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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과 조일전쟁

참땅 2010. 4. 14. 10:42

울산왜성과 조일전쟁

 

 

태화사지 부도: 울산 중구 학성동 100

부도는 옛 태화사 터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십이지상(十二支像)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태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하는 절이다.

이 부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 종 모양(石鐘形) 부도일 뿐만 아니라,

표면에 십이지상을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십이지상은 능묘나 석탑에는 보이나 부도에 새겨진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다.

직사각형 모양의 대석 위에 돌 종 모양의 탑신을 올려놓은 형태인데,

몸체 앞면에 감실을 설치하고, 그 아래쪽에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십이지상을 돋을새김 했다.

남쪽에 새겨진 것은 오상(午像: 말)이고, 북쪽에 새겨진 것은 자상(子像: 쥐)이다.

이 부도는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1962년 태화동 ‘반탕골’

산비탈에서 발굴된 것을 이곳에 옮겨 세운 것이다

 

 

제2차 조일전쟁 즉, 정유재란의 마지막 육전을 장식한 전투가 바로 울산성 전투이

다. 이 울산성전투를 증거하는 그림이 일본 나고야성의 전쟁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여섯 폭 병풍화인 <울산성전투도>다. 이 전투도에는 1597년 12월 23일부터

 다음 해 1월 4일까지 13일간 벌어졌던 울산성전투를 그리고 있는데, 이 전투는 양

측에서 전사자가 12,000명이 넘는 대혈전이었다. 이 울산성전투에서 죽다 살아난

가또 기요마사와 이를 구원하러 왔던 일군장수들은 이후 더 싸울 의욕을 잃고 남해

의 왜성에 틀어박혀 소극적으로 방어전만 펼치다 히데요시가 죽자 잽싸게 철군하고

말았다.

재차 침공해온 일 육군이 충청도 직산에서 깨진 다음 남으로 퇴각하고, 일 수군은

명량에서 박살나서 제해권을 잃어 일군의 사기가 바닥을 칠 때인 1597년 막바지에

조선조정과 명군은 가또 기요마사가 주둔하고 있는 울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울산성은 축성의 대가인 가또가 직접 설계하고 축성한 성으로, 높이는 4~15m인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조명연합군은 울산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외부에서 오는 구원군을 막을 방책을 세운

다음 공격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공방전이 며칠째 계속되면서 성안의 식량과 물이

떨어지자 살아남을 희망을 잃은 가또가 다른 성의 장수에게 보낸 서신이 남아

있다. “나는 여기서 할복할 것이니 당신은 그 성에서 할복하시오”(<울산농성각서>)

종군 승 케이넨의 종군기인 (조선일일기)에도 “드디어 아군은 물도 식량도 떨어졌

다. 성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 내일은 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밤새

부처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 그 마음을 읊는다”라고 기록되었으니, 당시 아무도

살아날 희망이 없을 정도로 가또는 막판까지 몰렸었다.

일군은 식량과 물이 떨어지자 전마를 잡아먹기 시작했고, 쌀은 조총수에게만 하루

한 홉씩 배급했다. 울산성은 견고한 대성이었으나, 우물이 없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

이었다. 일군은 물을 얻으려면 죽음을 무릅쓰고 밤에 몰래 성을 빠져나가 성 밖

태화강까지 가야했다. 이들은 태화강을 경비하던 조선군에게 맞아죽고 혹한에 얼어

죽어가면서, 극심한 식량난과 급수난 그리고 추위와 싸워야 했다.

일군이 결사적으로 울산성을 방어하는 동안 드디어 사방에서 구원군이 도착하기

시작하여 일군 구원군 총병력은 거의 6만에 육박하게 되었다. 1598년 1월 4일

일군을 전멸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조명연합군은 일군의 대규모 구원병이 배후에

집결하는 것을 보고 성의 포위망을 풀고 퇴각한다. 13일 간의 울산성 전투로 조명

연합군 약 6천명, 일군도 마찬가지로 6천여 명이 전사하여 총 12,000명 정도가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 울산성전투에 항왜인들이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항왜인 중 사야가는 가또의

제 일대를 전멸시켰고, 오카모도 에치고노카미는 약 8천명이나 되는 대규모 군대

를 지휘하여 일군과 싸웠다. 항왜인 중 연대장, 사단장급의 장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공을 세운 항왜인들은 조정으로부터 벼슬과 이름을 받아 조선인으로 살았

다. 그들 또한 일인인 것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아 <모화당집>을 남긴 사야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리 없이 조선인으로 동화되었다.     

구원군 도착으로 아사 직전의 포위에서 풀려난 일군이 “성주님이 나에게 배를 타라

고 하신다. 너무 기쁘고 도대체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성을 내려올 때

는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고 마치 공중에 떠있는 것 같았다”라고 기록을 남겼는

데, 사람이 목숨에 대한 애착은 사무라이 빼고, 조선군이나 일군이나 별 차이가

없다 하겠다. 결구 울산성전투 이후 전투 의욕을 잃은 가또는 울산성을 포기하고

남하하여 서생포에 주둔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으며, 수성전으로 일관하다 히데요

시가 죽자 바로 본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백지원의 '조일전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