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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학성지 최제우 교조 묘의 석상

참땅 2012. 5. 18. 11:38

경주 동학성지 최제우 교조 묘의 석상

 

 

최초의 근대적 인물기념상

경주 서북쪽 교외의 현곡면 가정리 야산에 위치한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의 무덤 앞

왼편에는 높이 185cm(기단포함)의 <최제우 석상>이 세워져 있다.

한국묘지 문화의 석인상(石人像) 전통을 따르는 실증적인 형태의 화강암 조각상으로,

이는 최초의 근대적 인물 기념상이다.

 

 

이 놀라운 근대적 석상의 존재를 내가 처음 알 것은 약 30년 전 인사동의

어느 고서점에서 1915년에 시천교본부가 간행한 [侍天敎祖遺蹟圖誌]를 입수하게

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그 책 속의 전통적인 목판화 삽도들과 설명문을 살펴보다가 최제우 석상의 존재를

발견했던 것이다. 당장 현장을 찾아가 현존 여부를 확인해보고 싶었으나 좀처럼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2000년 여름에야 비로소 현지 조사를 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나 이외의 어느 누구도 최제우 석상의 존재와 조각 형상의 근대적 성격에

주목하여 먼저 현지답사를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이상했다. 아마 지금까지도

그런 것 같다. 나 자신도 3년 전에 조사확인 한 그 석상에 관해 어디에도 글을

싣지 않은 채 지내왔다.

 

 

수십 년간 마음속에 담아왔던 최제우 석상의 현장답사와 세부 조사를 결국

내가 처음으로 하게 된 것도, 사실 나로서는 하나의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조사의 계기는 1997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간행한 [경주북부지역지표조사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의 ‘최제우 묘’항목에, “묘 상에 문인석(석상)이 서 있다”고

사진과 함께 적혀 있어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석상의 현존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글은 석상의 조형적 근대성에는 전혀 주목하지 않고 있었다.

 


 

그 석상의 근대적 요소는 최제우가 1860년 서교(西敎, 천주교)에 대항하려고 한

새로운 민족종교로서 경주에서 ‘동학’을 창도한 후 1875년에 스스로 고안하여 만들어

썼던 4면 3층 잎사귀 모양의 법관(法冠),

그리고 오른손에 쥔 단주왼손에 든 경전 등의 사실적인 조각 형태 등이다.

생전의 최제우 대신사의 실제 모습이 확연하게 재현돼 있는 것이다.

다만, 눈을 감은 근엄한 얼굴 모습은 동학 교조의 기념상으로서 최대의 신격화를

의인화 한 것이다.

 

 

이 석상이 세워진 것은 최제우 교조가 1864년에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경주에서

체포되어 대구장대에서 효수형으로 41세의 생애를 마감한 지 47년이 지난

1911년 5월의 일이었다. 그것을 추진한 것은 시천교였다.

시천교는 1906년 2월에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며 조직을 재정비할 때,

그간의 친일행위를 비판받아 출교당 했던 이용구가 따로 동학의 정통을 자처하며

만든 분파였다. 그러나 천도교보다도 오히려 재정이 더 확고했던 여건 하에서,

시천교는 1909년에 견지동에다 서양식 천주교 성당을 본뜬 붉은 벽돌 구조의

본부교당을 건립하고, 이어서 경주의 동학 발상지와 용담 등의 유적지도 사들여

성역화 하는 한편, 가정리 야산에 교조 최제우의 산소를 새로이 조성하면서 서울에서

특별히 제작한 교조의 사실적인 석상을 무덤 앞 중앙에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그 석상의 조각가가 누구였는지는 애석하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시천교 측의 실증적인 교조 석상 위촉을 사실적으로 잘 소화한 탁월한

역량의 조각가였음을 현존의 석상 자체가 입증해 주고 있다.

석상의 법의 앞으로 드리워진 널찍한 법대에 새겨져 있는 ‘시천교조제세주묘’라는

전서는 당시 서울의 서화 미술회 강습소 서법 선생이었던 강진희의 글씨임이

[시천교조유적도지]에 밝혀져 있다.

기차에 실려 경주의 묘소에 운반되어 간 석상은 이미 말한 대로 교조의 무덤 앞 중앙에

75년간 안전하게 세워져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현지 조사를 가기 몇 달 전에 2000년 3월에 천도교 측이

‘대신사 태묘 성역화 추진위원회’의 이름으로 새로이 ‘동학창도주수운최제우스승님

묘’라고 한글로 새긴 비석을 만들어 무덤 앞 오른편에 세우게 되면서

종래의 석상은 그 비석과 좌우로 조화를 이루도록 무덤 왼편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