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기타

경주 안강 용운사 위령비 해독

참땅 2012. 11. 13. 15:34

 

안강전투 참전 전사자 위령비

한자, 한글 혼용 이두 비문 해독

 

 

경북 경주시 안강의 용운사에는 근계리 입불상도 있지만

입불상 뒤편 야트막한 언덕에 이수가 이상야릇한 모양의 비가 한 기 있다.

비 머리에는 석재 철모형 이수를 올려놓았고,

그 철모에는 예사롭지 않은 태극기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더구나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4면 중 3면에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면은 정격한자체로 쓰여진 한문체이고,

측면은 거의 한글이며, 간혹 한자가 사용되어 있다.

한글 혼용 한자에 대해 표의식으로 보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비 제작 년도가 받침대 아래 새겨져 있는데,

단기 4283(1950) 음력 77(칠석날)에 안강전투에 희생된 위령비로

당시 전사자의 이름이 받침대에 쭉 새겨져 있다.

 

 

6·25 전쟁 중, 산신령(신라 경순왕과 마이태자 신)에 위탁 봉안 시킨 비이다.

근처 형산에 김부(경순왕)와 김충(경순왕 아들/마의태자라는 설)을 모신

성황사(현 왕룡사원)를 둘러보면 이미 안강과 형산·제산에는 고려 말부터

도교적 신앙이 일대에 펴져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으며

이 위령비도 그에 관련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정면 향 우측면 오른쪽 부터 왼편 세로로 새겨진 내용을 살펴보자

 

 

"나라임도잇世上의원함을면다핫서고

황천길노갓時代명세기인이대어

지조흔일다하나라는은재도리오

 

"나라 임(임금/경순왕)/이 세상의 원()함을 면()다하시고

황천길로 가시되()()(가시었는데) / 명색이(名色) 小人이 되어

(자기) 좋은 일 다하고() / 나라는 언제 도효()리오(좋으리요)“

                                                                  - (글돋선생 해석)

 

 

재미있는 점은 엄연히 한글로 표기해도 충분히 될 글자를

굳이 한자로 쓴 것에 의문이 가는데,

오직 한자를 표음문자, 즉 음을 차용한 점이다.

특히 時代, 를 사용한 것은 한자의 은유적인 표의문자를

숨겨놓은 교묘한 용자법이다. 즉 의도적인 용자법이란 것이다.

 

그 비밀을 풀이해 보자.

한자만 모아보면

 

世上時代小人固孝 이다.

 

글을 쓴 이는 이 정격한문을 이두 형식으로 은유적으로 다시 강조하고 있었다.

 

"세상사는 동안은 소인들은 오직 굳세게 효도를 하라는 뜻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란 뜻이다.

너무 슬퍼하지 말고 좋은 일 했다는 비문의 숭고한 뜻이 내제되어있었다.

 

 

비석 정면에 새겨 놓은 한문을 통해 봉안된 신의 정체를 알 수 있다.

김부(신라경순왕)와 마의태자가 안강과 형산·제산

전설 속 신이 되어 전해진 도교적 신앙처란 비석의 내용이 담겨있다.

 

大地峰日月煌諸國共同固麻衣太子根

嘉善大夫龍金海敬順大王傳死救碑石 

 

 

大地峰日月煌諸國共同固마의태자(뿌리)

嘉善大夫龍金海敬順大王傳해지고 있는 (죽은자)(구원하는)碑石

 

 

 

大地峰日月이란 조선태조가 왕권 상징으로 왕좌 뒤편에 그리게 한

"日月五峰圖"와 같은 의미로 천지봉우리와 일월(태양과 달)황제국의

왕권을 상징하는 제국(신라국)을 말하고 있다.

마의태자 뿌리인 용이 되어 형산과 제산의 신이 된

경순대왕에게 영혼을 봉안하는 위령비이다

 

 

마의태자는 경순왕과 첫째 왕후 소원황후 사이의 장남으로 탄생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갔고, 차남 김굉은 불법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해인사 아래 애장왕 때 지은 법수사에

김굉에 대한 자료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마의태자를 찾아 금강산으로 갔었다는 일화가 구전되고 있다.

 

 

좌측 비에 새겨진 내용을 살펴보자

 

"이준니강리뿐내강리준니人生仁뿐내"

 

요즈음 글로 해석하니

 

이 줄으니 강물이 붇네(넘치네)

강물이 줄으니 인생이는 붇네(길어진다)“ - (글돋선생 해독)

 

 

여기서 강물은 큰 시련(전쟁)을 말한다.

강물이 줄으니(전쟁이 끝나니), 인간 생명이 길어진다는 뜻이다.

생명을 앗아가는 전쟁이 발발하니(강물이 불으니) 뭇 생명들이 시들고,

전쟁이 끝나니 개인들의 인생이 길어진다.

 

1950년 안강전투를 살펴보자.

19506.25일 파죽지세로 밀려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을 길이 없이

남한 군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낙동강전선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서 낙동강은

피아군들의 붉은 피로 물들인다.

엄밀히 말하면 기계 안강전투는 195089일부터 922일까지

기계와 안강, 포항과 경주 북부일원에서 국군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북한군의 치열한 전투였다.

마침내 포항 입구 형산강 양 강둑을 경계로

지금의 양동마을 쪽 산에는 인민군대가 집결하고

반대편엔 국군과 부산에서 실려 온 학도병들이

대치하면서 싸웠다.

이 전선이 무너지면 경주와 부산은 함락하고 마는

절대절명의 긴박한 전투였다.

매일 아침 국군 쪽에선 학도병 트럭들이 학생들을 풀어놓고 가지만

저녁 무렵에는 형산강엔 학도병과 인민군의 시체만 쌓이고(로 표현)

형산강은 피로 강물 물들이고 불어나고 있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진 안강전투였다.

형산강 아래 '딱실못'엔 시체와 붉은 피가 넘쳤다고 한다.

여기서 ()이란 전사자의 시체를 표현하였다.

 

''이란 음을 ''로 음차 하였다.

또한 () "이는()"을 음차 하였다.

이 또한 의도적인 한자 차음이다.

 

한자만 모아보자.

生物 物 人 生仁

생물, 물건(),사람() 어질게 살아야한다(生人) 는 상징적 게시문이 아닐까.

단기4283(1950)음력77崔圭鎭이란 사람이 발문하였다.

 

 

김부와 김충은 형산 정상부 형산 성황사에 신으로 돌아왔다.

제산과 형산에 얽힌 전설 속에 경순왕과 아들 김충의 역할이 들어있다.

이들이 200여 년 전에 이 곳 형산 정상부에 목신으로 나타났다.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1491 의 형산의 정상부에 법당이 들어섰다.

현판에는 '왕장군 용왕전'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걸려있고

주로 무속인들의 출입이 잦은 곳이다.

사찰 명칭도 왕룡사가 아니고 '왕룡사원'이다.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고 송도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서거하자 신라 유민들은 그를 추모하여 북형산성터에

형산 성황사(城隍祀)라는 사당을 건립하고 두 분을 모셨다.

원래는 유덕을 추모하는 사당으로 춘추향제를 올려 넋을 위로하였다.

고려 말부터 기복 신앙처로 전락하였다.

바로 아래 마을 '국당'이란 명칭도 '굿당'이라는 말이 와전되었고

무속인들이 많은 마을이 되었다. 본래 사당은 토막식 건물로

조선 말엽까지 있었으나 조선말 어지러운 상황을 틈타

연일의 어느 문중에서 이 사당을 철거하고 분묘을 설치하자

성터 밑에 위치한 왕룡사에서 경내로 옮겨 지금까지 모셔오고 있다.

 

왕룡사원의 왕장군 용왕전에 있는 목조 문무인상은 약 200년 전에

회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동쪽에 문인상, 서쪽에 무인상이 서 있다.

둘 다 오른 손은 옷 속에 감추고 왼손만 밖으로 드러나게 조각이

되어 있으며 얼굴이 목상 길이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신장은 매우 짧다.

오른쪽에 있는 문인상은 왼손으로 턱수염을 잡고 큰 관모를 쓰고 있으며,

푸른 옷에 얼굴은 살색으로 칠해졌다.

무인상은 투구를 쓰고 왼손에 무엇을 받쳐 든 것 같은 형태이며

역시 푸른 옷에 얼굴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문인상은 경순왕 김부대왕, 무인상은 태자 김충이라고 하고

또는 마의태자로 보는 이도 있다

 

                                                (위 글은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에서 발췌하여 정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