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외지역/경상도

을미년 가을에 떠난 울산 답사 -2

참땅 2015. 9. 8. 09:17

 

예수와 무화과나무

예수의 저주를 받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예수가 베다니에서 나와 예루살렘 성으로 가는 길에 마침 길가에

무화과나무를 발견하고 열매를 따먹으려고 갔지만 기대했던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몹시 화가 난 예수는 무화과나무가 앞으로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지나가다 보니 저주했던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 있었다.

깜짝 놀란 베드로는 예수에게 묻지만 예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면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2324)

 

왜? 죄없는 무화과나무를 죽이고 저 말을 했을까... 

 

무화과나무는 불에 던져 봤자 그을리기만 할 뿐

타지 않아서 땔감으로조차 쓸모가 없다.

몇몇 신학자들은 아담과 이브가 따먹은 선악과가

사실 사과가 아니라 무화과나무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허탈한 아이러니를 또 발견하고야 말았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헤롯왕의 군대로부터 도망칠 때

갈라진 몸통 속에 모자母子를 숨겨 준 것도 무화과나무인 것이다.

 

망해사望海寺 승탑

 

 

헌강왕이 현재의 남구 황성동 세죽으로 나들이를 나왔다가

낮에 물가에서 쉬는데 문득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동해 용왕의 소행이라 하는 일관의 조언에 따라,

왕은 그의 측근들에게 명령하여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게 했다.

신기하게도 그 명령과 함께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그래서 이 땅의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왕은 서울에 돌아오자 이 영축산을 경승지를 선정하여 용을 위해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망해사라고 정했다.

 

 

절을 세우라는 왕명이 있자 이를 기뻐한 동해 용왕은 그의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왕의 성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했다.

그리고 용왕의 아들 중 한명은 왕을 따라 서울에 들어와서 정사를 도왔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다.

처용에게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그녀를 흠모한 역신(疫神)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밤에

그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갔다. 바로 처용가처용무.

그의 관용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아들였다고 한다.

 

절을 세우고 망해사라하였다.

 

스님의 사리탑 부도도 세우고...

 

망해사승탑

 

평면 팔각의 팔각원당형 부도이며, 지대석은 평면 방형으로 4매석으로 결구하였다.

하대석은 상하단석의 2단 구성으로, 하대석 하단석은 2매석으로 결구되었으며

하대석 하단석의 하부에는 1단의 괴임을 마련하였다.

면석의 각 면에는 넓은 안상을 조출하고 안상 내부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으며,

하대석 하단석의 상부는 갑석형으로 치석하였다.

별석의 하대석 상단석은 일석으로, 하단을 한 단 올리고 그 위에 복판8엽의

복련으로 장식하였는데 복련은 판내에 음각으로 화육을 표현하였다.

판단은 위로 첨형으로 솟구치게 하고 그 위에 귀꽃을 올렸으며,

귀꽃 내부 하단에는 좌우에 고사리문을 조식하고 중앙에 화문을 조식하고

연판 사이에는 비교적 넓은 간엽을 조출하였다.

복련 위에는 높은 각형 1단의 괴임을 마련하고,

다시 그 위에 낮은 각형 3단의 괴임을 마련하여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괴임은 상부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모습이다.

별석의 중대석은 평면 팔각으로 모서리에 우주를 모각하였으나

면석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다.

 

 

상대석은 일석으로 하부에 각형 3단의 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로 단판 16엽의 앙련을 이중으로 장식하여 중판을 구성하였다.

연판은 판단이 약간 첨형이며 판내에는 음각으로 넓은 화육을 표현하였고

상단 연판 사이에는 좁고 작은 간엽이 조출되었으며,

앙련의 상단은 한 단 높게 치석하여 자방을 표현하였다.

상대석의 상부 자방 내부에는 각호각형 3단의 탑신 괴임을 마련하였다.

탑신괴임은 별석으로 탁자형이며 별석의 탑신괴임 면석에는 안상 1구씩을 조출하고,

탑신괴임의 상단에는 갑석형 받침을 마련하였다.

상면에 작은 복판 24엽의 복련문을 장식 그 위에 다시 각호각 3단 탑신괴임을

마련하였다. 탑신석은 별석으로 평면 팔각이며, 탑신석의 모서리에는 우주를

모각하고 면석의 상하에는 상하인방을 가로 걸쳐 면석을 장방형으로 구획하고,

맨 위에는 주심도리를 모각하였다. 면석의 4면에는 문비를 모각하고

문비는 한 단 높은 띠형으로 장방형이다.

 

 

문비 내부에는 자물쇠나 문고리의 모각은 없으며 문비 상부에는 반원형의

장식이 있으며, 옥개석은 하면에 각형 1단의 받침을 마련하고 팔각의 모서리에

낮은 돋울대로 구획하고 내부는 처마의 중간까지 호형으로 밖으로 내민 모습이다.

그 위로 각형 1단의 받침을 마련하고 밖으로 넓은 절수구를 마련하고

처마는 하단은 수평이나 상단은 호형에 가까운 날렵한 모습이다.

처마의 전각의 반전은 날렵하며 처마 모서리 끝에 풍탁공이 있다.

옥개석 낙수면은 현수곡선을 그리고 있어 물매가 완만하고 기왓등의 표현이 없이

밋밋하게 처리하였다. 합각부의 내림마루는 상부에 마루기와가 모각되었으며

내림마루는 처마 위에서 끝나고 있으나, 그 앞에 돋울대의 표현은 생략하였다.

옥개석 정상에는 갑석형으로 된 1단의 상륜괴임을 마련하였고

상륜부의 모든 부재는 유실되었다.

 

서부도 - 탑신괴임 하단부에 각형 1단의 괴임대가 있다.

 

동부도 - 탑신괴임 하단부에 괴임대 없이 처리하였다.

 

1. 탑신괴임이 다르다

동서부도 비슷하지만 탑신괴임에서 차이가 있다.

동부도는 탑신괴임 하단부가 서부도와는 다르게 각형 1단의 괴임대 하부 1단이 없다.

 

 

2. 옥개석이 석등형이다

옥개석이 일반부도에서 보는 옥개석이 아니라 석등에서 보이는 옥개석이다.

이러한 옥개석은 이 부도가 최초이며 9세기말에 조성된 부도가 아니라

10세기 초반에 조성된 부도임을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3. 같은 부도를 2기가 조성되어 있는 이유

  * 보제존자 사리탑처럼 고승의 사리를 분사리 한 경우

  * 동시대에 2명의 고승이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신 경우

이러한 사실은 양부도가 동일 장인집단에 의하여 거의 동일 시기이지만

약간의 시기적인 격차를 두고 건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4. 조성시기는 10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고승의 승탑(부도)이 아닌 호국기원 불탑?

 

 

부도(浮屠)란 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무덤이다.

부도는 부처를 뜻하는 부다(Buddha)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라고 한다.

처음엔 부처의 사리를 모신 불탑과 승탑(僧塔)을 모두 의미했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날처럼 승탑으로 한정된 뜻을 지니게 되었다.

 

통일신라는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이 조성된 8세기까지 석탑의 나라였다면

9세기부터는 부도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승탑이 집중적으로 조성되다.

자기의 본성을 깨달으면 곧 부처(見性成佛)’라는 종지(宗旨)를 가진 선종이

유행하면서 법맥을 이어받은 선문조사(禪門祖師)는 부처와 다름없는 존재로

받들어지게 된다.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석탑을 만드는 것처럼 일생을 마친

선사의 사리를 안치하는 부도를 자연스럽게 조성했을 것이다.

통일신라의 부도는 예외 없이 팔각형의 집 모양으로,

이런 모양의 부도는 중국에 선례가 있는데,746년 허난(河南) 회선사(會善寺)

세워진 정장선사탑과 800년을 전후해 조성된 창안(長安) 초당사(草堂寺)

소요원(逍遙院)의 구마라습사리탑이 그렇다.

당시에는 탑이나 불전, 누각과 정자 등의 팔각형 집을 매우 고귀한 곳으로

인식한 듯하다. 아미타부처와 관음보살의 도량도 팔각형이라고 한다.

하지만 팔각형 집 모양의 탑이라고 해서 모두 부도는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흥미롭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부도처럼 보이는 울산 망해사 쌍탑이 승탑이 아닌

불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신용철 통도사성보박물관 수석학예사는

망해사터가 부도모양의 쌍탑이 동서로 세워지고 북쪽에 건물을 배치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쌍탑가람의 형식이라는데 주목했다.

9세기 승탑은 양양 진전사터의 도의선사 부도처럼 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조성되다가, 10세기에 접어들면서 300보 안팎의 거리에 세워지는 사례가 늘어난다.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에 같은 형식의 부도를 같은 장소에 함께 세운 사례는

망해사가 유일하다.

승탑에는 탑비가 동반되기 마련이지만 망해사 쌍탑에서는 이것도 찾을 수 없다.

지붕돌에 풍탁 같은 장식물을 달 수 있도록 구멍을 뚫은 장엄공을 만들어 놓은 것도

불탑의 증거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처용 연구가인 김경수 중앙대 국문과 교수는

망해사가 국방상의 이유로 창건된 경주 감은사와 놀라울 만큼 비슷한

구조와 지형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감은사에 동해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이견대(利見臺)가 존재하듯,

망해사에도 옛 절터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바다를 통한 외래인의 왕래를

관찰할 수 있는 망해대(望海臺)가 있었다는 것이다.

망해사 쌍탑이 불탑이 분명하다면, 200년 남짓한 시차가 있지만,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은 신문왕이 부처의 가피력으로 외적을 물리쳐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681년 창건한 감은사의 동서탑과 똑같은

기원이 담겨있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망해사 쌍탑은 승탑일 수도,

불탑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불탑이라면 부도 모양으로 조성한 그 배경이 궁금하고,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도 넓어질 것 같아 불탑설()로 조금 더

마음이 기울게 된다.

 

이 석재의 용도는?

 

 

동서방향으로는 길쑴하지만 남북으로는 짧은 비대칭 장방형의 석재로

판석 상부에는 각호각 3단의 괴임대가 있고, 아래는 각형 2단의 받침이 있다.   

 

탑신석 갑석으로 보면 딱 어울리겠는데, 문제는 장방형이라는 것이다.

좌우로 길게 뻗은 이 석재의 용도는 대체...?

 

참고

   1. 신라와 고려시대 석조부도 - 엄기표

   2.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 이지누

   3. 울산 영축사 출토유물 자료집 - 울산박물관

   4. 답사의 길잡이 14 - 경남편

   5. 카페 옛님의 청취, 그 향기를 따라 - 달넘새님

'그외지역 > 경상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을미년 가을에 떠난 울산 답사 -4  (0) 2015.09.09
을미년 가을에 떠난 울산 답사 -3  (0) 2015.09.08
울진 해월헌 편액  (0) 2015.08.25
울진 영명사  (0) 2015.08.24
남평문씨본리세거지와 봉창  (0) 2015.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