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판, 장기판, 고누판이 함께 있는 盤龍臺
반룡대는 迎日人 處士 정상순(鄭相淳)이 축조한 경남 양산 어곡동에 있는
조선시대 臺이다.
할석을 쌓아 반구형으로 담장을 둘러놓았으며, 바닥에는 평평한 자연석을
깔아놓았으며, 편평한 자연석 위에는 장기·바둑·고누판이 새겨져 있다.
건너편 암벽 바위면에는 伏龜淵(복구연)이라는 각서도 있다.
水石의 기절(奇絶: 극히 기이한)이 많아 읍재(邑宰: 읍을 다스리는 縣令)와
文人들의 題詠이 있다.
1870년 이곳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 鄭在綸의 盤龍臺記와 鄭鎭根의 登盤龍臺
그리고 尹載衡의 詩 蟠龍臺가 전하고 있다.
○「盤龍臺記」 - 정재윤(鄭在綸)
양산군은 영남의 궁벽한 곳으로 풍속이 아름답다. 산은 나는 듯하고 물은
달려서 낙동강 달을 향하여 金陵에 이르며, 바다 구름은 蓬萊에 이어지니,
그 서북쪽 여러 산봉우리와 골짜기의 특이한 것이 鷲棲山 기슭이 된다.
그 외에 圓寂山과 金井山 또한 모두 명산으로 서로 가까운 듯 먼 듯 안고
서있으니 그 중에 은거하는 사람이 있구나. 愚谷 골짜기를 거쳐 明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십리나 되는 바위 계곡은 서쪽으로 내달아 산에
둘러싸이고 들이 펼쳐진 곳에 이르니, 이가 化龍洞이다.
이 마을 앞에는 臺가 있고 그 위에는 소나무가 있으니,
그 평평하고 구불구불한 형상이 늙은 용과 같아서 이곳을 盤龍이라
이름하였다. 여기에 대를 쌓은 이가 누구인가? 處士 정옹(鄭翁)이 그러하니
정옹은 가히 뜻이 있다 하리라.
옛날 한 그루의 나무와 하나의 돌이 있어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나무는
비로소 그늘이 되고 돌은 자리가 되었더니, 비록 바람 부는 아침과 비 오는
저녁이라도 나아가서 휴식하는 장소로 삼으니 산수 가운데서 세상 시름을
잊었었구나. 위에는 신선의 봉우리가 솟았고, 仙臺山 아래로는 그윽한
골짜기가 깊이 감춰져 있으며, 땅은 평범하지 않으니 사람 또한 근접하기가
쉽지 않구나. 봄바람에 꽃나무, 여름비에 폭포는 가히 감상하여 즐길 만하고
가을서리에 국화는 늦은 향기요, 겨울눈에 높은 소나무는 무성한 푸르름이니
대를 둘러싼 것들이 四時를 이어 소식을 전하고 있구나. 골짜기가 끝나면서
마을이 열리니 샘을 파서 술을 빚고 연못을 파고 물고기를 길렀으니 유유히
감상하는 즐거움이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으리오?
아아! 옛사람이 지은 대가 많으나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은 것은 어째서
그러한가? 사람은 가고 없되 대는 남게 되며, 대는 오래되어 그 이름은 남게
된다. 이 반룡대가 사라지지 않은 것은 산이 높고 물이 긴 까닭이 아닌가
한다.
내가 화룡동에 있는 精舍에 잠시 머물고 있을 적에 정옹의 종손 되는
世連[『迎日鄭氏世譜』에는 이름이 世基로 되어 있는데,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이 나를 찾아와 반룡대의 記文을 부탁했으나, 나는 고루(固陋)하여
감당치 못한다고 생각하여 극구 사양하였다. 그러나 나는 원래 산수를 즐겨
유람하는 사람이라 결국 이 기문을 쓰게 되었다.
동치 개년 경오, 1870년) 8월 상순 동래 정재윤 삼가 씀
(夫梁郡於嶠南 地僻而俗美 山飛而水走 向洛月於金陵 挹海雲於蓬萊 其西北諸
峰林壑特異者 鷲棲山之餘麓也. 圓寂金井亦皆名山 而便相拱立若近若遠 庶幾有
隱居其間者乎. 由愚谷而入明者乎. 十里岩溪西而別有回山開野之處 卽龍洞也
村前有臺 臺上有松 其盤旋屈曲猶老龍然 故名地以盤龍也. 及其卜築其人爲誰
處士鄭翁也. 然則鄭翁可謂有志哉. 昨日一木與一石 與經數年之間 木始成陰
石亦就榻 其的見物意 則雖風朝雨夕 無日不至此以爲休息之所 蓋山水間忘世也.
其上仙峰聳立 下則幽壑深藏 地有不常 而人亦未易也 若春風之花樹 夏雨之瀑
布 可賞而可娛 秋霜之䕺菊 冬雪之喬松 晩香而茂翠 則臺之所助者 與回時尙消
息也. 至於盡谷而爲局 得泉而釀酒 鑿池而養魚 則遊賞之樂 豈有加於此哉.
噫 古人之臺多矣 而至今有不泯焉者何哉. 或人居而臺存 臺古而名存 則庶斯臺
之不泯者 抑亦此山高水長乎. 余方寓居於龍洞精舍 鄭翁從孫世連請囑文 故極辭
孤陋而不敢. 然余固亦樂遊於山水者 於是乎書. 同治 改年 庚午 八月 上澣
東萊后 鄭在綸 謹稿).”
○「登盤龍臺」- 정진근(鄭鎭根)
험하고 큰 바위는 스스로 용의 형상을 이루었으며(岩岩老石自成龍)
상서롭게 앉은 바위의 비취색을 거듭하였구나(碧水傳聲來汝敎)
푸른 물이 전하는 소리 너에게 오라 말하고(祥座盤巖翠幾重)
새와 물고기 토하는 노래 그대와 함께 하였도다.(飛潛吐詠與君從)
위태한 소회 지극함은 성긴 잎새에서 생기고(危懷方極生疎葉)
높은 운치 맑기만 함은 해늦은 소나무에 있도다.(高韻偏淸在晩松)
벗을 불러 잔치 자리 자주 여는 것은(喚友開筵頻有日)
오직 옛 자취 오히려 남아 있음을 알기에.(惟知古跡尙餘容)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 누대, 산과 물 가까이에 세웠는데(卜築斯臺近水龍)
주인은 한가한 선비로 농촌 출신이라네.(主人閒士出於農)
정신은 꼬불꼬불한 시내에 마음이 들뜨고,(精神盤屈溪心動)
물고기며 게는 영롱하게 바위 면에 비치네.(鱗甲玲瓏石面濃)
10리 안개 노을, 작은 잣나무에 엉키고,(十里煙霞籠短柏)
사철 뇌성과 비에 솔바람소리 들리네.(四時雷雨廳疎松)
지금 사람들아, 신령한 변화 없다하지 말라.(今人莫道無靈變)
다른 날 하늘 번쩍 뛰어오르면 동물의 왕이리라.(奮躍他年物所宗)
윤재형(尹載衡, 1812∼1871)의 시 ‘蟠龍臺(반룡대)’다.
원래 이름은 넓직한(盤: 소반 반) 바위가 있어 ‘盤龍臺(반룡대)’라 일컫는다.
그러나 대 위의 오래된 소나무 형상이 구불구불하여 늙은 용을 닮았다 하여,
또는 대 아래의 沼에 용이나 이무기가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작가가 임의로 蟠(몸을 감고 엎드려 있을 반)자를 써서 ‘용이 몸을 감고
누워있는 臺’라는 의미의 蟠龍臺라 제목을 붙인 것이다.
반룡대는 어곡동, 삼호테크 길 건너편 어곡천변에 있는, 지금 반룡대의 남쪽은
공단 조성으로 거대한 옹벽이 들어서게 되면서 주변의 옛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제영 또한 몇 수만이 전하여오고 있다. 다만 반룡대 자리만은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주변에는 배롱·팽·참·느티나무 고목들이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건너편 바위에는 伏龜淵(복구연)이라는 각서가 있다. 대부분의
누대는 자연석 그 자체이거나 약간의 인공이 가해져 이루어지는 것에 비해
반룡대는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은 경우의 臺이다.
반룡대가 있는 화룡마을에는 지금도 오래된 기와 및 토기편이 산재해 있고,
내화룡 북쪽에 있는 능걸산에는 진성여왕능이라 전해오는 큰 묘가 있다.
반룡·복구·화룡이라는 지명이 이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경남 양산 어곡동 化龍마을은 ‘龍이 승천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북쪽 신불산과 서쪽 선암산(仙巖山: 飛鳳山, 伏虎山)의 산수가 수려하고
기암괴석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이 마치 무릉도원과도 같은 곳이다.
그래서 화룡마을과 접하고 있는 龍仙마을은 ‘용과 신선이 더불어 놀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반룡대는 화룡마을 앞을 흐르는 魚谷川을 끼고 있는데 이 臺의 記文(1870년)에
의하면 마을 앞 선암산에서 반룡대를 향해 뻗은 산맥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또 반룡대의 형국은 대 앞의 沼에서 선암산을 향해 용이 昇天하는 모양이라고 한다.
반룡대는 1870년(고종 7년) 8월 화룡에 거주하던 迎日鄭氏 정상순(鄭相淳: 淳采)과 정세기(鄭世基: 世連)가 대를 축조하였고 記文은 정재륜(鄭在綸)이 지었다. 따라서 댓돌 한 편에 있는 바둑․장기판은 1870년에 새겨진 것이 확실시된다.
반룡대에는 바둑판과 함께 장기판 1개와 고누판 2개가 함께 있다. 바둑판은 마을
안에 있는 데다, 맑은 물이 흐르는 어곡천 옆으로 100년쯤 된 고목이 그늘을 만들고 있어 바둑을 두기에는 그만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바둑판은 군데군데 패여 있어 마을의 변화와 함께 빛을 잃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반룡대라고 쓰여진 비석도 깨어져 댓돌로 사용되고 있으며 현재 비석은 나중에
다시 세운 것이다.
바둑판은 가로세로 43.5cm×44.5cm로 정방형에 가까우며 화점이 없다.
바둑판 바로 옆에 있는 장기판은 72cm×47cm이며,
아래쪽 고누판은 가로세로 25cm×26cm이며
위쪽 기문 앞 고누판은 22cm×23cm이다.
기문에 쓰여진 정상순의 6대손으로 영일정씨의 30세손인 정진화씨에 의하면
영일정씨는 1700년대 숙종 때 합천에서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아마3단을 두고 있는 정진화 씨는 중학시절 친구들과 사기그릇, 독그릇 등
사금파리를 깨고 다듬어 바둑돌을 만들어 이곳에서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반룡대는 조성 당시 경관이 좋아 시인묵객들이 詩宴을 벌이고 놀았던 곳이라고
한다. 이로 볼 때 조선후기 19세기 말에는 양반과 평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바둑장기를 두었거나 바둑이 평민들에게도 많이 보급됐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바둑판이 있는 화룡마을의 행정지명은 魚谷洞으로 이 지명은 ‘물고기가 많은
골짜기’로 풀이된다. 어곡동은 말 그대로 냇물이 사시사철 맑게 흐르는 아름다운
골짜기 마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양산의 도시화로 인해 공단지구로 변모하여
화룡마을까지 채석장, 레미콘공장 등이 들어서 먼지가 마을을 뒤덮고 있다.
조용하고 한가롭던 옛 모습은 자취를 잃고 있다. 그 많은 물고기도 이제 보이지
않는다. 소한정, 반룡대, 두연대(斗淵臺) 등 명소마저 오염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소한정․반룡대 바둑판도 빛을 잃고 있다. 빛을 잃고 있는 돌바둑판을
되살리는 것이 오늘날 바둑계의 의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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