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의 마애불을 선별하여 소개 합니다.
1. 삼릉계 제2사지 마애관음보살입상
삼릉계 머리 없는 여래상에서 산등성이를 쳐다보면 뾰족한 기둥 바위들이 높고 낮게
솟아 있는데 그 중 한 바위에 미소를 머금고 하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관음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다. 살결이 풍만한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었고 오른손은 설법인을 표시하여
가슴에 들고 왼손은 가슴에 드리운 채 검지와 중지로 정병을 들고 있다.
머리에 쓴 보관에는 아미타 화불을 배치하여 관음보살임을 나타내었는데 목걸이와
팔찌 등 여러 장신구들로 화려하게 몸을 꾸몄다. 군의를 동여맨 끈은 배 앞에서 나비
날개처럼 매듭을 짓고 그 자락이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발가락 끝에 까지 피가 도는
듯 섬세하게 표현된 이 불상은 따스한 촉감을 일으키는 복련 위에 서 계신다.
보살상의 높이는 1.54미터이고 양 팔굽 너비가 0.45미터로 우리나라 소년 소녀들의
키에 해당되는데 이 불상 뒤에는 기름한 바위가 비스듬히 높게 솟아 있어 하늘과의
연결을 암시하고 있다.
이 불상은 약간 남으로 치우친 서향으로 서 있다. 태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사라지려 할 때 노을이 관음보살의 얼굴에 비추니 보살의 얼굴은 화기에 찬다.
붉은 해가 서방정토로 돌아갈 때 하늘도 산도 냇물도 온 누리가 금빛으로 바뀌는
찬란한 순간 본 고향의 아미타여래를 향해 밝은 웃음을 보내는 이 보살의 모습에는
누리의 환희가 차고 넘는다.
이렇게 대자연의 광선을 이용하여 말로써도 그림으로써도 표현할 수 없 극락세계를
신라인들은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불상의 표정은 아래에서 바라 볼 때 더욱 밝다.
얼굴에 웃음을 듬뿍 머금고 손에는 정병을 들고 금방이라도 내려 올 것만 같은 정감을
느끼게 된다.
관음보살은 아미타여래의 사랑을 받들어 세상을 제도하시는 부처님이시다.
정성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을 청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거나 그 소리를 들으면
곧 구원의 손길을 뻗쳐 주신다고 한다. 관음보살의 위력은 크다.
관음보살을 믿는 사람은 불 속에 들어가더라도 그를 태우지 못하고 깊은 물에 빠졌다
하더라도 그 이름을 부르면 얕은 곳이 찾아 진다고 한다.
만약 수많은 중생들이 보배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들어갔다가 태풍이 불어서
나찰 귀신의 나라에 떨어지게 되었을 지라도 그 중의 한사람이 관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모든 사람이 구제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관음보상상이 서 있는 자리에는 집을 지을만한 공간도 없고 기와조각도
발견 되지 않아 처음부터 노천불 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산벼랑에 불상을 새기고
산기슭에서 올려다보며 예배함으로써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소리를 듣고 하강하여
주시는 그 감격을 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이불상의 진정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순간은 단풍이 드는 가을철 석양
즉 해질 무렵이다.
신체는 긴장감이 사라져 부드럽고, 얼굴은 엄격함을 지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어
8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입술에 남아 있는 붉은 채색 흔적은 부드러운
미소에 한층 생기를 더하고 있다.
이 불상을 위한 절터는 이 계곡 아래에 있었다고 생각되어 지는데 자세한 것은 발굴
조사를 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코가 온전한 이유는 근세에 성형을 하였단다.
2. 삼릉계 제3사지 선각삼존불입상. 선각삼존불좌상
마애관음상에서 100미터 더 들어가면 동북쪽에서 흘러드는 한 지류가 있다.
그 지류가 본류에 합치는 동쪽 언덕 위에 병풍을 둘러놓은 듯한 절벽 바위가 동서로
두 곳에 있다. 이곳이 이승과 저승의 교차점인 냉골 제2절터이다. 서쪽 바위는 높이가
약 4m이고 너비는 약 3.58m이며 동쪽 바위는 서쪽 바위 면에서 약 3m 뒤에서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높이는 역시 4m 정도이고 너비는7.27m이며 동서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다. 다듬지 않은 자연 암반 위에 자유로운 필치로 그린 그림을 선각으로 새겼으니
조각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림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구김살 없는 필치는 능숙
한 필력을 보여주고 있다. 동쪽 암면에 새겨진 본존 석가여래는 넓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문수, 보현 두 보살은 본존의 양 옆에 서있다. 여래상은 편단우견으로 가사를
입고 오른손은 설법인으로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선정인으로 놓여 있다.
둥근 원으로 신광과 두광을 나타냈는데 단숨에 그어진 유창한 곡선은 한없이 시원스럽다. 왼쪽의 문수보살은 마멸이 심하여 모습을 잘 알 수 없으나 연꽃 위에 서서 오른손은 설법인으로 가슴에 들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운 채 천의 자락을 잡고 있는 듯하며
얼굴은 여래쪽으로 돌리고 있다.
오른쪽 보현보살은 손 등을 밖으로 하여 손가락 끝을 아래로 드리우고 연꽃 위에 서
있다. 두 보살은 모두 세 개의 구슬을 꿴 목걸이를 걸고 팔과 손목에 팔찌를 끼었을 뿐
상의는 입지 않았다. 두 보살이 여래 쪽으로 비스듬히 향하고 서 있으므로 바위 분위기
는 아늑하게 통일되어 있다. 서쪽 암면의 아미타삼존은 석가삼존과 반대로 여래가
연꽃위에서 계시고 양쪽 협시보살은 연꽃 위에 앉아 계시다.
여래는 오른손 바닥을 아래로 하여 가슴에 들고 왼손 바닥은 위로 하여 배 앞에 들고
있다. 가사는 편단우견으로 몸에 걸쳤는데 신광은 없고 두광만 원으로 나타나 있다.
왼쪽의 관세음보살은 여래쪽을 향해 윤왕좌(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는 법)로 앉아
꽃 쟁반을 들었고 오른쪽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반대의 모습으로 앉아
역시 꽃 쟁반을 들고 있다.
두 보살은 모두 둥근 구슬 목걸이를 걸었고 팔과 손목에는 팔찌를 끼었다.
어깨에는 얇은 천의를 걸쳐 천의자락에 나부낀다. 여래가 앉아 계시고 협시보살들이 서는 예는 보통 있지만 여래께서 서 계시고 보살들이 앉아 있는 예는 극히 드물다.
살아서 아미타불을 많이 부르고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죽으면 아미타여래가 보살들을
데리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맞으러 지상으로 하강하신다.
그때 여래는 서고 보살들은 앉는데 이러한 모습을 내영아미타상이라고 부르니
서쪽 암면 삼존상은 아미타내영상인 것이다.
석가여래는 살아 있는 생명을 다스리는 부처이고 아미타여래는 극락의 부처이다.
아미타여래는 지상에 하강하여 석가여래로부터 생명을 인계 받는다.
이곳에 석가 삼존과 내영아미타 삼존이 새겨져 있는 것은 이승에서 저 세상인
극락세계로 생명이 인계되는 중요한 장소라는 뜻이다.
옛날 신라 때에는 얼마나 많은 효자 효녀들이 이곳에서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극락에
모시기 위하여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눈물을 뿌렸을까?
이 조각들은 바위 면을 다듬지 않고 선각으로 나타내었기 때문에 한층 더 구수하고
신령스러운 느낌을 풍기게 한다.
바위 위에는 홈을 파서 빗물이 바위 면을 적시지 않게 물길을 돌려놓았다.
또 기둥을 세웠던 흔적도 있고 많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으니 바위 위에 간단한
빗물을 가리는 시설이 있었던 모양이다.
신라시대 조각품은 많이 볼 수 있으나 그림은 별로 볼 수 없는데,
이곳에서 신라의 그림을 엿볼 수 있으니 귀한 유적이 아닐 수 없다.
건장한 체구에서 느껴지는 안정감 있는 신체표현과 굴곡이 드러난 유연한 몸매 등은
8세기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중앙계주, 두 줄로 표현된 삼도, 간략화 된 옷주름, 세부표현의 형식화와
선각 표현 등에서 9세기에 제작된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바위 상면에는 물길을 돌리는 홈과 기둥자리가 있고, 주위에 기와편이 흩어져
있어 마애불 위를 덮었던 목조 건축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가삼존불이 새겨진 동편 바위 앞에는 파손된 옥개석도 있다.
현재 크기는 65cm*65cm이며 낙수면이 모두 결실되었다.
옥개받침은 2단만 남아있으며, 전체높이는 22cm이다.
주변에 다른 탑부재가 없어 상류에서 흘러내려 온 것으로 추정되며,
파손이 심해 제작시기를 알 수 없다.
3. 삼릉계 제6사지 선각여래불
석조 아미타 여래좌상의 동쪽 등성이는 여려 개의 바위 무리들이 있는데 이 바위들
남면에서 보면 두개의 절벽 바위가 십여 미터 높이로 솟아 있는데 그 밑으로 여울물이
하얗게 부서지며 흘러내린다.
서쪽 것은 허리에서 단을 이루어 다시 둥글둥글 솟아올랐으므로 그 모양이 기괴하다.
서족 절벽 바위 높은 면에 선각여래상을 새겼고 동쪽 절벽 허리에는 입체로 조각된
석조약사여래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각 여래상 밑에는 발붙일 곳이 없으니 예배할 자리가 없다.
개울 건너 산언덕 위에 서야 보이는데 그래도 그 모습은 좀 체로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머리와 어깨 부분은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 있으나 그 이하는 희미하다.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솟아 있고, 둥근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짧은 목에는 삼도가 분명하고, 넓고 각이진 어깨는 당당한 체구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좁은 이마와 백호, 그리고 두 눈썹과 눈 사이를 매우 좁게 표현한 점
등은 제5사지 마애여래좌상의 세부표현과 유사하다. 이러한 세부표현으로 보아 통일
신라 말~고려 초인 10 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불상의 현재 높이는 약 80cm, 어깨 너비는 약 130cm이다.
허리부터 아래는 마멸로 인해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좌상인지 입상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입체로 된 두 불상 사이에 하늘 높이 선각으로 새겨져서
한 순간만 모습을 나타내는 그 신비로움은 무슨 말로 형용 할 수 있을까?
동편 절벽 좁은 평지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서향으로 앉아 있었는데
1915년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불신, 광배, 대좌가 모두 완전한 상태인데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이다.
현재 그 자리에는 대좌를 받치던 돌들이 남아있어 원래 불상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 남쪽과 북쪽의 바위에는 지름 30cm 내외의 반원형 기둥자리가 남아있고,
주위에 기와편이 흩어져 있어 불산 조성 당시 전각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4. 냉골암봉 선각여래상
삼릉계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위쪽에 또 하나의 선각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마애여래좌상 쪽에서는 보이지 않고 정상부에서 선방곡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바라보면 오후가 되어서야 어느 정도 희미한 윤곽을 볼 수 잇다.
암면 전체에 균열, 마모가 심해 세부 표현은 자세하지 않지만 통견의 법의로
감싼 체구는 건장한 편이며 둥근 얼굴에 눈은 가늘고 길게 표현 하였다.
오른손은 올려 설법인을 취하고 있으며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있다.
조성 시기는 대체로 통일신라 말~ 고려초기인 10C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5. 용장계 탑상곡 제1사지 용장사터 마애여래좌상
지상에서 높지 않은 바위 면에 새겼으며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불상의 머리는 나발이나 육계의 표시가 불분명 하다.
보물 제913호(1987.3.9 지정)로 내남면 용장리 산 1-1번지에 위치한다.
얼굴은 비만형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볼을 두껍게 하고 턱에 군살을 묘사하는 등
비교적 풍만한 편이다. 입을 꽉 다물어 생긴 보조개와 같은 묘사, 볼록한 볼과 둥근
눈 등으로 인해 얼굴 전체가 미소 짓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어 손끝을 아래로 내렸으며,
왼손은 다리 위에 올린 항마촉지인으로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앉은 자세는 결가부좌로 오른쪽 발만 보이는 길상좌의 자세이다.
불의는 통견으로서 매우 얕게 빚은 듯 한 의습으로 마치 인도불상을 연상시킬 정도로
가는 평행선으로 음각되어 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각각 두 줄의 음각선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외광은 보이지 않는다.
대좌에는 무릎 밑에다 위로 향한 연화문이 길게 새겨져 있어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대좌의 연꽃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하늘에 떠 있는 꽃인 듯한 환상적
인 느낌을 준다. 그것은 정변에 있는 꽃잎은 크게 나타내고 양 옆으로 자면서 차츰차츰
작게 하여 끝에 가서는 구름같이 흐려져 사라실주의 불상을 잘 보여 주고 있는 대표작
이라 할 수 있다.
이 불상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잘게 주름잡은 가는 옷주름이라 하겠다.
무늬 없는 두 겹의 원으로 그려져 있는 두광과 신광이 소박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잘다랗게 주름잡아 몸체를 감싸 흐르는 옷주름은 유난히도 잔잔하게 물결쳐와 가슴에
닿는다.
특히, 얼굴이나 체구, 의문 등에서 굽타 시대의 마투라 불상과 친연성이 강한 독특한
불상이어서, 굽타시대 불교의 수용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1984년 황수영 박사팀에 의해 두광 우측
명문 [大平 二年八月 00 阿(尉)0 佛成奉爲時...]을 해독하여 대평 2년인 고려 현종 13
년, 곧 1022년 8월에 부처를 만들어 모셨다는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암면의 마모가 심해 현재로서는 명문 중 간지 이하부분의 정확한 판독이
어렵고 또 조각양식상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겨레의 땅, 부처님의 나라), (경주남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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