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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관스님의 고향방문기념비

참땅 2013. 1. 10. 16:18

故鄕訪問記念碑銘

 

 

 

 

伽山智冠故鄕訪問記

白頭大幹迤邐하게 흘러 洛東正脉形成되었고 다시 周王山을 지나 東海쪽으로

뻗다가 이곳에 이르러 內延山 天嶺山 呼鶴山이 마치 屛風처럼 둘러앉았다.

凊河과 바다 사이에 位置한 살기 좋은 名地이다. 山川이 그윽히 맑고

虎尾串에서 나날이 솟아오르는 日光月光으로 燦然하던 청하골에 人迹이 처음

찾아 든 것은 아득히 먼 新石器時代이다. 이후 高句麗 때는 阿兮縣으로 다시

신라에 귀속된 후에는 海阿縣으로 조선조에는 德城縣에서 凊河縣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千餘세대 萬餘人共住하며 주변의 田畓耕作하고

바다와 山川에서 고기 잡고 나물 캐며 살아오길 數 千年이 이어왔으나 一九九七年

농촌 용수개발로 柳溪池가 축조됨에 따라 住民 全體가 이주하게 되었다.

0十二年 사업이 종료되면 柳溪마을 一圓이 모두 水沒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六午年 前 집을 나와 入山한 후 한 번도 돌아보지 못했던 고향땅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마침 曹溪宗總務院長 소임도 임기만료로 退任하였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보니 아득한 幼年時節의 자취는 곳곳에 남아있었고 나의 어린 시절

고향을 지켜온 月城李氏門衆들과 凊河面長, 포항寺庵연합회 스님들과

信徒團體聯合會 會長團 그리고 浦項市廳 訪問 時 시장 및 관계자 여러분들이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圭字 白字이신 父親께서는 柳溪里 六七八번지의 옛 집터에서

세의 맏아들을 잃고 시름에 잠겼다가 玉女織造型인 이 자리로 옮기면 후손이

융성하리라는 風水助言에 따라 집터를 옮겼으나 이 터는 다시 논으로 변하였다가

이제는 다행히 貯水池境界를 벗어나 이렇듯 지난날의 자치를 새긴 貞石의 터전이

되었다. 나는 집터를 옮긴지 三年 後一九三二年 음력 五月 十一(양력 十四

) 이곳에서 태어났으나 사세 때인 一九三六年 음력 十二四十一세의

金寧金氏 先字 伊字 이신 母親을 여의었고 十五세 때인 一九四七年 음력 二五

父親마저 五五세로 돌아가시니 孤哀子가 된 나의 少年時節은 아득하고 캄캄하기만

하였다. 一九四五年 광복前後 그리고 時代民生戰火絶望하던 한국전쟁 그사이

나의 人生行路는 크게 바뀌었다. 十歲 이후 이름 모를 병을 얻어 百藥

無效이던 어린 나를 황바위골 절에 요양 차 머물게 한 이후 공양미를 등에 지고는

기암절벽 사이의 法性寺 오름길을 자주 왕래하셨다. 淸秀道場에 머물며 觀世音菩薩

六字大明王眞言인 옴마니반메훔을 간절히 稱念한 영험으로 나의 병은 완쾌되었고

마침 海印寺에서 托鉢 나온 龍溟스님의 법문을 듣고는 출가를 결심하였다.

一九四七年 海印寺로 가서 慈雲大律師 스님을 恩師로 하여 得度한 후 이어 鳳巖寺禪院

으로 옮겨 정진하던 중 빨치산 夜襲으로 경찰로부터 대중해산명령을 받고 떠나

울릉도 聖人峰 밑 주사굴에서 生食精進하다가 五臺山 方漢岩 스님 會上을 찾아 가던

住文津에서 二五를 맞았다. 부득이 南行하여 고향 近處寶鏡寺 瑞雲庵 龍華

禪院에서 정진하던 중 형님가족 모두 虎列刺生死를 넘나든다는 전갈에 부득이

이곳을 왕래하며 간호하던 그때가 庚寅年이고 다시 찾은 올해 또한 경인년이니 六十

만의 고향방문이 되었다. 그때 駐錫했던 寶鏡寺浦項市民依支處로 지금도

毅然하다. 三五0년 전 이곳 청하에 터를 잡은 月城李氏入鄕祖鶴浦公 晦徵祖

시니 공은 慶州李氏始祖瓢巖公 後居明二六代孫이고 益齎公一二代孫이며

判尹公 竹隱之帶祖七代孫이다. 竹隱公一三九四年 慶尙道水軍萬戶로서 왜적선을

나포하여 태종으로부터 포상 받았고 漢城府判尹으로 除授되었으며 端宗朝 死六臣 事

慶州 구량리로 歸鄕하였다. 이후 유계주변의 이씨들은 스스로를 判尹公派

鶴浦門中이라 부르며 相扶相助로 터를 일구고 살아왔다. 일찍이 朝鮮朝畵聖이라

일컫는 謙齋 鄭敾一七三三年 이 고을 縣監으로 있으면서 청하읍성의 眞景畵

남겼고 一八一一年 현감 安錫全東軒懸板 七政軒六淸軒으로 바꾸었으니

時淸而河淸 官淸而心淸 風淸而水淸 이라 하여

時節純正하니 自然이 함께 맑고 官吏淸白하니 따라서 民心 또한 淸安하며

바람결 한결 같아 萬物의 잠자리 또한 편안한 곳이라 칭송하였다. 나아가 淸河

해맞이의 땅 迎日의 안자락이다. 그리고 지금은 포항시에 속한다. 포항시는 延日

烏川九龍浦興海 淸河松蘿神光竹長杞北杞溪大松東海長鬐

虎尾串面 유구한 인문의 자취와 秀麗風光을 간직한 고장들로 莊嚴하고 있다.

自古山紫水明大地 위에 長久한 세월을 和平하게 이어온 인간의 共同體가 있다면

그곳에는 반드시 文明道德崇尙되고 傳承되어 왔음에 틀림없다.

地靈의 포항시는 忠孝表象인 영일의 李仁夫鄭夢周 慈愛道德의 스승들인

興海眞覺國師千熙 寶鏡寺圓眞國師承逈 常泰寺圓覺祖師摩訖 鰲岩大師毅旻

一七二八年 李麟佐亂 都巡橅使 吳命恒의 선봉이었던 柳溪里 忠勳堂 泉窩 尹百肧와 임진왜란 때 義兵大將으로 郭再祐將軍과 함께 火旺山 八空山 등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大松面 公須洞水月 金見龍 義兵大將只杏面 蒼旨里竹溪 李大任徐方慶

등은 모두 生命不顧하고 愛民을 실천한 해맞이골 포항의 義士들이다. 또한 只杏面

林中里金士敏十五세 때 三冬雪寒病中의 아버지가 희망하는

두꺼비를 祈禱感應으로 얻어 을 낫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손가락을 잘라 鮮血로서

父命延長케 한 出天孝子였으니 이들 모두는 오늘 날 우리 모두의 共同體

면면히 계승해온 포항의 밝고 깊은 精神들이다. 日光月光無畵光明을 되돌려

길이길이 영원토록 빛나게 한 延烏郞細烏女의 전설을 품은 悠久한 포항의 오랜

道德이 길이 빛나기를 기원하며 아울러 보다 나은 공동의 생활을 위해 貯水池에 고향

을 내어주고 이주하신 모든 분들의 福慧雙備를 기원한다. 끝으로 成住壞空으로 楯環

日月星辰無窮한 빛을 벗 삼아 生老病死하는 人類의 끝없는 輪回無心으로 품

어 안고 生住異滅하는 森羅萬象을 말없이 보호하는 모든 중생들의 故鄕山河大地

그 고향을 지키며 共同道德宣揚傳承해온 여러 偉大하신 先祖들께 敬意를 표하는

바이다.

 

유계리의 이자리는 이몸받아 태어난곳 나기전엔 뉘였으며 난후에는 누구인가

本來面目 살펴보니 도 없건만은 六根門이 반연하여 모든分別 일으키네

本地風光 故鄕失鄕한지 오래언만 모든중생 미혹하여 찾을생각 전혀없네

부처님은 이를보고 어미잃은 孤兒라고 을 일으키되 赤子처럼 보살피다

나의고향 淸河땅은 국내에서 제일江山 偉蹟남긴 人物들과 문화유산 남기신분

헬수없이 많고많아 모두함께 들수없다 六十年을 지난후에 고향땅을 밟아보니

고향마을 유계리는 물속으로 잠기었고 태어났던 집터에는 벼뿌리만 총총하네

헤엄치며 놀던못엔 農水만이 가득하고 소먹이던 뒷동산은 깊은숲이 우거졌네

天嶺山의 중턱에는 흰구름이 걸쳐있고 呼鶴山의 꼭대기엔 독수리가 배회하며

內延山은 말이없이 南山만을 바라보고 동해바다 파도소리 海阿消息 전해주네

신라인의 氣魄으로 羅麗濟를 통일했듯 오늘날의 우리들도 日月精의 기를모아

이 통일되고 국민보두 하나되어 이나라의 이民族을 복되도록 하여지다

 

佛紀 二五五四年(2010) 十五瓢巖公 謁平後居明 三十七代孫이며

慈雲文人 智冠 짓고 友竹 楊鎭尼 써서 建立委員團 세우다

 

 

 

 

이 빗돌은 현재 청하 유계리 유계저수지 안쪽

지관스님 생가터에 세워져있습니다.  

 

 

청하 황뱅이골 법성사에 가다가 우연찮게 만난 비석입니다. 

 

 

지금도 동네사람들은 지관스님이 법성사에 처음 출가한걸로 알고 있으나

지관스님이 어릴적 요양차 머물렀던 절집이라는걸 비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법성사 가는 길에는 지금은 폐쇄된 일제시대 코발트 광산굴

그리고 이동신선생의 眞鷄(진계) 각자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