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암 남사고선생 묘소
매주 토요일 마다 한학과 풍수지리를 금오스승님께 배우고 있는데,
자꾸 결석을 하게 되어 스승님 뵙기가 영 민망하기 그지없다.
송구한 마음이 하도 맺혀 있어 몇 며칠 전 스승님께 야외수업 말씀 올리니
일정 잡아 한번 그러자고 흔쾌히 낙하시며 숭신선배님, 자인과 날짜를 잡아
보라시어 결국 오늘에서야 그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며칠 동안 답사안내로 피곤한 몸이었지만 내가 먼저 운을 떼었기에 피할 도리도
없거니와 모양새도 좋지 아니하여 위태한 삭신을 끌고 길을 나섰다.
송구스럽게 스승님께서 손수 운전해주시어 확연히 편한 자리는 아니지만
다행이 학우 자인이 분위기를 띄워주니 그나마 다행스럽다.
영양 남씨 세거지 축산을 지나 성류굴 못 미쳐 구산리 방향으로 좌회전 하여야
하는데 차내에서 설명에 열중하신 선생님께서 길을 놓쳐 버려 울진운동장 가는
길로 들어섰는데 좌우로 늘어선 가로수 은행나무와 벚꽃나무 단풍을 구경하게 되어
딱딱한 분위기를 오히려 전환하여 주니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성류굴 앞 강둑을 따라 가다가 구산리로 방향을 잡는대 어디선가 보던 풍광이라
생각해보니 바로 주변에 구산리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다.
다른 길로 접어들기에 조금은 아쉬웠지만 평소 격암 남사고선생의 이름만 접했지
오늘처럼 이렇게 숨결을 느껴보기란 충분히 벅찬 감동이 되기에 그 아쉬움을
멀리 할 수 있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안온한 풍광이 멎적은 마음을 순식간에 쓸어내린다.
맞은편 오뚝 솟은 산을 안산으로 잡아주면 그 바로 맞은편이 좌혈이 될 것이라며
간단한 음료로 숨을 고르고 곧장 산을 오르기 시작 한다.
가뜩이나 공주마마 같은 자인은 몇 발자국 걷지도 않고 엄살부터 지른다.
그러던 차 채 10분 여 만에 앞쪽으로 묘소가 보인다
묘소 위쪽에서 맞은편 안산을 바라보니 추수가 끝난 노오란 논바닥과
채 단풍이 들지 않은 나무와 대조적이면서 풍광이 그저 그만이다.
저 논바닥을 마당으로, 주위를 빙 둘러싼 크지도 높지도 않은 산들이 자연스레
외부의 바람을 막아주니 저 논이 명당이란다.
나무에 가려 주산 봉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입수 용맥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앞 방향은 기가 막히게 좋으나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후룡으로 썩 좋은 자리가
아닐 것으로 판단되며, 소나무가 크게 자라지 않으면서 굴곡으로 휘어진 점 등으로
산 정상부는 돌이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근 울진군의 정책적 사업으로 인하여 단정하게 잘 가꾸어진 격암선생의 묘소를
대하고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간단한 묵례를 하고 비석을 살폈다.
앞면에는 格菴南先生之墓,
옆면에는 崇禎紀元後五 즉 1890년에 건립하였던 같다.
묘소의 앉음새는 거의 정남향 자좌오향이다.
좌청룡 우백호에 둘러싸인데다 좌우 대문도 낮은 산들로 막혀 있다.
후룡의 지맥만 보강된다면 기가 막힌 곳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묘소의 위치도 현재보다 좀 더 아랫방향으로 내려가야 했으나, 안산의 기세가
강하여 어쩔 수 없이 상부 방향으로 올라 온 것으로 추정된다.
후룡의 맥이 미약함을 볼 수 있다
우측 망주석
좌측 망주석
두개의 망주석과 상석 외에는 특별한 석조물이 보이질 않았고,
보통 망주석에 세호를 장식하는데 세호도 보이질 않았다.
숱하게 들어왔던 ‘구천십장’의 주인공 격암선생의 묘소는 과연 누가 잡았을까?
그 터잡이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아직은 이론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라 구구절절한 내막을 풀어내기란 어리석은
짓이려니 생각하지만 그래도나마 이런 공부를 한다는 것에 가슴 뿌듯함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그 행복감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으니...
조목조목 설명해주신 스승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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