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에 얽힌 일본의 전설
국화는 일본 전역 어디에서고 자란다.
그러나 히메지에는 국화를 불길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옛날 일본의 어느 지방(히메지)에 마음씨 고약하고 의심 많은 히메지 성의
영주가 있었는데, 그는 ‘국화꽃’(오-키쿠)이란 이름을 지닌 사람을 고용해
온갖 보삭이며 예술품 등 보물을 관리하게 했다.
그중에는 황금접시 10개도 있었다.
어느 날, 보물을 확인하던 오키쿠는 주인이 소중히 여기는 10개의 접시 중
하나가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키쿠는 결백 했지만 도둑 누명을 쓰고 영주의 분노를 살까 두려워
스스로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야 만다.
‘국화꽃’이란 이름의 오키쿠는 밤마다 유령이 되어 보물창고로 돌아와
접시 수를 세어 보고는 10개에서 하나가 없어져 9개 밖에 없다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크게 소리를 지르며 흐느껴 울어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유령의 울음소리에 지친 히메지성 영주는 성을 떠나버리고
겁에 질린 사람들은 오키쿠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키쿠‘심는 일조차 꺼려한단다.
청송사터 승탑
청송사삼층석탑에서 부도군으로 가는 길 즉 청송사터 석축에
면목없게시리 깨어진 채로 억지로 끼어있는 석재
- 흡사 보상화마냥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청송사 부도전 부도는 이곳이 원래 자리는 아니며 과거 마을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청송사지 관련 부도 및 각종 석물들을 당시 인근 문수초등학교교장이
이곳으로 모아 옮겼다고 한다.
현재 복원되지 못한 1기를 포함 3기의 부도와
절터에서 사용되었던 몇몇 석물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
가장 규모가 큰 무명부도는 지대석을 4매로 감입식으로 결구하였는데
전후에 신장상을 좌우에 화문을 조식해 놓았다.
화문은 좌우에 만개한 연꽃을 표현해 놓았으며,
신장상은 2구를 표현 해 놓아 인왕상일 가능성이 많으며
큰 눈이 위로 치켜 올라간 모습이나 뭉툭한 코의 모습은
조선후기 석장승을 많이 닮아 있다.
특히 탑신 하대에 범자가 새겨져 있는 범자형부도이며
탑신 상부에는 복련이 조식되어 있는데 복련의 길이가 너무 길어서
복사문일 가능성도 있다.
상륜부는 상륜괴임 위에 연봉형 보주가 표현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 부도의 지대석 가장자리에 우주가 표현되어 있고
면석에 신장상이 조식되어 있어 석탑의 면석으로 보는 의견도 있는데
부도 기단부 흐름을 인지한다면 충분히 부도의 지대석으로
동감할 것이라 생각된다.
지대석 화문의 표현이나 탑신부 하대에 범자의 표현,
탑신부 상부의 장식으로 보아 원원사지 서부도 보다 후행의 모습으로 보인다.
탑신의 밑 부분에 범어(梵語) 여섯 글자가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경주 원원사지의 서부도 대석에서도 이와 같이 범어가 새겨져 있는데
부도에 범어가 나타나는 경우는 흔치 않아 부도의 연구도 도움이 된다.
사찰 장엄의 여러 문양들 사이에 범어가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범자(梵字) 장엄’이라고 한다.
고대 인도문자인 범어(산스크리스 문자)는 문자 자체가 미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 장식효과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범자 장엄의 근본 목적은
단순히 어떤 대상을 미화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배우고자 하는 신앙심의 표현에 있다고 한다.
지대석 위에 기단부를 올리고, 그 위에 석종형 탑신을 올린 석종형 부도이다.
지대석은 4매의 판석으로 결구하였고, 전후면에 벽판석을 세우고,
좌우에 판석을 삽입한 감입식으로 결구하였다.
전후면의 벽판석에는 4개의 방형 구획을 마련하고,
구획의 내부에는 각기 모양이 조금씩 다른 화문을,
좌우 판석에는 신장상 1구씩을 양각하였다.
지대석 상면 중앙에는 중대석이 없이 별석의 상대석과 하대석을 올렸다.
하대석과 상대석은 거의 같은 크기이나, 하대석이 약간 더 큰 규모로
하대석은 평면원형의 복련석이며 복련은 단판팔엽이다.
복련의 연판 중앙의 화육에는 좌우 대칭적인 안쪽으로 구부러지는
고사리문형의 수술을 조식하였고 수술의 중앙에는 원형의 장식을 하였다.
연판 사이에는 넓은 간엽이 조출되었다.
별석의 상대석은 평면원형의 앙련이며 연판은 단판팔엽 3중으로 표현되었다.
탑신석은 운두가 높은 석종형으로 탑신석의 하대에는 원권대를 구획하여
원권대 내부에는 특이하게 범자문을 새겨 넣었다.
탑신석의 견부에는 단판팔엽의 복련을 조식하였는데
복련의 연판이 너무 길고 넓어 마치 복사문과 같은 모습이다.
탑신석에는 명문이 없어 부도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탑신석과 일석으로 치석된 상륜은 각형 1단의 높직한 괴임을 마련하고
그 위에 넓고 높은 구형에 가까운 반구형의 보주를 올렸다.
조성시기는 17세기 후반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도전 중앙에 있는 瑞應堂愼洽大師(서응당신흡대사) 명문이 있는 부도이다.
먼저 기단부를 살펴보자.
지대석은 일석(한 돌)으로 치석한 4매의 면석을 감입식으로 결구하였으며
면석의 한 면은 모두 4개의 방형으로 구획하고 구획 안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보상화문을 표현 해 놓았다. 이러한 화문은 연잎의 모습, 활짝 핀 연꽃,
막 지려는 흐트러진 연꽃 모습을 형상화한 모습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모습은 운흥사지 서부도 지대석에서 면석이 한 면에 3매로
결구되어 있는 모습이 1매로 간략화가 진행된 모습이며
한결 규모가 작아진 모습이어서 후행 양식으로 보여 진다.
4매석으로 결구된 지대석 전후면에 벽판석을 세우고,
좌우에 판석을 삽입한 감입식 결구이다.
전후면에는 신장상이 1구씩, 좌우면에는 화문이 1개씩 배치되어 있다.
지대석 상면 중앙에는 중대석이 없이 별석의 상대석과 하대석이
연접한 기단부를 올렸고, 하대석은 상대석보다 규모가 더 크다.
하대석은 평면원형의 복련석으로, 복련은 단판 24엽이 중판구성이며
복련의 연판은 판단이 뾰족하여 마치 나뭇잎과 같은 특이한 모습이다.
별석의 상대석은 평면원형 앙련이며, 단판팔엽 3중 연판으로 표현되었다.
탑신석 전면 중앙에는 종서로 瑞應堂愼洽大師라고 음각한 명문이 있어,
명문을 통하여 부도의 주인이 확인되지만 신흡대사에 관하여 알려진 바가 없다.
탑신석과 일석으로 치석된 상륜은 각형 1단의 높직한 괴임을 마련하고
그 위에 넓고 높은 연봉형 보주를 올렸다.
瑞應堂愼洽大師浮屠 부도는 17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도전 제일 작은 부도 또한 현재 널부러져 있었던 지대석의 부재로 보아
서응당부도와 같은 화문이 새겨져 있고 규모가 작아
후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명부도는 주위로 하대석과 상대석이 놓여 있고
가장 규모가 큰 무명부도 옆에 지대석 일부 석재가 남아 있다.
지대석은 瑞應愼洽大師浮屠浮屠의 지대석과 동일한 모습이다.
그런데 좌우 측면은 신장상 대신에 화문을 1개씩 배치하였다.
지대석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면 이 부도는 瑞應愼洽大師浮屠와
제일 규모가 큰 부도의 중간적인 양식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대석 상면 중앙에는 중대석이 없이 별석의 상대석과 하대석이 연접한
기단부를 올렸고 하대석과 상대석은 비슷한 크기이나, 하대석이 약간 더 크다.
하대석은 평면원형의 복련석이며 복련은 단판팔엽이다.
복련의 연판 중앙의 화육에는 좌우 대칭적인 안쪽으로 구부러지는
고사리문형의 수술을 조식하였으며 수술의 중앙에는 원형의 장식을 하였다.
연판 사이에는 넓은 간엽이 조출되었고 상대석은 평면원형입니다.
상대석 하면 중앙에는 호형 1단의 받침을 조출하였고
받침의 안쪽에는 원형의 구멍을 파 놓아 사리공으로 추정된다.
운두가 낮은 석종형 탑신석에는 명문이 없어 부도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없다.
상륜부는 탑신석과 일석으로 치석되었고 매우 큰 구형의 보주를 올렸다.
가운데 서응당부도의 영향을 받아 18세기초반에 조성된 부도로 추정된다.
(참고 자료: 달넘새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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