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 가을에 떠난 울산 답사 -3
개암나무
우리나라 옛이야기 혹부리영감에 나오는 개암나무의 열매 개암은
딱딱한 껍질 때문에 숨어 있던 혹부리영감이 도깨비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 개암나무에 얽힌 다소 색다른 전설이 있었으니...
아담과 이브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어 낙원에서 추방당했다.
신은 아담을 불쌍하게 여겨 개암나무 지팡이로 물을 내리쳐
새로운 동물들을 창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담은 유목 생활을 해야 할 자손들을 위해 양을 만들었고,
이브는 서툴게도 양떼 사이에 늑대를 풀어 놓고 말았다.
깜짝 놀란 아담이 이브의 손에서 개암나무 지팡이를 빼앗아
양떼를 지킬 개를 만들었단다. - 어딜 가나 女子가 말썽이다.
청송사터
청송사지는 울산 울주구 청량면 율리 문수산 기슭에 자리잡은 폐사지로,
신라 효소왕때 처묵(處默)이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지리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망해사와 청송사가 문수산에 함께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울산 지역의 큰 사찰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폐사된 시기는 조선 중기 또는 후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울산부 읍지>(순조 31년본, 1831년)에는 이름이 나타나나,
<울산군 읍지>(광무 3년본, 1899년)에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이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 근처의 청송마을 전체가 청송사 경내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청송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었으며, 지금은 보물 제382호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3기의 부도만이 남아 있다.
청송사삼층석탑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 청송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제 3층 석탑으로 높이가 5.5m이다.
신라 효소왕 때 처묵(處默)이 창건한 청송사의 옛터에 서있는 석탑이다.
청송사는 현재 마을 전체가 절터라고 전하고 있을 만큼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곳으로 보인다.
1917년 춘담(春潭)이 두 번째로 크게 확장한 바 있는데,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전하는 설화가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이 가까운 방현사터의 아미타여래좌상을
오대산의 절로 옮기기 위하여 길을 가던 중 청송사 앞에 이르자
갑자기 무거워지고 소나기가 뿌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어지자
불상이 있어야 할 곳이 이 절임을 깨닫고 이곳에 모셔 두었다.
그 후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불상을 몰래 반출하기 위하여
주문진까지 옮겨갔으나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서 포기하였다.
춘담이 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예불을 드리고 돌아갔는데,
원인 모르게 3년 동안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불상이 나타나 봉안하지 않은 것을 꾸짖으니,
이곳에 와서 절을 크게 확장하고 불상을 모셔두었고, 이내 몸이 나았다고 한다.
이 탑은 2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석탑이다.
기단은 아래 ·윗층이 같은 양식으로 되어 있다.
각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기고, 마감돌 위에 다른 돌로
2단의 모난 괴임돌을 끼워서 각각 윗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이 특히 길고 크며, 2층 몸돌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각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가 두꺼워 지붕 네 귀퉁이의
치켜 올림이 약하며 처마는 수평으로 길이가 짧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만 남아 있다.
이 탑은 기단의 짜임새가 정연하지 못하고, 1층 몸돌이 지나치게 크며,
지붕돌이 짧아 좋은 비례로 보기 어려우나, 지방에 분포된 신라 석탑의 한 예로
주목할 만하다. 또한 1층 몸돌의 괴임돌이 다른 돌로 되어 있는 점은
탑의 특이한 조형과 아울러 9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을 짐작하게 한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2층 기단에서 동제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 청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유리구슬 16점, 수정으로 만든 곱은옥 1점,
관옥 1점 등 30여 점이 발견되었다.
특이하게도 하층기단중석과 하층기단 갑석을 일석(한 돌)으로 치석하였다.
하층기단갑석의 상면 중앙에는 특이하게 상층기단 면석과 일석으로 치석된
별석의 각형 2단의 괴임석을 마련하였다.
상층기단갑석은 5매 돌로 결구되어 있다.
별석의 각형 2단 탑신 괴임이 상층기단 갑석을 관통하엿다.
상층기단 갑석 위에 별석 탑신괴임이 얹히는 것이 아니라 갑석에 방형의 구획을
마련하여 잘라내고 그 내부에 탑신 괴임을 관통시키듯 끼워 넣은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석탑의 결구법이었다.
초층탑신석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다.
상륜부 노반이 상면에 안쪽으로 1단의 괴임이 있어 밖으로 돌출되는
일반적인 노반과 다르다.
낙수면이 현수곡선을 그리고 있다.
9세기 말 이전까지는 위의 7가지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탑은 단층기단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으며 일반 석탑에서 나타나지 않는
특징이 있어 9세기 말에서 10세기초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62년 해체 수리 전까지 이 앞으로 마을 길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동네 주민.
불상도 한 구 동네주민이 발견하여 소유하고 있었으나 당시 문화재청 직원 한 분이
환수하여 갔다고 하나 지금 어디에도 그 불상을 볼 수가 없다며 토로한다.
이 지점까지 묻혀 있던 석탑을 끌어 올렸다고 한다.
이날, 바로 옆 산등성이에 석탑 옥개석이 반쯤 묻혀 있고
바로 옆에 부도 2기가 있다는 말에 허겁지겁 산을 뒤졌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다시 물어 보았으나 '못 찾으모 그마이지 머'
낚인 건지, 속은 건지... (참고 자료: 달넘새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