘역 하절과 시총 그리고 억수의 묘 (0) | 2012.01.30 |
광주이씨 시조묘와 연아총 (1) | 2012.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