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작약은 결코 목화가 될 수 없다.

참땅 2013. 7. 8. 16:22

작약은 결코 목화가 될 수 없다.

다수의 거짓과 소수의 진리 - 의성땅에서의 해프닝

 

그랬다.

그건 순전히 목화시배지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이거 목화 아잉교?

아이다. 이기 머가 목화고...

아인데, 이거 목화 같은데...

허 참내, 아이라카이까네.

 

선생님 이거 목화 맞제?

~따 참내, 아이라캤자나

이거 목화 맞다.

~, S샘 이거 목화 맞나.

목화 맞네, 이거 목화 맞따.

머라꼬, 우에가 이게 목화고.

바라, 목화 맞자나

 

거기서 결국 목화 아이다캤던 내가 지고 말았다.

3:1의 우기기는 멀쩡한 한 사람을 그렇게 쪼다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조문국 경덕왕릉을 벗어나 주차장에 설치된 안내판에서,

5분도 더 지나지 않은 그 순간에 모든 진실은 밝혀지고 있었다.

작약이었다.

의성 금성에 조성된 고분군 구역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작약꽃밭은

일순 목화밭으로 변신했다가 다시금 작약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처럼 힘 있는 다수의 논리는 진실을 외면할 수도, 짓밟아 버릴 수도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끝까지 우기던 한 사람이 진실을 발견하고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양심고백(?)을 한 순간 진리의 탑은 무너지지 않았다.

 

 

물론 몰랐기에 추정만으로, 선입견만으로 자신의 주장을 폈기에 망정이지

그걸 알고 있으면서 엄연히 잘못임을 인지하고 있으면서 힘 있는 다수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외면하고 짓밟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부쩍 양심에 호된 질책을 가하면서 자신을 팔아가며

세상의 진리를 묵과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꼬인 실타래를 빨리 풀고 싶은 욕심에 어긋나,

비양심적이고 부도덕한 행동은 훗날 엄청난 상처와 후한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진실은 목화가 아니고 작약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의성 조문국사적지의 진실은 결코 목화가 아니다.

3:1이 되었던 100:1이 되었던 그것은 결코 목화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윗글의 사연인 즉

W샘이 조문국사적지의 경덕왕릉 가는 오솔길 옆에 제법 넓은 꽃밭을 보고 물었다.

이거 목화 같은데 하고.

나는 목화가 아니라고 대답을 해주었는데도 영 시원찮은지

고분전시관을 관람하고 나오는 길에 M샘에게 또 물어본다.

이거 목화 아니냐고, 그랬는데 M샘 또한 목화 맞다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자꾸 아니라 하니까 그라모 S샘에게 함 물어보자 한다.

하여 S샘에게 물어본 즉 목화가 맞다고 한다.

내 상식으로는 S샘은 분명 알고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 또한 목화라고 한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내가 잘못알고 있는가 싶어 목소리에 힘이 없어져 버렸다.

그래도 영 찜찜하여 사진 촬영하여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한발 물러섰다.

 

그랬는데 없던 자신이 생긴 W샘이 확고히 못을 박아두고자

즉 자신이 맞았음을 확신하게 되어 주차장 가에 설치 된 안내판을 보고 와서는

목화가 아니고 작약임을, 자신이 틀렸고 내가 맞았음을 시인한 것이다.

나중에 확인하며 따져 물으니 W샘과 M샘은 목화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고

S샘은 확인하지도 않고 선입견만으로 목화일 것이라 생각 하였단다.

 

멀쩡한 사람을 의아스럽게 만든 이 헤프닝은 두고두고 화젯거리가 될 것이다.

다수라는 힘을 이용하여 소수의 진실을 짓밟은 이 어리석음은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으니 말이다.

원리 윈칙과 진리를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마구 깔아뭉개고 있으니 말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법 테두리 안에서 허용되는 것이지 법 자체를 벗어난

법을 어긴 다수의 논리는 결코 민주, 다수결이라는 용어자체도 민주라는

단어를 욕되게 하는 행동이라고 본다.

 

원칙을 지킨 소수는 언젠가 그 보수를 충분히 받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지키고 싶다.